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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2. 원시신앙 1) 근원(根源)   원시신앙(原始信仰)은 선사시대 인류의 생활속에서 전승되고 있는 전종교적(前宗敎的), 또는 주술적(呪術的)인 신앙형태로서 자연숭배에서 비롯되어 정령숭배, 주력, 신당숭배 등 인간의 생득적(生得的) 신앙심이 아득한 옛적부터 믿어온 계승적 신앙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고대사(古代史)는 종교적 신화가 역사의 초창기를 기록하며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 명칭에 약간의 차이는 있었으나 본체는 하나이며, 어떤 형상의 근원이 요약되었다. 이 근본의 상징은 「밝」으로 단군(檀君)을 가르켜 하는 말이고, 우너리는 그의 아들이며 부여(夫餘)의 첫 임금 부루(夫婁)를 가르켜 하는 말이다.   동명(東明)설화의 말, 주몽(朱蒙)설화의 천제(天帝), 혁거세(赫居世)설화의 백마자란(白馬紫卵), 알지(閼智)설화의 금성백계(金城白鷄), 가락(駕洛)설화의 주일청예(朱日靑裔), 수로(首露)설화의 자원금란(紫禐金卵), 고려(高麗)의 호경(虎景)등은 모두가 단군, 부루의 설화가 변형된 것으로 우리나라 원시신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다만 이것이 아득한 옛날 일이라 윤리 종교의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하나의 형성종교로 내려왔을 뿐이다.   마니산(摩尼山) 제천단(祭天壇 : 太子 夫婁 창건)을 중수하고 평양 숭령전(崇靈殿), 구월산(九月山) 삼신사(三神祠)가 건립 중수(重修)되었으나 그것 역시 국가의 제천의식에 그쳤고, 대중의 윤리종교로는 발전하지 못하였다. 또 선사(仙史), 비사(秘史) 등은 이조 태종(太宗)때에 신사(神史)문헌을 불태워버려 그 형태 마져도 찾기 어려웠던 것을 태종사(太倧師) 나철(羅喆)에 의하여 찾아보게 됨은 다행스런 일이다. 2) 원시신앙의 성격적(性格的) 분류(分類)   우리나라의 원시신앙을 성격적으로 나눠 보면 신격(神格), 신사(神事), 신덕(神德)을 말할 수 있다.   ① 신격(神格)   ◦신(神:天神) : 인간의 종교심에 대한 신앙대상(存在)이며 불가사의(不可思議)한 능력으로 명명(冥冥:깊고 이슥함을 뜻함)중에 인류에게 화복(禍福)을 내린다고 믿어지는 신령(神靈), 곧 종교상으로 믿고 의지하는 대상이며, 또 두려움을 주는 대상.   ◦성(聖:道通) : 종교의 본질을 규정하는 가치로 곧, 초월적 존재로서 신, 또는 신성(神性)의 숭엄능력(崇嚴能力) 및 접근 불가능한 이상적인 최고신격 또는 인격(人格).   ◦선(仙:不死, 不死之術者) : 선경에 사는데 신으로 변하여 마음대로 나타나서 신변자재(神變自在)하여 장생(長生), 불사(不死)한다고 함.   ◦종(倧:上古神人) : 민속신앙으로서 조화신(造化神)인 환인(桓因)과 교화신(敎化神)인 환웅(桓雄)과 치화신(治化神)인 왕검(王儉)과의 삼위일체. 곧 “한얼님” 상고신인(上古神人)을 뜻함.   ② 신사(神事)   ◦사(祠:廟祠) : 임금이나 성인의 신을 모심.   ◦제(祭:祭祀) : 신 또는 선영에게 음식, 포백(布帛)을 바쳐 치성을 드림.   ◦주(呪) : 과학 이전의 원시종교 관념에서 볼 수 있는 초자연적인 존재나 신비적인 힘을 빌어 여러 가지 형상을 일으켜 길흉을 점치고 화를 없애고 복을 내리게 함.   ③ 신덕(神德)   ◦시(是:是正) : 바른 도리에 맞는 길.   ◦선(善:善吉) : 선현(善現), 선업(善業), 공생(空生), 수보리(須菩徥)와 같은 뜻으로 온갖 법이 공(空)이라는 이치.   ◦당(當:利合) : 불변의 법칙 이치. 우주의 본체.   ◦정(正:方直) : 바르고 곧은 길로 사(邪)의 반어(反語).   3) 원시신앙의 형태분석   우리나라의 원시신앙을 형태별로 세분하여 보면 배천(拜天), 배일월(拜日月), 산악숭배(山岳崇拜), 여성숭배(女性崇拜), 서물(庶物)인 입석(入石), 지석(支石)등의 숭배, 남격(男覡), 여무(女巫)의 기복(祈福), 복서(卜筮), 산사기우(産祠祈雨)등 여러신앙이 예부터 전해왔다.   ① 산악숭배   고대 풍속의 생활중심 생활상을 보면 우선 부족 하나가 성립되면 역내의 가장 높은 산악이「밝」은 곧 산악의 뜻으로 그 중에 가장 준험한 봉악을 「부루」로 받들었다. 옛 사람의 생각으로는 고산(高山)은 지상의 천(天)이고, 들(野)은 고산의 아들이라고 하면 하늘은 곧 그네들의 조상이 됨으로서 거기가 바로 옛 고향이라고 생각하며 자기들은 하늘에서 분가(分家)해 온 인간으로서 내려올 때 고산에 첫 발을 디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으로 살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갈 때에는 그 산봉울리를 타고 올라가게 된다고 여겼으므로 고산은 하늘과 들과 조상의 통괄(統括)의 표상이 되는 것으로 신성시하고 존중하여 제사를 올리게 되었다.   그러므로 나라로부터 마을 한 집에 이르기까지 표상의 산악이 있었으며, 1읍의 진산(鎭山), 1촌의 당산(堂山)은 1국에서 1향(鄕)에 이르기까지 중대한 일은 반드시 여기에 고설(告設)하여 기도하며 과실과 곡식, 베와 비단을 “햇것”으로 으레 먼저 천신하였다.   ② 성수숭배   국토의 중심이 산의 계곡으로부터 하천변으로 옮기게 된 뒤로는 강하(江河)의 흐르는 혜택과 범람하는 위력으로 말미암아 강과 하천의 숭배신앙이 생겼다. 국도(國都)를 끼고 흐르는 강이나 하천은 대개(열) 「알」로 부른다.   이 말은 성수, 대수라는 뜻이고 부여(扶餘), 고구려(高句麗)의 엄리, 압록, 감탄, 백제의 아천, 신라의 아리알 등은 모두 이 고어의 역자들이다.   ③ 여성숭배   원시시대의 여성은 교접(交接)과 생식의 사이에 인과적(因果的)관계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하고 아이의 생속(生續)은 오로지 어머니만의 특수한 능력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여자가 주가 되어 남자를 선택도 하거니와 크게는 부족의 계통과 작게는 가정의 조직을 모두 여자 중심으로 하기도 하였으니 이것이 이른바 모계(母系)사회이다.   한국에는 「암」, 「수」라 하여 자웅(雌雄)에 자(雌)를 먼저 말하고 「계집」, 「사내」라 하여 남녀의 여(女)를 먼저 말하고 「어미」, 「아비」라 하여 부모(父母)의 모(母)를 먼저 말함과 같은 것은 모계사회의 유속(遺俗)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또 사회가 부계(父系)로 변해진 뒤까지도 여자의 지위는 항상 남녀의 위에 위치하여 특별한 존경을 받기까지 하였다.   이러한 것은 여자가 신으로부터 특수한 은총(恩寵)을 받고 신을 섬기는데 여자가 남자보다 우월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 까닭이다. 이른바 “강신(降神) 무당내림 집힘”이 곧 인격 전환의 현상은 원체 여성에게 잘 나타나는 일이니 신을 섬기는 직분에 여자를 주로 하게 되고 제사숭상 한 가지로 여자가 사회적 경대(敬待)를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국의 옛 전설을 보더라도 국토의 생성과 시발은 다 여자의 신비력에 의한 것이니, 유화부인(柳花夫人), 부여성모(扶餘聖母), 동신(東新) 성모, 지리산(智異山) 성모, 운불산(雲佛山) 성모 등이 모두 그러한 예이다. 후대의 기록에는 이러한 여성들이 하늘이나 그 대표자와 교합(交合)하여 건국자(建國者)를 탄육(誕育)시켜 신성한 모성이 국토와 인문(人文)을 생산하였다 하였으니 이는 고대에 있어서 여자 중심으로 사회구조가 되어 있었던 것을 반영(反映)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고대사회의 주장(主長)은 신인(神人), 무(巫)가 법(制度), 속(俗:行俗) 양쪽의 주권을 겸하게 되었고, 그러므로 뒷날까지 여군(女軍)이 국정을 맡게 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교(敎), 정(政)이 갈라진 뒤에도 교적(敎的)방면의 중요한 임무는 여자가 담당하게 되어 사제장(司祭長)은 반드시 왕자의 근친 여자로 하였다. 이 여자 사제장을「알령(阿老 혹은 阿利英)」이라 하니 성자를 의미한 것이다.   고대부터 부뚜막과 부엌을 가장 소중하고 정결(淨潔)하게 하고 세시 명절에 행복을 집안으로 오게 하는 뜻에서 온 집안에 등촉을 밝히는 임무를 여자가 맡는 것은 모든 여성 숭배의 관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손을 비비면서 비는 기원(祈願) 소임(所任)도 주부의 성역직(聖域織)이었으니 집안에서 존경을 더하지 않을수 없는 것이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은 유경사상(儒敬思想)이 들어온 뒤부터 그에 물든 것이었으나 오래된 습관에 따라 여자의 지위는 의연하게 권위가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④ 주술(呪術)   주술이 고대 미개 민족사회에서 크게 유행하였으며, 어느 특정한 지역이나 민족에게만 한정되어 시행된 것은 아니다. 미개사회의 여러 민족들은 대부분 주술이 그들의 생활방편이었다. 특히 남양(南洋)등의 도서지역 미개사회에서 뚜렷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무교(巫敎)의 기원은 단군신화에서 찾을 수 있다. “조선민족 고초시대 즉 유신시위기교문천왕환웅단군왕검혹위천강지신혹위신격지애길자이제천사신위인존경(朝鮮民族古初時代卽有神市爲基敎門天王桓雄檀君王儉或爲天降之神或爲神格之矣吉者以祭天事神爲人尊敬)” 이는 단군왕검이 신시를 베풀고 풍우(風雨)와 곡물 길흉, 인간의 질병, 형벌, 선악을 맡아 봄으로써 무(巫)의 구실을 한 것을 보여준다.   주술의 행위는 우리 생활 밑바닥에 깊이 뿌리박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보통의 상식으로는 농작물에 비료를 주는 것이 통상의 방법인데도 불구하고 주술에서는 주문(呪文)을 불러서 풍년이 되게 한다는 것이다. 비가 오고 바람이 부는 것도 자연의 변화가 아니고 주문의 조화에서만 이룩될 수 있다고 믿었다. 또 이성간의 사랑도 영험이 있는 주부(呪符:부적)를 가지고 비로소 애정의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이룩할 수 없는 불가능한 일을 주술의 신비로서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사자(死者)를 소생시킨다든지,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한다든지 만병통치, 불로장생 등 터무니없는 소원성취를 위하여 특유한 주문과 동작 등으로서 목적을 달성하는데 어떤 확신을 가지고 행동한다.   우리나라의 주술생활로는 마한(馬韓)의 천군(天君)사상은 매년 10월을 상달이라 하여 추수에 감사드리고 가무(歌舞)로서 즐기는 추수감사제였으며, 동예(東濊)의 무천(舞天)도 역시 하나의 제천대회였고 부여에는 영고(迎鼓) 점복(占卜)등이 있었다.   가락의 계락(榽洛), 백제의 소도(蘇塗)는 제주의 특수 신성지역으로 불리는데 소도는 신단 앞에 큰 나무를 세우고 거기에 방울과 북을 달아 주술적인 의례를 행하였고, 고구려의 동맹(東盟)은 일명 동명(東明)이라 하여 10월에 궁중에서 대제(大祭)를 제사하였고, 또한 집집마다 목신주(木神主)를 신좌(神座)에 모셨으니 이는 부족장이 주재한 제천사귀신(祭天事鬼神)의 제의이다.   신라초기의 기록에 “남해거서간역운차차웅혹운자웅충김대문운차차웅방언위무야세인무사귀신상제사고의경지(南解居西干亦云次次雄或云慈云充金大門云次次雄方言謂巫也世人巫事鬼神尙祭祀故畏敬之)”라 하였으니 거서간(居西干)은 제사를 맡은 존장자(尊長者)란 뜻이고 차차웅(次次雄)은 무당(巫堂)이 제주로 남해(南解)의 제정일치(祭政一致)를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주술적 내용은 풍수사상, 무속사상, 점복사상, 귀신사상 등 민간신앙의 넓은 부문에 나타나 있다. 신비력을 가지고 제반목적 달성과 소원성취를 위하여 주문과 주구(呪具)를 사용한 일종의 주술을 행하게 된다. 이의 담당자를 무당이라 하는데, 무당은 선악의 제정령과 통하고 방법을 실천한다. 무당은 거의 여성으로 주의(呪醫)를 겸한다. 그러나 때로는 남자도 있는데 남주(男呪)를 격(覡)이라 하며 설문(說文)에 남왈(男曰) 격(覡), 여왈(女曰) 무(巫)라 하였다.   가내가 태평하고 일상생활에 만사형통 하려면 이 신귀(神鬼)의 중재자 역할자인 무당의 지시에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즉 무당이 중심으로 하는 정령신앙의 종교적 형태를 “샤머니즘”이라 말한다. 이 샤마니즘에는 천계(天界), 지상계(地上界), 지하계(地下界)의 3계의 세계관과 지상계에 있는 인간이 불여의(不如意)한 재난을 면하려면 신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누구나 신과 직접 접촉할 수 없으므로 매개자인 무당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무당은 장구한 수련을 쌓고 신비한 능력을 신으로부터 부여받은 반성인적(半聖人的) 인간이므로 인간의 참뜻을 신에게 전달하고 소원을 풀어 줄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또한 그러한 자리에 있다. 그러므로 무당은 의사대신 질병의 치료, 농작물의 풍년, 행운의 대통, 신수의 대길, 자손의 성장, 가문의 번영 등 모두 주술적 제사를 통해서만 이룩된다는 것을 믿고 있으며, 기우제(祈雨祭), 기청제(祇晴祭), 동제(洞祭), 지제(地祭) 등 민속행사를 모두 주술과 관련해서 생각하고 있다.   정초(正初)의 복조리, 정월 대보름의 연날리기 등은 행운을 빌고 액운을 멀리 띄우는 행사이며, 동지(冬至)에 팥죽을 끓여먹고 집 주위에 뿌려두는 것 등은 붉은색과 파란색이 민속적으로 귀신을 쫓는데 효용이 있다는 데서 유래된 것이다. 이 밖에도 고추라든지 주부(朱符) 동도기(凍桃枝)를 들 수 있다. 이것은 모두 색채의 유사성에서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다고 인정되어 주술에 사용된다.   무당은 고구려에서는 무(巫), 사무(師巫), 신무(神巫), 무복(巫卜)이라 하였고 신라에서는 차차웅(次次雄), 자충(慈充), 백제에서는 무(巫)라 하였다. 신라 미추왕은 공주의 지병에 무(巫)가 시약(施藥)한 바 있고, 고구려에서는 유리왕의 병에 무(巫)가 관여하였으며, 백제에서도 의자왕 때에 왕이 무(巫)를 불러 문복(問卜)한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직업적인 무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는 인종(仁宗) 이후 크게 성행하여 무당이 사회적 지위가 향상되어 상류 출신의 무녀를 선관(仙官)이라 하였다. 조선은 유교국으로 불교와 무를 천대하여 태조(太祖)는 그들에게 전답을 주지 않는 등 배척하였다. 그러나 무풍(巫風)은 계속 성행하여 군중은 물론 서민에 이르기까지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러다가 일제(日帝)는 무당을 미신으로 단정하고 타파에 힘써 왔으나 민중속에 뿌리박은 무풍은 그대로 남아있었고, 옛날처럼 성행하지 않는다 하여도 민간의 유습으로 그 맥은 꾸준히 이어져 오늘날에도 상류층과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그 뿌리는 깊이 박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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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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