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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5절 교육의 예화(例話) 1.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효(孝)   한국 여성의 거울이신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조선조 연산군(燕山君) 10년 때의 사람으로 원래 황해도(黃海道) 평산(平山)에서 신명화(申命和)의 딸로 태어나 명종(明宗) 6년에 졸했다.   호(號)를 시임당(媤妊堂), 임사재(妊師齋)라고도 하였으며, 본관(本貫)은 평산(平山)이다.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소녀 때부터 아버지 슬하에서 경전(經典)을 읽었고, 글, 자수, 그림 등에 뛰어난 소질(素質)과 재주를 보였다. 평산(平山)은 경치 좋고 물 맑은 곳이었다. 대부분이 구릉성 산지(山地)로 덮이고, 동북(東北)에서 서남(西南) 간(間)으로 뻗어간 멸악산맥과 동편(東便)으로 흐르는 예성강(江)은 훗날 한국여성(韓國女性) 중의 위대(偉大)한 인물(人物)을 배출하는데 손색 없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당쟁(黨爭)의 혼란 속에 멀리 강원도(江原道) 강릉(江陵)까지 옮겨가 살게 되었던 신사임당(申師任堂)은 어릴 때부터 천성(天性)이 온아(溫雅)하고 얌전함은 물론 부모(父母)를 섬기는 정성이 남달리 지극하였다. 뿐만 아니라 사리에 밝고 재주가 뛰어나 남자도 따를 수 없는 학문(學問)과 예술적(藝術的) 재능(才能)을 발휘하였다. 역시 신사임당(申師任堂)이 자란 강릉(江陵)도 평산(平山) 못지않은 곳이었다. 그러나 일찍이 부친(父親)을 여윈 신사임당(師任堂)은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셨고, 자라서 한양(漢陽)으로 출가(出家)하였다. 그러나 그는 천리(千里)가 넘는 시가(媤家)와 친정(親庭)을 왕래(往來)하며 양가(兩家)를 돌보는데 조금도 소홀함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친정(親庭)에서는 어머니 곁에서, 시가(媤家)에서는 시부모(媤父母)와 남편(男便)을 모시면서 부덕(婦德)을 쌓고 학문(學問)을 닦으며, 예술(藝術)에 정성을 쏟았다. 특히 뒷날 사임당(師任堂)의 그림은 안견(安堅)의 화풍(畵風)을 그대로 이어받아 산수화(山水畵)인 “포도”와 “초충” 등은 화풍(畵風)이 여성적(女性的)인 섬세(纖細)와 교치(巧緻)를 발휘하여 안견(安堅) 다음가는 명화(名畵)로 높이 평가(評價)되기까지 한다. 그런 사임당(師任堂)이 어느날 대관령(大關嶺) 고개로 율곡(栗谷)을 데리고 나섰다. 친정(親庭) 어머니를 홀로 두고 서울의 나이 많은 시(媤)어머니를 모시기 위하여 떠나는 길이었다. 멀리 구름 사이로 가려진 강릉(江陵)을 바라보는 사임당(師任堂)의 눈에는 눈물이 맺혀 있었다. 천리(千里)길을 사이에 두고 어머니를 그리기만 해야 할 사임당(師任堂)이었기에 혼자 둔 어머님이 걱정이 되어서였다. “내가 없으면 어머님 고생이 얼마나 될까. 밥도, 빨래도 손수 하실 어머니...” 사임당(師任堂)은 목이 꽉 메여 왔다. 그러나 아들 율곡(栗谷)이 옆에 서 있는 것을 보고 꾹 참고 떠나 왔던 것이다. 서울의 시댁(媤宅)으로 온 사임당(師任堂)은 친정(親庭) 어머니에게 자주 글을 보내어 안부를 여쭙는데 소홀함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어머니를 생각하는 마음은 아들 율곡(栗谷)에게까지 가르침이 되도록 모범(模範)을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 때의 사임당의 효성(孝誠)을 뒷날 율곡(栗谷)은 이렇게 썼다. “평소(平素) 어머님은 친정을 생각하고 밤마다 눈물을 흘리시며 밤을 세웠으니 나에게까지 감명을 주었으며 목이 메이기까지 했다.” 사임당(師任堂)이 그의 친정(親庭) 어머니를 생각하며 쓴 시(詩)에도 어머님에 대한 효성심(孝誠心)이 잘 나타나 있다.   산이 겹쳐 내 고향은 천리려마는 (千里家山萬疊峰)   자나 깨나 꿈속에도 돌아 가고파 (歸心長在夢魂間)   한송정가에 외로이 뜬 달 (寒松亭畔双輸月)   경포대 앞에는 한 줄기 바람 (鏡浦坮前一陳風)   갈매기는 모래 위로 흩어졌다 모이고(沙上白鷗恒聚散)   고깃배는 바다위로 오가리니 (波頭漁艇每西東)   언제나 강릉길 다시 밟아가 (何時重踏臨瀛路)   색동옷 입고 앉아 바느질 할 꼬 (綵舞班衣膝下縫)   “천리(千里)나 떨어진 멀고도 먼 강릉 땅, 거기다가 태백산맥(太白山脈)이 남북(南北)으로 누웠고, 크고 작은 산들이 겹겹이 가로 막힌 어머니 계신 고향, 꿈에도 그리운 어머니, 혼자 계신 한송정에 뜬 달도 외롭겠고, 한 줄기 지나가는 바람까지도 쓸쓸한 고향, 지금도 날고 있을 갈매기 떼, 바다 위를 오고가는 배까지도 그리운 어머니 계신 강릉 땅, 그 고향의 어머니 곁에 가서 어릴 때처럼 색동 옷 입고, 어머니와 이야기하며, 바느질이라도 하고 싶다”는 사임당(師任堂)의 “어머니 그리워”라는 시(詩)는 시로서도 명시(名詩)이지만 그 속에 포근히 담긴 끝 없는 효성심(孝誠心)은 차라리 눈물겨운 정경(情景)이기도 하다. 이렇듯 효성(孝誠)이 지극한 사임당(師任堂)은 자식에게는 어진 어머니요, 남편에게는 훌륭한 아내로서 그야말로 현모양처(賢母良妻)였다. 그는 남편이 잘못을 깨우치도록 사리에 맞게 충고하였고, 그 충고도 귀에 거슬림이 없도록 조심성 있게 설득하여, 스스로 깨닫게 하였다. 또한 아들 율곡(栗谷)을 가르치되 학문(學問)과 덕행(德行)을 동시에 가르쳐서 이를 곧 실천에 옮기도록 하였다.   사임당(師任堂)도 항상 스스로 실천하여 아들 율곡(栗谷)에게 손수 모범을 보이는 데에 소홀함이 없었던 것이다. 이런 어머니 슬하에서 자란 아들 율곡(栗谷)은 13세에 진사(進士) 초시(初試)에 합격하였고, 이어 아홉 번이나 장원(壯元)을 하여 그 이름을 천하(天下)에 떨쳤으며, 특히 천도책(天道策)에 관한 논문은 중국에까지 알려졌다. 문과(文科)에 급제하기는 29세로, 이 해부터 발신되어 벼슬은 양관 대제학에서 이조판서, 병조판서를 거쳐 우찬성(右贊成)에 까지 올랐다. 그렇게 높은 벼슬에 오른 율곡이지만 그릇된 일이 한번도 없었던 것은 사임당(師任堂)이 아들에게 늘 “항상 겸손(謙遜)한 태도로 백성(百姓)을 보살피고, 의(義)에는 뜻을 꺽지 말라”고 어릴 때부터 가르쳐 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어머님의 가르침에 따라 뒷날 율곡(栗谷)은 임금에게 간하되 바른 말로 간했고, 당파(黨派) 싸움을 없애기 위해 그 조정에 힘을 쓰고, 시폐(時弊)를 상언(上言)하였다. 또 사창(社倉)을 두어 어려운 백성을 구제하였고, 각 고을에 감사를 오래 두어 민폐를 없앴다. 또한 외적(外敵)의 침입(侵入)이 있을 것을 미리 짐작하고, 군사 십만양병설(十萬養兵說)을 주장한 것은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이다. 그러나 유성룡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역사(歷史)의 큰 비극이었다.   율곡(栗谷)은 당시 해동공자(海東孔子)의 일컬음을 받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이 같은 훌륭한 인물이 배출된 것은 오직 그의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사임당(師任堂)은 40대에 불과한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 부모에 대한 극진한 효성(孝誠)과 남편에 대한 내조(內助)와 자식(子息)에 대한 교육(敎育)에 헌신한 일생(一生)이었기에 모든 여성들의 귀감(龜鑑)이 되고도 남을 인물(人物)일 뿐 아니라 한국(韓國)의 어머니 상으로서도 당연히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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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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