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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5. 可軒趙鏞華公孝行錄 ◦소재지 : 목단

가헌 조용화공 효행비 公諱鏞華字英七可軒公之號也.以韓高宗丁亥十一月二十二日公生于昆陽還德里父曰春峯明奎母淸州韓氏也.公生有至性父母有命卽行出外得珍異歸獻父母.八歲隨父公移舍德山大浦里該地人士歡迎曰富人來矣春峯公雅重有人望好延攬賓客戶外車馬不絶雖奴僕粧華侈公年二十家勢漸耗疏糲難繼然爲親供具則不減前時進飯無魚肉則春峯公不食故豫備魚肉而不至乏屠兒知公必來索裹好肉以待焉.父思鯖魚公晨行昆陽市沽魚而晩歸往返路程百五十里足瘇繭寒風刺骨氣茶腹飢者數矣或違市行無得以求則與妻鄭氏提篋向前川解衣入水撈獲魚貝爲日事洞人爲之語曰大浦水魚亦爲趙孝者供親之物乎其後父以天年終哀毁逾禮吊者皆感歎其苦行也.葬地稍遠十餘里展墓號哭皆由於至慕也.三壯一面議欲褒賞公累累拒之而不果也.鄕內士林皆有詩章星洲李章漢撰公狀文可徵也.

가헌 조용화공 효행록 공의 휘는 용화(鏞華)이고 자는 영칠(英七)이며 호는 가헌(可軒)이다. 고종 정해(丁亥) 11월 22일에 곤양 환덕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호(號)는 춘봉(春峯)이고 휘는 명규(明奎)이며 어머니는 청주 한씨이다. 공은 어릴 때부터 지극한 효성으로 무엇이든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순종하였다. 밖에서 좋은 물건을 얻으면 반드시 부모님에게 먼저 드렸다. 아버지 춘봉공이 덕산의 대포리로 이사를 갔는데 이 때 공의 나이는 8세였다. 아버지를 모시고 대포리로 가니 대포 사람들이 큰 부자가 온다고 환영하였다. 춘봉공은 우아하고 장중하게 처신하여 사람들의 인망이 두터웠다. 찾아오는 손님을 마음으로 환영하므로 집 앞에는 말안장을 한 손님들이 줄을 이었다. 집에서 일하는 노비라도 아름답게 몸을 단장하였다. 하지만 공의 나이 20에 가세가 점점 기울어져 극심한 곤란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공은 부모에게 효를 다하여 봉사하는 데는 여전히 종전과 다름없이 하였다. 식탁에 생선과 고기가 없으면 부친이 밥을 드시지 않으므로 아무리 어려워도 특별히 좋은 고기를 마련하여 두었고, 고기집 주인도 좋은 고기를 항상 준비해 주었다. 또한 싱싱한 생선을 원하면 공은 이른 새벽에 곤양시장으로 가서 고기를 사 가지고 왔는데 날씨가 몹시도 추워서 고통이 여간이 아니었다. 왕복 150여리의 길로 집에 당도하면 깊은 밤이었다. 그 때는 곤양장으로 가야만 싱싱한 생선을 살수가 있었고, 혹 시장가는 날을 넘기면 부인과 함께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서 드렸는데 겨울철 찬물에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은 대포의 물고기가 조효자의 봉친으로 생긴 것이라고 하였다. 보리밥도 어려운 때에 춘봉공은 쌀밥이 아니면 먹지 않으므로 보리쌀을 가지고 흰쌀을 바꾸어야 했는데 마을에서도 그 사정을 알아 모두 동정의 마음을 가졌다. 춘봉공이 천명(天命)으로 세상을 하직하니 공의 슬픔이 지극하여 조문온 사람들이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 장지가 10여리나 되어 멀었는데도 매일 묘소를 찾아 곡을 하니 모두 지극히 사모하는 마음이었다. 삼장 면민이 효행을 포상코자 하였으나 공은 누누이 거절하였다. 이 일에 대하여 향리 내 사림(士林)들의 많은 시(詩)와 문장(文章)이 있고 성주 이장한씨가 지은 행장문에 이런 기록이 있으니 충분히 믿을만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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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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