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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해풍(海豊) 김씨(金氏) 송정(松亭)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은 고려조(高麗朝)에서 벼슬이 예부상서(禮部尙書)에 이르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기 때문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하고 본관을 해풍으로 하게 되었다. 시조의 묘소는 경기도(京畿道) 개풍군 상도면 대릉리 궁동에 있으며 해좌 사향이다.   해풍김씨는 시조(始祖)이하 6세까지는 문반(文班)으로 대(代)를 이어오다가 7세 김수종(金壽宗)이 무과(武科)에 급제 길주목사(吉州牧使) 겸 길주진관병마첨절제사(吉州鎭管兵馬僉節制使)를 지낸 이후부터 무반(武班)으로 옮겨져 무반(武班)이 많이 배출되었다. 17세 휘 수(洙)는 훈련원도정 겸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부총관 포도대장(捕盜大將)을 세번이나 역임하고 수원부사(水原府使)와 평안병사(平安兵使) 등을 지냈다. 19세 영(煐)은 정조(正祖) 때에 무과에 급제(及第)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를 거쳐 금위대장총융사(禁衛大將摠戎使)와 어영대장(御營大將)을 역임하였다. 순조(純祖) 29년 통제사 재임시 송정동민의 잘못으로 큰불이 나 북와동까지 번져 인가수백호(人家數百戶)가 소실(燒失)되자 북남산 소나무를 벌채(伐採)하여 집을 짓게 하였고 소나무 남벌 사건(事件)으로 파직(罷職)되었으나 동민(洞民)이 공(公)의 은덕(恩德)을 기리어 정량리의 경계에 각문(刻文)을 새긴 큰 바위가 있다. 이 바위는 공(公)이 장검을 들고 여러날에 걸쳐 군(軍)과 민(民)을 지휘하여 불을 끄게 한 곳으로써 유명하다. 그의 아드님 20세 한철(翰喆)은 삼도수군통제사(三道水軍統制使)로 철종(哲宗) 7년에 순직하였고 21세 휘 건(鍵)은 자헌대부행삼도통제사(資憲大夫行三道統制使) 겸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의 직(職)을 동치(同治) 오년(五年) 1866년 4월 24일에 받았다. 22세 태인(泰麟)은 통정대부행창원대도호부사(通政大夫行昌原大都護府使)와 창원진(昌原鎭) 병마첨절사(兵馬僉節使) 영남수군방어사(嶺南水軍防禦使)를 지내고 고종조(高宗朝) 10년에 곤양군수(昆陽郡守)로 재임(在任) 중 많은 공적(功績)으로 군민(郡民)이 세운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가 곤양면사무소(昆陽面事務所) 앞에 세워져 있다. 22세(世) 휘 태용(泰鏞)의 자(子)는 재범(在凡)이고 손(孫)은 선출(善出), 선문(善文), 성만(性萬), 성권(性權)인데 선문(善文)은 일본국에서 타계(他界)하였고, 성만(性萬)은 부산우체국장을 역임하였으며, 성권(性權)은 미국(美國)으로 이민(移民)하였다. 가세는 총 3호인데 곤양에는 한집이 살고 있다.   25세손 종태(鍾泰)는 사천시 새마을협의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 사천시문화원 서부지구분회장직에 임하고 있으며 문중대표이다. 종손(宗孫)은 26세손 석(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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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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