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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김해(金海) 김씨(金氏) 감무공파(監務公派) 상정(上鼎)   시조는 가락국 태조(太祖) 수로왕(首露王)이고, 중조(中祖)는 감무공(監務公) 휘 익경(益卿)이다. 7세(世)의 휘는 사조(嗣祖)이니 통정대부(通政大夫)이다. 8세(世) 휘 극복(克福)은 호가 해사(海史)이다. 사람됨(器局)이 웅위(雄偉)하고 여력(膂力)이 절윤(絶倫)하였다. 일찍이 율곡(栗谷) 선생 밑에서 사사(師事)하고 이충무공(李忠武公)과 종유(從遊)하여 기사(騎射)를 익혔다. 선조(宣祖) 계유(癸酉)에 등과(登科)하여 내금위(內禁衛)를 거쳐 임치첨사(臨淄僉使)를 지내었다. 임진왜란 때에 이충무공의 막하에서 큰 공을 세우고, 정유재란(丁酉再亂) 때에 화전이(火箭銕)로 많은 승첩(勝捷)을 거두어 전사하니 병조판서(兵曹判書)로 증직되었다. 9세(世) 휘 식(湜)은 선조진무원종훈(宣祖振武原從勳)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하고, 또한 이괄(李适)의 난(亂)에 창의(倡義)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전사하니 겸지의금부사(兼知義禁府使)로 증직되었다. 10세(世) 여익(汝瀷)은 효종조(孝宗朝)에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의(戶曹參議) 의금부사(義禁府使)로 병자호란(丙子胡亂)에 화의(和議)가 이루어지니 전남 광양 태인산(太仁山) 아래에 은거(隱居)하였다. 후에 섬진강구(蟾津江口)에 해태(海苔)의 양식법(養殖法)을 보급하니 공(公)의 기념관이 광양시 태인동에 건립되었다. 여러 대로 가선통정대부(嘉善通政大夫)의 교지(敎旨)를 받았다. 17세(世) 석춘(錫春)은 통정대부(通政大夫) 공조참의(工曹參議)이고, 18세(世) 휘 재태(在泰)의 호는 호걸(豪傑)이니 일제하(日帝下)에 임야(林野)에 은거(隱居)하여 무궁화(無窮花)를 집 주위에 심어 재배하고 목선(木船)을 조성하여 강구(江口)에 놀리며, 김을 양식하고 근검절약하여 세상사를 잊고 지내니 새로운 호걸파(豪傑派)의 파조(派祖)이다. 19세(世) 상수(相守)의 호는 여랑(旅浪)이요, 아들 맹열(孟烈) 호는 구우(鷗友), 상암(相岩)의 호는 명봉(鳴峯)이니 광양에서 간척사업을 하기 위하여 곤양(昆陽) 고동포(古洞浦)로 이주하였다. 아들 이수(利洙)의 호는 “고요바다”이니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 및 곤양중학교 교사와 교감(校監)으로 38년간 교육사업에 헌신하였고, 석현(石炫)은 호는 당란(堂蘭) 사업가로, 광옥(光玉)은 유선방송사 대표이고, 룡(龍)은 예비역 육군중위로 기업가로, 대철(大哲)은 신한은행에서 근무하며, 태영(泰榮)은 학원 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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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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