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金海) 김씨(金氏) 삼현파(三賢派) 송전(松田) 중조(中祖)의 휘는 관(管)이고, 호는 정성(靖醒)이며, 시조 수로왕의 48대 손이다. 고려 충선왕 때에 판도판서(判圖判書) 국자사(國子師)의 벼슬에 오르고 학교를 건설하고 유학(儒學)을 진흥(振興)시켜 많은 공을 세웠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은 김해김씨를 삼한갑족(三韓甲族)이라 칭하였고, 관(管)을 1세로 한다. 5세(世) 휘 극일(克一)의 시효는 절효(節孝)이다. 7세손 휘 일손(馹孫)의 호(號)는 탁영(濯纓)이고 시호(諡號)는 문민(文愍)이다. 8세(世) 휘 대유(大有)는 호가 삼족당(三足堂)이니 일문(一門)에서 4대간에 삼현(三賢)이 나서 삼현파(三賢派)라 한다. 현종(顯宗) 원년(元年)에 동춘당(同春堂) 송준길 선생(宋浚吉 先生)등 유림(儒林)의 상소(上疏)에 의하여 사액(賜額)을 받아 세분 선생(三先生)의 위패(位牌)를 서원존덕사(書院尊德祠)에 봉안(奉安)하여 향사(享祀)하고 있으며,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83호로 지정되어 보존하고 있다. 8세(世) 휘 대장(大壯)의 자는 정중(正中)이요 가선대부(嘉善大夫)로 무오사화(戊午士禍)이후에 전라도 남원에 이주한 바 있다. 9세(世) 휘 용(鏞)도 사화(士禍)때에 호남(湖南)에 적거(謫居)하였다. 10세(世) 휘 치목(致穆)은 청도(淸道)의 선영(先塋)을 지키기 위하여 죽방(竹坊)에 이거(移居)하였다. 11세(世) 선의(善儀)가 다시 하동 북천에 정착하였다. 한림(翰林)벼슬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행대사헌(行大司憲)이며, 시문(詩文)에 능하여 유고(遺稿)가 있다. 16세(世) 운성(運聲)이 다시 곤양으로 이거하여 총 10여 호였으나 각기 다른 지방으로 이사를 가고 곤양에는 단 2호만 살고 있다. 문중대표는 대봉(大奉)이며 곤양초등학교장을 역임하였고, 종손은 19세(世) 기봉(基奉)이다. 기표(基杓)는 동일방직 인도네시아지부 이사이며, 경래(京來)는 명지대학 축구부감독으로 체육계에서 활약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