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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광산(光山) 김씨(金氏) 첨추공파(僉樞公派) 환덕(還德)   시조(始祖)의 휘는 흥광(興光)이다. 신라의 왕자로 앞으로 나라가 어지러워질 것을 예견하고 무진주(武珍州) 서일동(西一洞)으로 피하여 학문(學文)을 닦으며 살았다.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하고 본관(本貫)은 무진주가 광산(光山)으로 개칭되어서 광산(光山) 김씨(金氏)로 하였다. 시조의 유허지(遺墟地)는 실전(失傳)되어 단(壇)을 모아 제향(祭享)하고 있다. 광산김씨는 고려조(高麗朝)에 8대(八代) 평장사(平章事)와 조선조(朝鮮朝)에 대제학(大提學) 7명과 문묘(文廟)에 부자(父子)가 나란히 종사(從祀)하였다. 3세(世) 휘 길(佶)은 려조(麗朝)에 사공(司空)의 관직을 지냈다. 15세(世) 휘 사원(士元)의 시는 경정(景貞)이니 충선왕 때에 평양윤(平壤尹) 지밀직 사사를 거쳐 충숙왕 때에 상의회의 도감사 첨의찬성사(僉議贊成事)에 이르렀다. 19세(世) 휘 약채(若采)는 문과에 급제하여 우왕 때 좌사의대부(左思義大夫)를 거쳐 충청도 관찰사(觀察使)가 되었다. 22세(世) 휘 국광(國光)의 호는 서석(瑞石)이고, 시호는 정정(丁靖)이다. 세조(世祖) 3년에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평정하고 병조판서(兵曹判書)로서 적개공신 2등에 좌찬성(左贊成)이 되고, 광산군(君)에 봉(封)해 졌다. 세조가 승하하자 원상(元相)되어 서정을 맡았고, 우의정(右議政)을 거쳐, 성종이 즉위하자 좌의정(左議政)에 올라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었으며, 광산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26세(世) 휘 은휘(殷輝)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와 교하현감(交河縣監)을 지냈고, 가선대부(嘉善大夫)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 겸(兼) 오위장(五衛將)을 지냈으며, 임진왜란에 의병을 모집하여 체찰사(體察使) 정철(鄭澈)의 종사관으로 종군(從軍)하여 수원(水原)의 독산성을 지키다가 정철이 무고를 당하자 낙향하였다. <국조인물지(國朝人物誌)>에 기재되어 있으며 파조(派祖)이다. 27세(世) 휘 선생(善生)의 호는 송재(松齋)인데, 어모장군(禦侮將軍) 충좌위부사과(忠佐衛副司果)며, 문행(文行)이 고명(高明)하였다. 28세(世) 휘 열()은 충의위(忠義衛)이다. 30세(世) 휘 만갑(萬甲)은 군기감정(軍器監正)이다. 35세(世) 휘 재연(在連)의 호는 두산(斗山)인데 고성에 정착하였다. 37세(世) 휘 영태(永泰)가 곤양으로 들어 왔다. 총 16호이나 곤양에는 5호가 살고 있다.   문중대표는 용봉(容鳳)이고, 종손은 40세손 수중(守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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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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