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양향토사



곤양향토사

14. 栢谷陳先生諱克敬事蹟碑銘 ◦소재지 : 본촌리 栢谷陳先生諱克敬字敬直洪川驪陽人. 上祖曰寵厚高麗虎賁衛大將軍曾祖諱猷官山陰縣監以淸白著名祖諱福命進士考諱寔副提學妣朴氏生員熾女系妣閔氏奉事思寬女生考諱定生員妣完山李氏雞林金氏嘉靖丙午先生生于栢谷里第氣宇竣整眉目炯然不與群兒遊戱儼然有不可犯之象稍 長好讀書厲志篤學好善嫉惡出於天性讀書至古人義烈成人處必嘐嘐然流涕若以身蹈其地嘗夜逢大虎蹲踞流目電樂然先生不爲動視若家畜良久低尾而逝時文貞公南冥曺先生講道於山天齊公師事之受性理之書聞敬義之說體認實踐動循規矩以敬義二字作一生律身之符嘗有詩曰行行却怕中途廢敬義工夫自在誠與崔守愚吳德溪河覺齋諸賢刮磨道義造詣純熟踐履精實先生甚嚚重之儕友皆愛敬之亦嘗往來講質于葛川林先生之門累被獎戊辰副學公憂喪葬祭禮一遵朱文公家禮哀毁終制情文備至處宗戚婣睦各得懽心龍篤於爲師服勤之誠創建德川書院撰輯師友錄皆先生之誠力也. 及院宇之燬于壬辰兵火與李茅村瀞河滄洲燈憚勞重建又與成淨査汝信朴无悶網三十三賢設講學會又叙述同文從遊群賢言行錄傳於世初先生生考伯仲季竝羅己卯之禍堂叔父提學公昆季五人四被乙巳之禍提學公無子先生嘗官達爲誠先生不意於世而潛心理學以振斯文爲己任終老林泉遯世無忄悶 因所居自號栢谷取后洞之義亦嘗築臺種樹名以大樹取吾夫子習禮大樹下之義也.丁巳四月二日以疾終享年七十二易簀之日遺誡子孫曰禍家餘生得保性命足矣不當忘意世路隨俗俯仰吾以先生人之戒我者戒汝輩葬于晋西水谷沙芳洞侍墓嶝子坐之原後嶺下士林發文相諭奉享于鼎岡書院九賢之一也.又享德源依達山祠配密陽孫氏直講炯之女系配晋陽河氏有二男長曰寅賢而夭次曰亮女適典籍李閶亮三男翅國羽國翔國四婿鄭周翼權克寧梁焜韓時泰餘不錄先生之後孫武鉉碩鉉誠心盡力創建齊室幷堅先生事蹟碑之意負家狀屬余以文自知淺學不敢妄揄盛德固辭之不得謹按家史依先儒諸賢之說書次如右銘曰尋紫陽之眞源長立雪山天誠在敬義性理之學講明斯文寓樂林泉 紀元4312年 己未 金陽節後生 金海 金鍾善謹 撰 金海 金鍾律謹 書 己未 9月 日 12世孫 武鉉, 碩鉉, 上鉉 謹竪

백곡 선생 사적비

백곡 진선생 휘 극경 사적비명 백곡 선생 사적비   백곡(栢谷) 진(陳) 선생의 휘는 극경(克敬)이요 자는 경직(敬直)이요. 홍천(洪川) 여양인(驪陽人)이다. 상조(上祖)는 총후(寵厚)인데 고려 때에 호분위(虎賁衛) 대장군(大將軍)이었다. 증조의 휘는 유(猷)니 산음(산청) 현감(山陰縣監)의 관직을 지내었는데 청백리로 이름이 나 있다. 조(祖)의 휘는 복명(福命)이니 진사(進士)요, 아버지 휘 식(寔)은 부제학(副提學)이고, 어머니 박씨는 생원 치(熾)의 딸이다. 계모 민씨는 봉사(奉事) 사관(思寬)의 딸이요, 생고(生考)의 휘는 정(定)이니 생원이며, 어머니는 완산 이씨와 계림 김씨였다. 가정(嘉靖) 병오년에 선생이 백곡리에서 출생하시었다. 기우(氣宇)가 준정하고, 미목(眉目)이 형형하게 빛나 여러 아이들과 희롱하고 놀지 않으며 엄연한 기상을 보였고, 장성해서는 글읽기를 좋아하고 한결같은 마음으로 두터운 배움의 자세를 지녔다. 착한 것을 좋아하고 악한 것들을 미워함은 태어날 때부터 천성이요, 글을 읽어 가다가 옛 의인(義人)과 열사(烈士)들의 역사에는 눈물을 흘리며 마치 자기 일처럼 생각하였다. 어릴 때 야밤에 큰 호랑이와 마주쳤으나 선생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마치 가축을 바라보는 것처럼 가만히 바라보니 마침내 꼬리를 내리면서 물러갔다. 그때에 문정공(文貞公)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산천재(山天齋)에서 도(道)를 강론하고 있었는데, 선생께서 스승으로 모셔서 성리학(性理學)과 경의(敬義)에 관한 학설을 배워서 몸으로 실천하였고 경의(敬義) 두 글자를 평생의 계율로 삼았다. 시(詩)를 지어 가로대 행하고 또 실천해 나가야지 중도에 그쳐서는 안 된다. 경의(敬義) 공부는 정성을 다하는데에 있다. 수우당(守愚堂) 최영경(崔永慶)ㆍ덕계(德溪) 오건(吳健)ㆍ각재(覺齋) 하항(河沆) 제현들과 더불어 도의(道義)를 강구하고 갈고 닦으니 학문이 성숙하고 조예(造詣)가 정실(精實)하니 남명선생께서는 중요하게 여기시고 친구들도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졌다. 그리고 갈천(葛川) 임선생의 문하에서 강론하고 질의응답하면서 칭찬을 받으시었다. 무진년에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모든 상례(喪禮) 장례(葬禮) 제례(祭禮)를 주문공(朱子)의 가례(家禮)에 따라 애절한 마음으로 예(禮)와 정(情)을 다하였다. 친척들간에 서로 화목하여 즐거운 마음(懁心)을 얻었다. 더욱이 스승에게 사모하는 정성이 돈독하였는데 이 마음으로 덕천서원을 창건하고 사우록(師友錄)을 편찬하니 이 모든 것이 선생의 정성과 실천력이었다. 임진왜란 때에 덕천서원의 집이 불타 없어지니, 이모촌(李茅村) 정(瀞)ㆍ하창주(河滄洲) 등(燈)과 함께 힘을 모아 서원을 중건(重建)하였다. 또 성정사(成淨査) 여신(汝信)ㆍ박무민(朴无悶) 강(綱)과 더불어 33명의 현명한 사람들과 더불어 강학회(講學會)를 개설하고, 그리고 동문(同文) 여러분의 언행록(言行錄)을 서술하여 전하고 있다. 초에 선생의 생부 백중계(伯仲季)가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당하였고, 당숙 부제학공 형제 다섯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하여 부제학공에게 자식이 없었다. 선생이 일찍 벼슬의 자리에 올랐으나 세상일에는 관심이 없고, 이학(理學)에 잠심(潛心)하여 임천(林泉)에 은거(隱居)하여 지냈다. 자기가 살았던 마을 이름을 따서 스스로를 백곡이라고 호(號) 하였다. 그리고 당에 축대를 쌓으면서 수종으로 대수(大樹)를 심으니 오부자(吾夫子)의 큰 나무 아래서 예의범절을 배운 뜻을 상기함이다. 정사(丁巳)년 4월 2일에 질병으로 돌아가시니 향년 72세였다. 운명하는 날 자손에게 유언으로 경계의 말씀을 하시되 불운한 집안(禍家)의 여생(餘生)으로 성명(性命)을 온전히 보전하였으므로 충분히 만족스럽다. 망령되게 세로(世路)에 현혹되지 말지니라. 나의 선생님께서 나에게 경계한 그대로 너희들에게 훈계의 말을 한다. 장지는 진주 서쪽 수곡 사방동 시묘등(侍墓嶝) 자좌원(子坐原)에 안장하다. 후에 영남의 사림이 정강서원(鼎岡書院)에 향사(享祀)하니, 9현 중의 한분이다. 그리고 덕원(德源) 의달산(依達山)에 봉향(奉享)하였다. 부인은 밀양 손씨이고, 직강(直講) 형(炯)의 딸이다. 계배는 진양 하씨이다.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인(寅)이니 어질었으나 일찍 죽었고, 차남은 량(亮)이고, 딸은 전적(典籍) 이창(李閶)에게 시집을 갔다. 량(亮)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시국(翅國)ㆍ우국(羽國)ㆍ상국(翔國)이었다. 네 사람의 사위가 있었는데 정주익(鄭周翼), 권극령(權克寧), 양혼(梁焜), 한시태(韓時泰)요 나머지는 다 기록치 못한다. 선생의 후손 무현(武鉉)ㆍ석현(碩鉉)이가 성심진력(誠心盡力)하여 재실을 창건하고 동시에 선생의 사적비를 세우고자 나에게 글을 청하였다. 나는 본시 학문이 엷어 감히 선생의 성덕(盛德)을 충분하게 나타내지 못할까봐 두려워서 사양을 하였다. 그러나 마지못하여 가사(家史)를 참고하고, 선유제현(先儒諸賢)의 설(說)에 의하여 위와 같이 글을 지었다. 명(銘)은 다음과 같다. 자양(紫陽) 주부자의 참된 근원을 찾아서 길이 산천재의 남명문하에 들었다. 성(誠)은 경의(敬義)와 성리(性理)의 학문(學問)에 있다. 사문(斯文)을 강명(講明)하여 락(樂)을 임천(林泉)에 부치도다.   서기 1985년 기미 김양절 후생   김해 김종선 삼가 짓고   김해 김종률 삼가 글을 쓴다.   기미 9월 일 12세손 무현, 석현, 상현 근수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