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晋州) 강씨(姜氏) 박사공파(博士公派) 묵실 시조(始祖)는 고구려(高句麗) 병마도원수(兵馬都元帥)이신 강이식(姜以式) 장군이다. 중조(中祖)의 휘는 계용(啓庸)이니 고려조(高麗祖) 원종(元宗), 갑술(甲戌 1274)년에 통신사서장관(通信使書狀官), 진산부원군(晋山府院君), 국자문과박사(國子文科博士)로서 파조(派祖)이다. 3세의 휘는 사첨(師瞻)인데 고려 충렬조(高麗 忠烈朝)에 전중감찰어사(殿中監察御使)이다. 6세손의 휘는 시(蓍)이고, 시호(諡號)는 공목(恭穆)이다. 관직은 찬성사(贊成事)이고, 청성군(菁城君)에 봉하여졌다. 다섯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회백(淮伯)이고, 호는 통정(通亭)이며 관직은 대사헌(大司憲)을 지내었다. 차남은 회중(淮仲)이고, 호는 통계(通溪)이며 관직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다. 막내(季)는 회계(淮季)이고 관직은 세자시학(世子侍學)으로 공민왕(恭愍王)의 사위이며 진원군(晋原君)에 봉(封)하여졌다. 통계공(通溪公)은 형(兄) 통정공(通亭公)과 함께 산청군 단성면 사월에서 학문과 무예를 연마하였다. 통계공의 아우 진원군은 이태조의 등극 때에 화(禍)를 당하였고, 부친 공목공(恭穆公)을 모시고 두문동(杜門洞)에 은거하다가 배록동(排祿洞)에 이거(移居)하였다. 4세손 휘 형(詗)은 대사헌(大司憲)의 관직을 지내었다. 아들 영숙(永叔)ㆍ무숙(茂叔)ㆍ여숙(輿叔)과 함께 연산군(燕山君)때 갑자사화(甲子士禍)를 당하여 경향각지(京鄕各地)로 떠돌아 다니다가 절충장군(折衝將軍)인 휘 흡(潝)과 함께 경상도로 들어왔다. 그 후 선조조 임진왜란 때에 곤양 묵곡으로 피난하여 300여 년을 농경을 주업으로 하고 있다. 집단으로 거주하는 곳은 묵실에 20여 호, 축동 탑리에 10여 호, 고성 하이면에 10여 호이며, 여타 각지에 산재하여 있다. 27세손 봉춘(奉春)은 제2대 곤양면의회 의장을, 노석(魯錫)은 사천시 과장을, 진술(珍述)은 축동면장을, 고성의 호석(縞錫)은 평통위원을, 윤석(允錫)은 통대위원을 역임하였다. 28세손 현구(鉉求)는 동양방송 PD, 경구(京求)는 곤양면장을 지내었고, 충구(忠求)는 국세청사무관이며, 윤세(允世)는 경상대 교수이다. 29세손 일(逸)은 진주원예협동조합장에 재직 중이다. 문중대표는 28세손 평구(平求)이고, 종손은 29세손 병모(炳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