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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이천(利川) 서씨(徐氏) 원숙공파(元肅公派) 후전(後田)   시조(始祖) 서신일(徐神逸)은 신라(新羅) 효공왕(孝恭王) 때 아간(阿干)을 지내다가 국운(國運)의 쇠퇴함을 깨닫고 관직에서 물러나 효양산(孝養山) 기슭에 복성당(卜聖堂)을 짓고 은거(隱居)하면서 후진양성에 여생을 바쳤다. 이런 이유로 후손들이 시조(始祖)가 처음 살기 시작한 이천(利川)을 본관으로 하였다. 화살 맞은 사슴을 구하고 신인(神人)의 길몽(吉夢)얻어 80세에 생남(生男)하니 정민공(貞敏公) 휘 필(弼)이다. 4세(世)의 휘는 눌(訥)이고, 시호(諡號)는 원숙공(元肅公)이니 파조(派組)이다. 성종(成宗) 병신(丙申)에 갑과(甲科)에 오르고 덕종(德宗) 정종조(靖宗朝)에 문(文) 평장사(平章事)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천(利川) 부원군(府院君)에 봉하여졌으며 딸이 왕비가 되어 자손에게 영업전(永業田)이 하사(下賜)되었다. 15세(世) 호(浩)는 충목왕(忠穆王) 원년(元年)에 봉익대부상호군(奉翊大夫上護軍)을 지내었고, 공민왕조(恭愍王朝) 때 이부상서(吏部尙書)에 추증 하여졌으며, 시호는 문의공(文毅公)이다. 사적이 󰡔고려사(高麗史)󰡕와 󰡔동국통감(東國通鑑)󰡕에 기재되어 있으며, 왕평사(王坪祠)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19세조 열(悅)은 신제(新齋) 최선생(崔先生)과 도의(道義)로 서로 교제하며 인조반정(仁祖反正)때에 익재(翊載)의 공(功)이 있어 녹훈(錄勳)에 올랐으나 나아가지 않고 임천(林泉)에 은거하여 호(號)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 하였다. 39세손 휘 명현(命顯)은 광양(光陽)에 정착하다가 상경(上京)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병조판서(兵曹判書)의 관직을 제수 받고 다시 곤양(昆陽)으로 이거(移居)하였다. 30세손 형언(馨彦)은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조참의(吏曹參議)의 관직을 지내었고, 32세손 익천(翼天)은 순조(純祖) 22년 강화예원각(江華王睿源閣) 참봉을 지냈다. 35세손 정진(廷瑨)은 의사(義士) 최원형(崔垣亨)과 고종(姑從)간으로 독립군 자금을 후원하다가 왜경(倭警)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다. 영택(榮澤)은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여 육군 대령으로 예편하였고, 수용(守用)은 내무부장관(內務部長官)으로부터 공로감사장(功勞感謝狀)을 받았다. 36세손 진성(珍成)은 사업가로, 준성(俊成)은 서울시청 공무원으로, 일수(一籌)는 교육자로 활동하고 있다. 총 50여 호이나 현재 곤양에는 8호가 거주하고 있다.   문중대표는 수정(守正)이고, 종손(宗孫)은 36세손 효성(孝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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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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