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양향토사



곤양향토사

17. 處士 慶州金公 諱聖連之 妻 孝烈婦 孺人 平康 蔡氏 紀績碑銘弁序 ◦소재지 : 점복

효열부 유인 평강채씨 기적비

효열부 유인 평강채씨 기적비 夫孝烈百行萬善之源而始爲名敎大節亘萬世不泯之事也疇不欽仰疇不念熟況當今世果能踐其實際孝有幾焉晋之南昆之東有里曰中項里以孝烈雙美終身行之者有之乃蔡氏夫人見之矣夫人之籍平康後士人諱允基之女也而慶州人新羅敬順王之後金聖連之妻也幼有幽閒貞淑長有孝順閨範鄕隣稱其德及嫁也孝事舅姑奉供之節適上之物殫竭靡懈一毫無違敬對君子造端之道愉怡承順至于中年老姑完山李氏以嬰疾委褥數朔藥餌之供屎尿之後躬自擔當晝宵扶持少無懈怠而暫不離側盡誠調治漸至危㞃汲水祈天嘗糞驗症竟至殞絶當其喪也擗踊之痛呼哭之聲晝夜不絶經過三喪凡百遵禮鄕里咸歎焉夫或有患則以殫誠竭力調護不解帶而不交睫累有奏効諱龍湖諱仁載諱哲元諱學俊夫公之高曾祖考也有子三昆季曰道業道烈三業各承慈訓而孝友誠篤名著一鄕古云孝順還生孝順子其義適於斯也是皆由於先慈妣蔡氏之薰陶所及也豈非法家之美風哉其孫曰奉植奉達奉文致文碩文以下幼不錄噫夫人一生純實其行可爲女史龜範則累有面里之褒而累登鄕中章甫之薦至之於今日未遑綽稧之典可勝惜哉只有慕聖公會讚揚文而傳于世日鄕中章甫姜達熙崔在奎諸公與其孫奉文方謀竪碑而以表逵道使行人過者欲知孝烈婦之卓行而以狀請余一言記之余本不文而累辭不獲焉嗚呼氏之孝烈卓行美蹟與日月並明是爲百世萬民之模楷也是可宜銘也銘曰 昔有孝烈 今見孝烈 何以孝烈 誠篤孝烈 聲振孝烈 世知孝烈 恩加孝烈 天感孝烈 累褒孝烈 讚揚孝烈 萬口孝烈 千載孝烈 孔夫子誕降二千五百三十一年 庚申 正月 上院 金海 金相淵 謹撰而書

처사 경주김공 휘성연의 처 효열부 유인 평강채씨 기적비명병서 무릇 효열(孝烈)은 온갖 행실과 만가지 선(善)의 근원이며 명교(名敎)의 대절(大節)로서 만세(萬世)토록 민멸되지 아니하니, 어찌 흠앙(欽仰)하지 아니하며 어찌 사념(思念)하지 아니하리요 하물며 금세(今世)에 과연 효행(孝行)을 실천하는 자(者)가 몇 사람이나 있겠느냐 진주의 남쪽 곤양의 동쪽 중항리(中項里)에 효열(孝烈)로서 종신토록 실행한 분이 있으니 채씨(蔡氏)부인이라, 부인(夫人)의 관행은 평강(平康)이요 사인 윤기(士人 允基)의 따님이요 경주김씨(慶州金氏) 김성련(金聖連)의 아내이다. 어려서는 침착하고 정숙하더니 자라서는 효순(孝順)의 규범이 있어 이웃이 모두 그 덕성을 칭찬하였고 시집가서 시 부모(父母)를 모시되 공양(供養)하는 도리를 극진히 하여 조금도 어김이 없으며 부군승순(夫君承順)의 예를 갖추도다. 중년(中年)에 시어머니 완산이씨(完山李氏)가 병(病)으로 여러 달을 앓아누우니 약물(藥物)의 치료와 대소변의 청결에 밤낮으로 조금도 나태함이 없고 잠시도 옆을 떠나지 아니하며 정성을 다하여 치료(治療)하나 점점 위독(危篤)하니, 물을 떠서 하늘에 빌며 대변을 맛보아 병세를 징험하나 마침내 운명하니 상(喪)을 당하여서는 애통(哀痛)하는 소리가 주야로 끊이지 아니하며 삼년상(三年喪)을 지내매 대소범절(大小凡節)을 예(禮)에 따르니 향린(鄕隣)이 모두 감탄(感歎)하더라. 또한 부군(夫君)께서 병환(病患)이 있으면 약물과 정성을 다하여 조호(調護)하고 의대(衣帶)를 풀지 아니하며 밤이면 잠도 자지 않고 보호하여 많은 효험을 보더라. 휘 용호(龍虎), 휘 인재(仁載), 휘 철원(哲元), 휘 학준(學俊)은 부군(夫君)의 고조(高祖), 증조(曾祖), 조(祖), 고(考)이다. 아들 삼형제(三兄弟)를 두니 도업(道業)ㆍ도열(道烈)ㆍ삼업(三業)인데 모두 자모(慈母)의 교훈(敎訓)을 받아 효도(孝道)하고 우애(友愛)하며 이름이 한 고을에 나타나니 고어(古語)에 효순(孝順)한 이는 효순(孝順)한 자식을 낳는다 하니 그 뜻이 이분에게 맞았도다. 이 모두 자모채씨(慈母蔡氏)의 훈도(薰陶)한 교화(敎化)이니 어찌 법가(法家)의 미풍(美風)이 아니겠느냐, 손(孫)은 봉식(奉植)ㆍ봉달(奉達)ㆍ봉문(奉文)ㆍ치문(致文)ㆍ석문(碩文)이요 그 외 아이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희(噫)라 부인(夫人)의 일생(一生)동안 성실한 행적은 가히 여사(女史)의 모범이 될 것인즉 면(面)과 동(洞)의 포상(襃賞)이 있었고 향촌유림(鄕中儒林)의 추천이 있었으나, 이제토록 정려(旌閭)의 은전을 받지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다만 모성공회(慕聖公會)의 찬양문이 세상(世上)에 전(傳)할 따름이다. 향중(鄕中)의 선비 강달희(姜達熙)ㆍ최재규(崔在奎) 등과 손자 봉문(奉文)이 대로변(大路邊)에 비(碑)를 세워 행인(行人)에게 효열부인(孝烈婦人)의 높은 행적을 알리고자 나에게 비문(碑文)을 청하니 내가 글을 잘 모르지만 사양할 수 없었다. 오호(鳴呼)라. 부인의 효열(孝烈)과 높은 행적(行績)은 일월(日月)과 같이 밝아서 백세(百世)토록 만민의 모범이 될 것이다. 이에 명(銘)은 다음가 같다. “옛날에 효열이 있더니 지금도 효열이 있다. 어찌 효열 할 것이냐? 성독(誠篤)으로 효열 할 것이다. 효열의 명성(名聲)이 떨치니 세상이 효열을 알도다. 은혜가 효열에 더하니 하늘이 효열에 감동(感動)하도다. 여러 차례 효열을 포상하였고 효열을 찬양하였도다.” 수많은 입에서 효열을 송(頌)하니 천년(千年)토록 효열이더라 서기 1981년 5월 상순에 김해 김상연은 글을 짓고 쓰다.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