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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6. 晋陽河公奉祚 遺墟碑(塘川) ◦소재지 : 당천 향교 앞

진양 하공 봉조 유허비

丙辰之七月下庚 港都居 義洙氏使其弟 聖洙君 訪余書齋而 請曰 生等之先人雖無功德之可記진양 하공 봉조 유허비 爲其子者不欲其先人泯滅而無聞故今治一石次竪遺墟先生爲生等之先人賜一言之記文以榮之曰君等謙虛之情發現乎言外者如此豈非家傳之遺風耶余幸添居隣里故椿丈之隱德固己知之且君之請如此懇切則余雖不文不得辭故强爲之記焉夫人生在世何者爲先何者爲後仁德爲主功業次之古聖之所明訓然則何如可謂仁德乎仰不愧天俯不怍地隣里和悅遠近無怨惟有德者能之公之一生不如是乎其餘俗所謂成功者不足論矣去己未歲公自河東之赤良寓居于昆陽之塘川者幾六十年矣來玆以後務玆稼穡僅繼菽水存心謙讓樂在其中信義爲持身之本正直爲敎子之方當日帝殘虐之政窮之殘民里民推公爲代表公周旋其間使無知里民終無一毫睚眥之怨公隱德於斯可見矣古人云仁者能壽信不誣矣壽踰古稀以終天銘曰河本晋陽萬派一宗昆山塘川有明守公産業云何大本之農隱德顯報五子氣同遺墟何處一石古壟幽宅何山蒲谷案東公之系自始祖三十世而公諱奉祚字明守忌八月十四日配全州李氏忌二月十日有五男曰義洙聖九点九聖洙聖贊其餘孫曾不盡錄 西紀1976年 丙辰八月 日 朔 金海 金 正 撰 竝書 同月 日 不肖男 義洙等 立 진양하공 봉조 유허비 병진 7월 하경(下庚)에 황도(港都)에 사는 의수(義洙)씨가 아우 성수(聖洙)군을 시켜 나의 서재를 방문하고 청하여 말하길 “우리들의 선고(先考)께서 비록 공덕은 적으나 자손된 도리로 선고의 행적을 민멸할 수 없어 유허에 비를 세우고저 하오니 선생께서 저희들을 위하여 기문(記文)을 지어주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답하길 “그대들의 겸허한 정성이 언외(言外)에 발현함이 이러하니 어찌 전가(傳家)의 유풍이 아니겠느냐. 다행이 전날 이웃에 같이 살아 공의 은덕(隱德)을 아는 바요, 또한 그대가 간청하기를 이와 같이 하니 내가 비록 불문이나 사양치 못하고 기록하노라.”라고 하였다. 대개 사람이 세상에 나서 무엇을 먼저하며 무엇을 뒤에 할 것인고? 인덕(仁德)을 먼저하고 공업(功業)은 다음이라 함은 옛 성인의 가르침이라. 그런 즉 무엇이 인덕(仁德)이겠느냐? 하늘을 우러러 보아도 부끄러움이 없으며 고개 숙여 보아도 땅이 부끄럽지 않으며 이웃간에 화열(和悅)하며 원근(遠近)간에 원한이 없으며 유덕(有德)한 분이라야 가능한 것이다. 공(公)이 일생(一生)을 이같이 행(行)하지 아니하였느냐? 그 외에 성공(成功)등은 논(論)할 필요도 없다. 지난 기미년에 하동(河東) 적량(赤良)으로부터 곤양 당천으로 이사 온 지 육십년이라. 이곳에 온 후로 농사에 힘쓰고 겨우 생활하였으나 마음이 겸양하여 항상 즐거이 생활하며 신의(信義)를 몸가짐의 근본으로 삼고 정직으로 자녀를 가르치며 일제(日帝)의 잔학한 때를 당하여 민생(民生)이 곤란할 때 마을사람이 대표자(代表者)로 추천하니 공이 모든 대소사를 적극 주선하여 조금도 원한이 없게 하니 공의 숨은 덕(德)을 가히 알겠도다. 옛말에 인자(仁者)는 수(壽)한다 하니 나이 70이 넘어 세상을 떠나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하씨(河氏)의 본(本)은 진양(晋陽)인데 여러 파(派)가 모두 일종이다. 곤양 당천에 공이 살았도다. 생업은 무엇이냐? 농사가 근본이로다 은덕에 보답하여 오형제가 장(壯)하도다. 유허는 어디냐? 옛 두덕 위의 한비석이요, 묘소는 어느 산이냐? 포곡의 동쪽이로다. 공의 상계(上系)가 시조(始祖)로부터 삼십세요. 휘(諱)는 봉조요 자는 명수이며, 8월 14일에 졸하며 배(配)는 전주이씨이니 2월 14에 졸하다. 오남을 두니 의수ㆍ성구ㆍ점구ㆍ성수ㆍ성찬이요, 손증(孫曾)은 다 기록하지 못한다. 서기 1976년 병진 8월 김해 김정 짓고 쓰다 불초남 의수등이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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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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