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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밀양(密陽) 박씨(朴氏) 규정공후(糾正公后) 만빈공파(萬彬公派) 송전(松田)   시조 왕 혁거세(赫居世)의 45세손이고, 밀성대군(密城大君) 언침(彦沈)의 16세손인 규정공(糾正公) 현(鉉)은 고려중엽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사헌부 규정(司憲府 糾正)을 거쳐 태사(太師)에 이르렀다. 청백리(淸白吏)로서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특출하였다. 시호는 무열(武烈)이고, 규정공파(糾正公派)의 파조로서 1세(世)로 한다. 임실(任實)의 세덕사(世德祠), 옥천의 원덕사(遠德祠)에서 제향(祭享)하고 있다. 2세(世) 휘 문유(文有)는 고려 때에 경주판관(慶州判官)을 지내었고, 3세(世) 휘 사경(思敬)은 법전판서(法典判書) 겸 상장군(上將軍)을 지낸 후 추성익위공신(推誠翊威功臣)에 책록 되었으며, 4세(世) 휘 침(忱)은 공민왕(恭愍王) 때 전의판서(典儀判書)를 지냈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71현(賢)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으로 은거하였다. 5세(世) 휘 강생(剛生)의 호는 나산경수(蘿山耕叟)인데 조선이 개국되어 호조전서(戶曹典書)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하고 선공감역(繕工監役)을 지냈다. 6세(世) 휘 절문(切問)은 좌찬성(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하여졌다. 7세(世) 휘 중손(仲孫)의 호는 묵재(黙齋) 또 백당(栢當)인데 집현전 박사(集賢殿 博士)를 거쳐 도승지(都承旨)를 지냈고,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에 세조(世祖)를 도운 공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 2등이 되었으며, 좌참찬(左參贊)에 이르고 밀산군(密山君)에 봉(封)하여졌다. 8세(世) 휘 미(楣)의 호는 존성재(存誠齋)이니 이조정랑(吏曹正郞)을 거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이르고, 그의 시문(詩文)은 <동문선(東文選)>에 실려서 전해지고 있다. 9세(世) 휘 광영(光榮)은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로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고, 형조참판(刑曹參判)에 이르렀다. 11세(世) 충원(忠元)은 호가 낙촌(駱村)이니 대제학(大提學)으로 이판좌찬성(吏判左贊成)을 지냈고, 시호는 문경(文景)이며, 홍주(洪州) 노은사(魯恩祠)와 공주(公州) 동학사(東鶴寺) 숙묘전(肅廟殿)에서 배향(配享)하고 있다. 14세(世) 승종(承宗)은 호가 퇴우정(退憂亭)이니 전라관찰사(全羅觀察使), 호조(戶曹)ㆍ병조판서(兵曹判書)를 거쳐 우찬성(右贊成), 체찰사(體察使)등을 지냈고,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밀창부원군(密昌府院君)에 봉해졌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때에 조정(朝廷)에 사죄(謝罪)의 소(疏)를 올리고 장자(長子)인 자흥(自興)과 함께 자결하였다. 15세(世) 자응(自凝)은 호가 읍백당(挹白堂)이니 영광 군수(靈光 郡守)를 지냈고, 선정비(善政碑)를 세웠다. 17세(世) 만빈(萬彬)의 호가 성은(城隱)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되었고, 고성(固城)의 입향조(入鄕祖)이다. 19세(世) 태환(泰煥)은 증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로 󰡔고성읍지(固城邑誌)󰡕에 사적(事蹟)이 기록되어 있다. 20세(世) 기인(基仁)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용양위부호군(行龍驤衛副護軍)을 지냈다. 23세(世) 옥래(玉來)가 다시 곤양으로 이거하였다.   문중대표는 25세(世) 기안(琪安)이고, 종손은 27세(世) 정순(正淳)이다. 기안(琪安)은 대한민국 특허청 의장등록 제0297521호 어구생산업체를 경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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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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