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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진양(晋陽) 강씨(姜氏) 은열공파(殷烈公派) 목단(牧丹)   시조(始祖) 강이식(姜以式)은 고구려(高句麗)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로 5만의 군사를 이끌고 수(隨)나라 30만 대군을 요동(遼東)의 임유관(臨楡關)에서 대파(大破)하였고 그 후에도 양제(煬帝)의 군사 1백만 대군을 격파하여 다시 한번 기개와 용맹을 떨쳤다. 시조의 묘소는 만주 봉천성 청원현(淸原縣) 원수림(元帥林)에 있었으나 지금은 이역(異域)으로 진주시 상봉서동의 봉산사(鳳山祠)에서 향사(享祀)하고 있다. 중조 은열공(殷烈公)의 휘는 민담(民聸)이니 인헌공파(仁憲公派)의 강감찬(姜甘贊)과 같이 고려조(高麗朝)에서 크게 무훈(武勳)을 세운 명장(名將)들이다. 거란(契丹)의 장군(將軍) 소배압(簫排押)이 10만의 대군으로 침입해 오자 을지문덕(乙支文德)과 함께 해동명장(海東名將)으로 일컬어진다. 후손이 派祖로서 일세를 하고 16세(世) 휘 관(琯)은 호가 우당(愚堂)이요, 중종(中宗) 경오(庚午)에 문과(文科)에 오르고 한림원(翰林院)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오르고 사천(泗川) 현감(縣監)을 지내었다. 문학(文學)과 덕행(德行)으로 명망(名望)이 높으며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과 교유(交遊)하였으며 관방(冠坊)으로부터 백야(白也)에 이거(移居)하였다. 17세(世) 응태(應台)의 호는 성재(誠齋)이니 효성(孝誠)이 지극(至極)하고 우당공(愚堂公)의 병환(病患)에 단지(斷指)하고 화약(和藥)하니 조정(朝廷)에서 지효(至孝)에 감동하여 진양동(晋陽東) 반성현(班城縣) 용소(龍沼)의 들과 삼강칠택(三江七澤)에 고기를 길러 부모를 공양(供養)하였다. 명종(明宗)이 친히 충효(忠孝) 2자를 써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중종(中宗) 임진(壬辰)에 문과(文科)에 오르고 한림(翰林) 전적(典籍)을 거쳐 함경평사(咸鏡評事)를 지냈다.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 승문원(承文院) 교리(校理)를 지내었으며, 통정대부(通政大夫) 성균관(成均館) 대사성(大司成) 및 밀양(密陽) 도호부사(都護府使)를 지냈으며 청덕비(淸德碑)를 세웠다. 18세(世) 휘 렬(洌)의 호는 월곡(月谷)이니 명종(明宗) 무오(戊午)에 문과(文科)에 오르고 통훈대부(通訓大夫)로서 광양(光陽)ㆍ의령(宜寧) 등의 현감(縣監)을 지내고 진성면(晋城面) 만석동(萬石洞)에 은거(隱居)하였다. 19세(世) 휘 경윤(慶胤)의 호는 백천(白川)이고, 통덕랑(通德郞)의 관직을 지내었고, 효행(孝行)과 덕행(德行)이 있었다. 20세(世) 휘 근(慬)의 호는 율계(栗溪)인데 재격(才格)이 탁월하여 문학을 겸비하였다. 22세(世) 휘 달제(達齊)의 호는 송헌(松軒)이니 사친지효(事親至孝)하여 여모 3년을 하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지내었다. 26세(世) 재진(在震)이 하동 옥종으로부터 곤양(昆陽)으로 이주(移住)하였다. 총 10여 호였으나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고 곤양에는 4호가 살고 있다.   문중대표는 29세손 월상(月相)인데 사천군 초대 산림조합장을 역임하였고, 종손은 30세손 수웅(秀雄)으로 농학박사로 진주산업대학교수이며 수성(秀成)은 사천환경(주) 상임이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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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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