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大邱) 서씨(徐氏) 송정(松亭) 대구(大邱) 서씨(徐氏)의 계보는 고려조에 조봉대부(朝奉大夫) 군기소윤(軍器少尹)을 지낸 서한(徐閈)을 1세(世)로 하면서 시조(始祖)라 하지 않고, 원조(遠祖)라 하고 있다. 대구 서씨 세보(世譜)에 의하면 서한(徐閈)의 상계(上系)가 이천(利川) 서씨(徐氏) 시조(始祖)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으로 믿고 있으나 확실한 세계(世系)를 알 수 없어서 시조(始祖)라 하지 않고 원조(遠祖)라 한다고 하였다. 원조(遠祖) 서한(徐閈) 이하 6세(世)까지 5대는 실전(失傳)되고, 7세(世) 익진(益進)부터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익진(益進)은 고려조에 판전객사사(判典客寺事)요, 본조(本朝)에 증 호조참판(戶曹參判)하고, 8세(世) 휘 의(義)는 고려조에 호조전서(戶曹典書) 사헌부 집의(司憲府 執義)에 추증 되었는데, 유고(遺稿)가 있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안주 목사(安州 牧使)이며, 증 순충보조공신(純忠輔祚功臣) 숭록대부(崇祿大夫)였으며, 달천 부원군(達川 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0세(世) 휘 거광(居廣)은 선교랑(宣敎郞) 언양현감(彦陽縣監)이고, 통례원좌통례(通禮院左通禮)에 추증되었다. 11세(世) 휘 팽소(彭召)는 성화별시(成化別試)에 올라 한림사랑(翰林使郞) 사헌장령(司憲掌令) 겸 승문원 참교(承文院 叅校)를 지냈고, 12세(世) 후(厚)는 별시(別試)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정언 장령(正言 掌令)을 거쳐 중종(中宗) 16년에 직제학(直提學)으로 있을 때 편조전(鞭條箭)을 창제하였다. 다음해에 부제학(副提學)이 되고, 대사간(大司諫) 부승지(副承旨)가 되어 영흥부사(永興府使) 예조참의(禮曹參議) 충주목사(忠州牧使) 등을 지냈다. 16세(世) 휘 원유(元裕)가 전남 광양(光陽)에서 하동 북천(北川)으로 이거하였고, 다시 곤양으로 들어와 10여 대를 살고 있다. 총 호수는 11호이다. 문중대표는 27세(世) 두태(斗泰)이고, 종손은 28세 영문(永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