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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5. 우산(友山) 최영범선생기적비(崔榮範先生記蹟碑) ◦소재지 : 송정 도로변

우산 성생 기적비

우산 선생 기적비 우산(友山) 최영범(崔榮範) 선생(先生)은 1890년(단기 4223년) 음력 8월 28일에 태어나 1966년 5월 7일에 돌아가셨다. 향년(享年) 76세로 곤양성(昆陽城) 남산(南山)에 묻히셨다. 선생이 세상에 태어나던 당시에는 국운(國運)이 날로 기울어져 가던 무렵이었으며, 여러 대(代)에 걸쳐서 살아온 곤양(昆陽)에 나시었다. 본관(本貫)은 경주(慶州)이고, 부친(父親)은 중호(重浩)요 모친(母親)은 진양(晋陽) 정씨(鄭氏)였다. 3남 4녀 중 2남이셨으며, 김해(金海) 김씨(金氏)와 슬하(膝下)에 5남 4녀를 두었다. 1897년 곤양관립한문학당(昆陽官立漢文學堂)에 입학하여 한학(漢學)을 배우셨는데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여 남달리 뛰어 났다. 1906년에 진양도립악육재고등과(晋陽道立樂育齋高等科)에 입학하여 변천하는 시대의 조류에 따라 새로운 문화를 배우셨다. 1909년 곤양사립계명학교(昆陽私立繼明學校)에 입학하여 수학(修學)하던 중 22세 되던 해에 조일합방(朝日合邦)이라는 국치(國恥)의 날을 만나자 통분의 정을 가슴 속 깊이 간직하고, 국권회복(國權回復)의 터전을 닦기 위해서는 “아는 것이 힘이고, 배워야 산다.”는 신념(信念)아래 농촌청년(農村靑年)들에게 신문화(新文化)의 지식을 가르칠 목적으로 농민(農民)의 도장(道場)인 농청(農廳)을 건립하고 야학교(夜學校)도 설립하여 계몽운동(啓蒙運動)에 발 벗고 나서시었다. 1920년에 민족의 대변지(代辯紙)로 발간된 동아일보의 지국(支局)을 경영하면서 보국안민(輔國安民)의 동학(東學)ㆍ천도교(天道敎)발간의 개벽지(開闢誌)도 겸하여 보급하여 민중계몽에 힘을 기울였다. 1921년 곤양청년회(昆陽靑年會)를 조직하여 청년운동을 전개하시고, 그해 청년회지방대표자전국연합대회(靑年會全國聯合大會)에 참석하여 조선청년의 진로에 대한 연설을 하여 만장(滿場)의 전국 대표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셨다. 1923년 당시 일정(日政)의 소작제도(小作制度)는 농민을 가혹하게 수탈하는 방식이었다. 즉 지주가 7/10~8/10의 소작료를 가져가고, 지세(地稅)도 소작인(小作人)에게 부담(負擔)시키면서, 소작권(小作權)도 지주 마음대로 해마다 바꾸는 등 악정(惡政)의 시대상황이었다. 이에 선생은 악정에 시달리는 농민을 구제하기 위하여 사천(泗川)ㆍ하동(河東) 연합(聯合)의 노동공제회(勞動共濟會)를 조직하여 회장이 되시었다. 정태장(鄭泰章)ㆍ이홍석(李洪錫)ㆍ조용수(趙鏞洙) 제공(諸公)외 다수의 동지들과 더불어 소작료(小作料)는 반(半)으로 낮추고, 지세(地稅)는 지주(地主)가 부담(負擔)하며, 소작권(小作權)은 과실(過失)이 없는 한 지주(地主)가 임의(任意)로 박탈하지 못하게 하는 투쟁(鬪爭)을 전개하여 많은 농민들을 구제 하셨다. 1926년에 민족세력(民族勢力)의 통일단체(統一團體)인 신간회(新幹會)에도 참여하시는 등 조국(祖國) 광복(光復)을 위하여 주로 지방(地方)에서 민족사회운동(民族社會運動)에 앞장서셨다. 이에 일정관헌(日政官憲)의 탄압이 극심하여 온갖 고초를 당하시었다. 그러나 원래 성품(性品)이 강직불굴(剛直不屈)하신지라 평생을 의(義)를 위하여 헌신하시었다. 그리고 지방유지들과 힘을 모아 곤양농업보습학원(昆陽農業補習學院)을 창설하여 청소년의 육영사업(育英事業)에도 힘쓰시었다. 민족지도자인 송진우(宋鎭禹)ㆍ김성수(金性洙)ㆍ김범부(金凡父)ㆍ김법린(金法麟) 여러 선생들과 교우하시면서 국권회복(國權回復)을 위함에 뜻을 같이 하셨다. 1945년 일제(日帝)로부터 조국(祖國)이 광복(光復)되어 민족(民族)의 대변지(代辯紙) 동아일보(東亞日報)가 복간(復刊)됨에 따라 다시 향토(鄕土)에서 지국(支局)을 경영하시면서 민족계몽(民族啓蒙)에 힘쓰시었다. 그런 지대한 공헌을 기리면서 동아일보 창간 40주년 기념일에 즈음하여 본사로부터 전국장기경영자의 한 분으로 표창(表彰)을 받으시었다. 일정하(日政下)에서 조국광복을 위한 사회민중운동의 진두(陳頭)에서 투쟁(鬪爭)하신 그 맥맥한 정기(精氣)는 아직도 지방민의 마음에 생생하여, 여기 선생의 일생(一生) 행적(行蹟)을 새겨 드리우신 그 높은 정신(精神)을 길이길이 전하고자 삼가 이 비(碑)를 후학(後學) 다수(多數) 인사(人士)들이 뜻을 모아 선생 탄생 80주년에 즈음하여 1970년 5월 9일에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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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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