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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4. 한국(韓國) 유교   유교가 한국에 전래된 연대는 기록이 없어 확실하지 않으나 삼국시대 때, 당(唐)나라의 학제인 국학(國學)을 받아들인 때를 그 기원으로 삼는다. 즉 고구려는 372년(소수림왕 2년)에 태학(太學)을 세웠으며, 백제는 국학을 세운 기록은 없으나 285년(고이왕 52년)에 이미 왕인(王仁) 박사가 󰡔논어󰡕와 󰡔천자문󰡕을 일본에 전한 기록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유학이 전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에도 오래 전부터 전래된 것 같으나 국학의 건립은 훨씬 늦어 682년(신문왕 2)에야 실시되었다. 그 후 신라에서는 당나라에 유학생을 보내 학문을 장려하고 최치원(崔致遠)은 당나라 과거에 급제하여 이름을 떨쳤으며 설총(薛聰)은 이두(吏讀)를 창시하여 구경(九經)을 해석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유교는 유능한 관리를 양성하는데 목적이 있었고, 부차적으로는 지도계급으로 하여금 경사(經史)에 통하게 하고 사부(詞賦)와 문장을 능하게 하는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태조의 숭불정책(崇佛政策)으로 유교가 한때 부진하였다가 992년(성종 11)에 비로소 국자감(國子監)을 세웠고 문종 때는 최충(崔沖)이 9재(齋)를 설치하고 학도를 가르쳤다. 그러나 무관의 발호와 계속된 전란으로 유교는 240년간이나 다시 침체상태에 빠졌다가 제25대 충렬왕 때 안향(安珦)이 왕을 따라 연경(燕京)에 다녀오면서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입수해 온 후 정부에 건의하여 국학을 세우고 대성전(大成殿)을 건립하여 공자를 존숭하는 등 유교 부흥에 힘썼다. 그는 또한 한국에 주자학(朱子學:性理學)을 처음 수입하였으므로 주자학의 시조로 일컬어진다. 그의 문하에는 백이정(白頤正)ㆍ우탁(禹倬)ㆍ권부(權溥) 등이 있어 모두 주자학 부흥에 힘썼으며, 그 학통은 고려 말의 이제현(李齊賢)ㆍ이색(李穡)ㆍ이숭인(李崇仁)ㆍ정몽주(鄭夢周) 등에게로 전승되었다.   특히 그 중에서 정몽주는 성리학에 정통하고 도덕과 경륜(經綸)에도 일가를 이루어 동방 이학(理學)의 조(祖)라 불린다. 조선시대에는 개국 초부터 태조의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으로 유교가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유교의 기초를 처음으로 확립한 학자는 정도전(鄭道傳)이다. 그는 <불씨잡변(佛氏雜辨)> 등의 논설을 통하여 불교를 배척하고 유교를 숭상할 것을 주장하였으며, 같은 시대의 유학자 권근(權近)도 많은 저술로 이에 동조하였다. 한편 고려의 유신(儒臣) 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어받은 김종직(金宗直)은 당대의 유종(儒宗)이 되었고, 그의 문인 김굉필(金宏弼)ㆍ정여창(鄭汝昌)은 가장 유명하였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로 희생되었다. 다시 조광조(趙光祖)가 유도(儒道)의 정치를 펴려 하였으나 기묘사화로 실패하고 많은 사류(士類)도 함께 화를 입었다. 이어 을사사화에는 이언적(李彦迪)ㆍ노수신(盧守愼) 등의 거유(巨儒)가 유적(流謫)되었으며 거듭되는 사화로 유학자들은 차차 벼슬을 단념하고 산림(山林)에 숨어 오로지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게 되었다.   서경덕(徐敬德)ㆍ조식(曺植)ㆍ김인후(金麟厚) 등은 그 대표적 인물이라 할 수 있으며, 특히 서경덕은 종래 답습하여 오던 주자의 이기이원론에 대하여 중국 장횡거(張橫渠)의 태허설(太虛說)을 이어받아 기일원론(氣一元論)을 주장함으로써 한국 주기론(主氣論)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 후 명종 · 선조 때에는 많은 유학자가 배출되어 한국 성리학의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그 중에서도 이황(李滉:퇴계)ㆍ이이(李珥:율곡)가 가장 뛰어나 이황을 ‘동방의 주부자(朱夫子)’, 이이를 ‘동방의 성인(聖人)’이라 할 만큼 그 학풍은 후대의 학자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이황은 4단 7정(四端七情)의 이기이원론을 주장하여 많은 저술로써 이를 확립하였고, 그 학설은 일본에 전해져 야마자키 안사이(山崎闇齋)를 비롯한 여러 주자학자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쳐 동양사상에서 한국의 성리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하였다.   그의 문하에서는 조목(趙穆)ㆍ유성룡(柳成龍)ㆍ김성일(金誠一)ㆍ정구(鄭逑) 등 저명한 학자가 배출되었다. 한편 이이는 주기설(主氣說)을 확립시켰으며 그 학설은 김장생(金長生)ㆍ이귀(李貴)ㆍ조헌(趙憲) 등을 거쳐 김집(金集)· 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다. 이황의 학통은 이상정(李象靖)ㆍ이진상(李震相) 등이 적극 발전시켰으며, 송시열의 문인 권상하(權尙夏)의 제자 이간(李柬)과 한원진(韓元震)은 인(人)ㆍ물(物)ㆍ성(性)에 대한 이론을 달리하여 낙론(洛論)과 호론(湖論)으로 갈리어, 이 무렵부터 유교는 별다른 발전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당쟁(黨爭)과 예송(禮訟)의 소인(素因)이 되었다. 그리하여 공리공론만 거듭되는 순리학파(純理學派)를 대신하여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주장하는 실학파(實學派)가 대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유형원(柳馨遠)ㆍ이익(李瀷)ㆍ박지원(朴趾源) 등이 있다.   그러나 이 학파는 때마침 동점(東漸)한 서학(西學)에 물들었다는 혐의로 조정의 탄압을 받아 끝내 탁월한 경륜을 펴지 못하고 쇠퇴하였다. 그 후 성리학이 부흥하는 기세를 보였으나 이들은 여전히 여러 학설로 갈리어 자기 학파의 학설만 주장하였다. 조선 후기의 이같은 유학자들의 지나친 형식과 체면에 집착하는 완고와 고집은 한국 개화에 커다란 장애가 되었으며 다만 일제의 침략으로 국세가 위급하자 송병선(宋秉璿)ㆍ최익현(崔益鉉)ㆍ조병세(趙秉世)ㆍ민영환(閔泳煥)ㆍ이준(李儁)ㆍ안중근(安重根) 등의 유학자가 앞장서서 애국의 대의를 펼쳤다. 8ㆍ15광복 후 전국 유림의 조직체인 유도회(儒道會)를 결성하고 성균관대학을 창립, 유교정신에 의한 새로운 민주교육이 실시되었다. <출처-두산백과사전>   곤양에 유교가 들어온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곤양에서 유교가 융성하게 된 것은 중종 때에 곤양군수로 부임한 관포(灌圃) 어득강(魚得江)의 유교를 통한 풍습의 교화와 명종조에 곤양군수로 부임한 옥계(玉溪) 노진(盧禛)의 치적 때문이다. 특히 중종(中宗) 25년(1530) 어득강(魚得江)의 유학(儒學) 권면시책(勸勉施策)으로 많은 유사(儒士)를 배출시켜 소과복시(小科覆詩)에 진부케 하였으니, 유풍(儒風)이 크게 진작되어 곤양은 추로향(鄒魯鄕-공ㆍ맹자의 고향으로 학문 탐구의 고장)이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다. 또한 구암(龜岩) 이정(李楨)선생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을 모셔서 이 후 곤양의 유학진흥에 특별한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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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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