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양향토사



곤양향토사

1. 敬慕堂 記文 ◦소재지 : 곤양면 중항리 와티

덕양재

  우리 경주 최씨(慶州崔氏)는 신라(新羅) 육부(六部) 촌장(村長)의 한 분이신 소벌도리공(蘇伐都利公)이 득성조(得姓祖)이시고 누전이(累傳而) 하여 신라(新羅) 말(末) 휘(諱)가 치원(致遠)이요 호(號)가 고운(孤雲)이며 자(字)가 해운(海雲)이신 문창후(文昌候) 최치원(崔致遠) 선생(先生)이 시조(始祖)이시다. 이분의 학문(學文)이나 문필(文筆)은 백세(百世)에 품연(稟然)하여 만백성(萬百姓)이 칭송(稱頌)하고 존모(尊慕)하는바 고려현종(高麗顯宗) 십일년(十一年)에덕양재   문창후(文昌候)로 추봉(追封)되시다. 이 분의 십일세손(十一世孫) 휘(諱)가 청(淸)이요 호(號)가 관가정(觀稼亭)이시며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七十二賢)의 한 분인 이 분이 파조(派祖)이시다. 시조(始祖)의 이십세손(二十世孫)이며 파조(派祖)의 십세손(十世孫)인 휘(諱)가 덕륜(德倫)이요 자(字)가 국심(國尋)이며 호(號)가 와초공(臥樵公)이신 조선(朝鮮) 명종(明宗) 십구년(十九年)에 경기도(京畿道) 양주군(楊州郡) 풍양(豊壤)에서 태어나셨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當)하여 서책(書冊)을 덮고 사천(泗川) 해전(海戰)에 참전(參戰)하시어 군공(軍功)을 크게 세우신 분이시다. 왜란(倭亂)이 평정(平定)되자 이곳 와티(臥峙)에 정착(定着)하시어 옥산초객(玉山樵客)으로 자적(自適)하시다가, 인조(仁祖) 사년(四年) 칠월(七月) 십구일(十九日)에 향년(享年) 육십삼세(六十三歲)로 졸(卒) 하시니 조정(朝廷)에서 통정대부(通政大夫) 군자감정(軍資監正)을 추증(追贈)하셨다. 배위(配位)는 김해김씨(金海金氏) 광수(光水)의 따님이시다.   수성이래(受姓以來)로 이천년간(二千年間)에 도덕(道德)과 문장(文章)ㆍ절의(節義)와 훈벌(勳伐)이 찬연(燦然)하여 삼한(三韓)의 명가(名家)로서 신라ㆍ고려 성가(盛家)를 이루었고, 시조(始祖) 문창후(文昌候)의 서원(書院)은 서악서원(西岳書院 - 최치원(崔致遠)ㆍ설총(薛聰)ㆍ김유신(金瘐信))을 비롯해서 십이서원(十二書院)이며 영당(影堂)은 二十三 개소(個所)에 이름에, 시조(始祖)의 위대(偉大)한 업적(業績)을 상고(詳考)하고 명가(名家)의 후예(後裔)로서 높은 긍지(矜持)를 가지고 조선(祖先)의 위업(偉業)을 봉양(奉揚)하고 계승(繼承)하여, 오늘에 이름에 자손(子孫)들이 번창(繁昌)하여 그 수(數)가 수천명(數千名)에 이르렀으나 公의 묘소(墓所) 아래 재숙(齋宿) 할 집 하나를 이루지 못함을 노심초야 걱정하던 차에 와초공(臥樵公)의 후손(後孫) 삼수(三洙)ㆍ재규(在奎)ㆍ영호(泳浩)ㆍ명호(明浩)ㆍ용협(鏞恊)ㆍ주오(周五)ㆍ인호(寅浩)ㆍ경호(敬浩)ㆍ영환(永煥) 등 여러 제족(諸族)들이 모여 재실(齋室) 짓기를 의논(議論)하여 원근(遠近)의 제족(諸族)들에게 알려서 재력(財力) 대로 성금(誠金)을 모아서 공(公)의 묘소(墓所) 동남(東南)쪽 산(山) 발치에 터를 닦아 집을 짓고 재실(齋室)이름을 경모당(敬慕堂)이라 하였다.   재실(齋室)을 지어 봉향(奉饗) 함은 그 기운(氣運)을 구(求)함이요, 몸을 닦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조선(祖先)의 교훈(敎訓)을 욕(辱)되게 않음은 그 뜻을 이음이니, 원(願)컨대 우리 종족(宗族)은 서로 화목(和睦)하고 제향(祭享)드림에 공경(恭敬)하며 부모(父母)에 효도(孝道)하고 자손(子孫)을 바르게 가르쳐 우리 조선(祖先)의 가유(嘉猷)와 의덕(懿德)을 떨어뜨리지 않도록 조선(祖先)의 영(靈)에 무궁(無窮)토록 흠향(歆饗)할 것이다.   이를 기문(記文)으로 하노라   후손(後孫) 수윤(洙鈗) 근지(謹旨)


담당자
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페이지 수정요청열기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시나요?

평가:
닫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