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商山) 김씨(金氏) 제학공파(提學公派) 수동(水洞) 시조(始祖) 김수(金需)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부(傅)의 후손으로 고려중엽에 보윤(甫尹)을 지냈다. 여러 대를 상산(商山)에 세거(世居)하여서 본관(本貫)을 상산으로 하였다. 시조의 묘소가 실전되어 상주군 상주읍 신봉리 구월산에 제단(祭壇)을 모아 향사하고 있다. 8세(世) 휘 지연(之衍)은 시강원(侍講院) 한림학사(翰林學士)이고, 11세(世) 휘 유화(有和)는 전교시제학(典敎寺提學)의 관직을 지냈는데 제학파(提學派)의 파조이다. 13세(世) 휘 후(後)는 호가 단구재(丹邱齋)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 보문각 직제학(寶文閣 直提學)의 관직을 지냈다.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단성에 은거하니 두문동(杜門洞) 72현 중의 한분이다. 14세(世) 휘 장(張)은 세종(世宗) 5년에 문과에 등제하여 세자좌정자(世子左正字) 예조좌랑(禮曹佐郞)을 지냈고, 15세(世) 휘 정용(貞用)은 봉훈랑(奉訓郞) 승문원 박사(承文院 博士)이고, 16세(世) 휘 광려(光礪)는 성균 생원(成均 生員)이며, 17세(世) 휘 달생(達生)은 호가 수정당(水晶堂)인데 한림(翰林)으로 경산현령(慶山縣令)을 지냈다. 18세(世) 휘 준(浚)의 호는 삼족재(三足齋)이니 성균진사(成均進士)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으로 일대(一代)를 칭하였다. 휘 응두(應斗)는 호가 전암(傳岩)인데 박학(博學)하고 조예(造詣)가 정심(精深)하여 당세의 추중(推重)을 받았다. 21세(世) 휘 당(宕)은 호가 은암(隱菴)으로 학문(學文)이 해박하고, 행의(行誼)가 독실(篤實)하여 성학(聖學)을 탐구(探究)하였으며 <교남지(嶠南誌)>에 기재되어 있다. 22세(世) 휘 상보(尙溥)의 호는 원모재(遠慕齋)인데 효성이 지극하여 <교남지(嶠南誌)>에 기재되어 있다. 23세(世) 휘 경(坰)의 호는 송헌(松軒)이고, 24세(世) 휘 이련(以鍊)은 호가 국포(菊圃)이며, 25세(世) 휘 정한(挺漢)의 호는 관란헌(觀瀾軒)이고, 26세(世) 휘 리(履)의 호는 매호(梅湖)이다. 27세(世) 휘 왕언(王彦)의 호는 외암(畏菴)이니 성품이 온화하고 학문이 정통(精通)하여 고가(古家)의 풍(風)이 있으며 정사(精舍)를 지어 독서하고, 외암문집(畏菴文集)이 있다. 여러대로 문한가(文翰家)의 유풍으로 세인의 추앙을 받았다. 28세(世) 휘 기호(基灝)의 호는 묵헌(黙軒)이니 행의(行誼)가 돈독하고, 효우(孝友)가 있으며, 기상(氣象)이 웅호(雄豪)하고, 논의(論議)가 정연하여 당세의 칭찬을 받았다. 여러 대로 산청 신안(新安)에 살았으며, 32세(世) 태희(台熙)는 국가유공자의 포상을 받았다. 산청에 70여 호가 살고 있으나, 33세(世) 수의학 석사 숙균(淑均)이 곤양에 와서 가축병원을 경영하며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