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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 지역의 불교연혁(佛敎沿革)   <가락국기(駕洛國記)> 및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수로왕비(首露王妃) 허왕후(許王后)의 동생 보옥선사(寶玉禪師)가 수로왕(首露王)의 왕자(王子)들과 함께 와룡사(臥龍寺)에서 수도(修道)한 설화와 함께 와룡사는 삼한갑찰(三韓甲刹)로서 남방불교(南方佛敎) 포교(布敎)에 기여한 힘이 컸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한선사찰사료(韓鮮寺刹史料)>에 기록된 「귀룡사사적병도비명(龜龍寺事績幷屠碑銘)」에 “신라 눌지왕(訥祗王)의 두 왕자(王子)가 사주지남향(泗州地南向)의 귀룡사(龜龍寺)에서 삭발(削髮)하여 법호(法號)를 ‘옥보(玉寶)’라 하고 동습수업(童習修業)하여 대성득오(大成得悟)를 지리산(智異山) 운상원(云上院)에서 개안(開眼)하여 옥보선인(玉寶禪人)이라 하였다. 귀룡사(龜龍寺)가 세워진 연후(然後) 서봉사(捿鳳寺)와 봉암사(鳳巖寺)가 창건(創建)되었다.”   이상(以上)과 같은 문헌(文獻)을 상고(祥考)한다면 와룡사(臥龍寺)는 AD 100년대의 건립설(建立說)이 되고 귀룡사(龜龍寺), 서봉사(捿鳳寺) 등은 AD 400년대에 창건(創建)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이는 남방불교(南方佛敎)의 전래(傳來)로 입증(立證)된다.   신라 지증왕(智證王) 4년(503)에 창건(創建)되었다 하는 다솔사(多率寺)는 병란(兵亂)과 실화(失火) 등으로 많은 고난(苦難)을 겪으면서도 아홉 번의 중건(重建)으로 오늘날까지 보존(保存)되어 온 유일(唯一)의 국가지정(國家指定) 전통고찰(傳統古刹)이다.   고려 태조(太祖)의 아들 ‘욱(郁)’과 경종비(景宗妃)와의 불륜(不倫)으로 ‘욱(郁)’이 사수현(泗水縣)으로 유배(流配)되고 이들의 소생(所生)인 대량원군(大良院君) ‘순(詢)’ (8代王 顯宗)이 유시(幼時)에 10년간 우거(寓居)한 배방사(排房寺)는 신라 경덕왕(景德王) 22년(763)에 세워졌고 흥보사(興寶寺), 백천사(白泉寺), 적선사(積善寺) 등은 고려조 중엽(中葉) 이전에 세워졌으리라는 추정을 고증(考證)으로 엿볼 수 있고, 다솔사 이후의 건립된 사찰은 북방(北方) 불교(佛敎)의 전래(傳來)로 볼 수 있다.   이상(以上)과 같이 우리 고장에서는 고대(古代) 가야(伽倻)시대부터 신라시대, 고려 초기(初期)에 연(連)이어 대찰(大刹)이 세워졌음을 고찰(考察)할 때 해상통로(海上通路)의 지리적 여건으로 남방 불교가 쉽게 도래(到來)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지형(地形), 산세(山勢)가 웅장한데다 명지(名地)가 많아 북방 불교가 경쟁적으로 터전을 잡았음이 짐작된다.   우리 지역은 고대불교(古代佛敎)의 초기(初期) 포교지(布敎地)로서 한국 불교사 정립에 새로운 획을 이룰 중요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우리는 망각된 무관심을 탈피하고 당시의 불교문화를 회상하여 보면서 유적지 보존과 아울러 사료발굴(史料發掘)에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여기에 참고로 남방불교(南方佛敎)라 함은 세일론, 인도, 버마, 태국, 월남 등지를 말하는데 소승불교(小乘佛敎)에 속한다. 소승불교(小乘佛敎)는 대승불교(大乘佛敎)의 보살행(菩薩行)을 이상(理想)으로 하는 중생자비(衆生慈悲)에 두지 않고, 개인의 해탈(解脫)위주로 좌선계율(坐禪戒律)에 진리를 얻고자 하니 포교(布敎)가 될 수 없고, 따라서 대중 접촉이 없었다. 이러므로 남방도래설(南方渡來說)의 문헌이 빈약할 수밖에 없었으니 학계(學界)의 깊이 있는 연구에 기대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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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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