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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3. 기타 이야기   기타 전하여지는 이야기들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1) 초등학교 앞 우물   현재 곤양초등학교 옆 사거리 한가운데에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새마을 사업 때 도로 한가운데 위치하고 있어 폐쇄하였다. 그 깊은 우물은 물을 길어 먹었다는 실용성 외에 수맥을 통하게 한다는 의미도 있었다.   2) 마당재   이곳에는 장군설이 있다. 현 남해안 고속도로터널이 2개 뚫려 있는 곳과 곤양중학교 근처를 턱으로 한월고개를 무장의 상투 끝으로 보면 누워 있는 커다란 장군의 얼굴형상이 된다. 옛날부터 여기에 징소리가 나면 (즉 무당이 굿을 하면) 동네에 우환이 든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장군은 기가 세어서 무당의 잡굿을 싫어한다.   3) 다솔사 뒷산(봉명산)   다솔사 뒷산은 풍성한 어머니의 젖가슴 형국으로 이 일대의 사람들에게 풍성한 기를 부어 준다고 한다. 그 기운을 승화시키면 도를 통하고 학문을 높히며 예술의 높은 경지까지 완성할 수는 있으나, 자칫 잘못하면 남녀상열지사의 음란으로 그칠 우려도 있다고 한다.   4) 남산   현 남산의 위치에 관한 것으론 남산이 떠다니는 것을 보고 소갈머리 없는 계집아이가 소변을 보다가 저산이 저기 앉았으면 좋겠네라고 하자 남산이 현재의 위치에 앉게 되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는 남산 밑으로 바닷물이 넘실거렸고 초등학교 뒷변 비봉내 까지도 바닷물이 들어와 서울로 보낼 화물들을 실어 가산조창ㆍ제민창 수송화물선단과 연결되었다고 하나 제방(오리방천)이 축조되고 하천으로 내려온 퇴적물로 하상이 높아져 오늘에 이르렀으며 남산은 조선시대에는 우산(于山)으로 불리어졌고 산 위에는 봉수대가 설치되기도 했다.   5) 인물에 관한 전설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1) 이순신 인물에 관한 전설로는 먼저 이순신 장군의 임진왜란시의 활약이다. 즉 곤양성(현재의 성내리)에 백성들을 모아 군복을 입히고 싱싱한 갈치를 대나무 꼬챙이에 끼워 아침햇살에 비추이게 하여 무수한 칼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일본군 척후병을 교란시켜 일본군진입을 막았다고 한다.   (2) 정기룡   “바다에는 이순신, 육지에는 정기룡.”   임진왜란 때 공적이 큰 장군으로 두 사람을 든다.   이 중 정기룡 장군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이 있다.   정기룡 출생시의 전설이다.   정기룡 장군이 태중에 있을 때 그의 어머니는 만삭의 몸으로 홍역에 걸려 신음하다가 가족들의 정성스런 간병에도 불구하고 출산을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가족들은 절통한 가운데도 상례의 절차대로 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죽은지 이틀이 지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아가 꿈틀거리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모두가 놀랍고 기이하게 여겨 염을 중지하고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갑자기 집 주위와 방 안에 살기가 가득 어리기 시작하더니 그 다음날 죽은 지 사흘이 지난 어머니의 시체 속에서 울음소리도 우렁차게 튼튼한 사내아이가 태어났을 뿐 아니라 하늘에 무지개가 걸리고 온 마을까지 서기가 가득하여 마을 사람들은 이 아이는 필시 하늘이 보낸 위인이 탄생한 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장군은 어려서부터 행동이나 생각이 남달리 비범하였다. 동네 아이들과 어울려 병정놀이를 할 때도 군령에 따라 상벌이 엄중하고 공평하였으며, 말달리기와 활쏘기를 좋아하여 명장의 자질이 보였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나, 진주성 싸움에서 아내 강씨 부인을 잃는 가슴 찢어지는 슬픔을 겪으면서도 오로지 전장에서 왜적을 섬멸하는데 온 힘을 다하였다.   다음은 선조와 정기룡에 대한 관심에 관한 전설이다.   1586년 가을 선조가 나라 일을 보다가 피곤하여서 일찍 잠이 들었다.   새벽녘이었다. 용 한마리가 종로통으로 쓰윽 들어와 지금의 종각ㆍ종루에 이르러서는 쓰윽 하늘로 오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앗! 소리를 지르고 보니 꿈이었다.”   “아니, 용이 나타나다니? 용은 임금을 뜻하는데, 지금 임금은 내가 아닌가? 그렇다면 나 말고 다른 임금이 나타났다는 말인가? 그러면 역적 사건이 생긴다는 말인가? 이것 보통 일이 아니구나.”   선조는 이런 생각을 하였다. 언제나 왕의 자리를 노리는 역적은 일어날 수 있는 법. 드디어 세상을 시끄럽게 할 나 아닌 다른 용이 나타난 것인가?   이런 언짢은 생각을 하다가 다시 이런 생각을 하였다.   “깊이 생각할 것이 있는가? 내가 워낙 피곤하다 보니 헛꿈을 꾼 것이겠지.   그런 꿈을 가지고 역적이니 뭐니 해서 세상을 시끄럽게 해서는 안 되지. 그냥 도로 자자.”   하고 억지로 잠을 청해서 막 자려고 하는데, 이것이 또 웬일인가. 아까 그 용이 종각에서 꿈틀꿈틀하더니 하늘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가?   “음. 두 번이나 같은 꿈을 꾼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그 종각을 가보라고 해야겠구나!”   선조 임금님은 튼튼한 신하를 종각에 보냈다. 가보니 군사들이 있는 것이 아니고 수상한 것도 있지 않았다.   “음. 아무 일도 없구나!”   하고 막 돌아서려는 궁중 군사의 귀에 “드르렁. 드르렁. 드르렁!” 하고 코를 고는 소리가 나는 것이었다.   “아니. 어떤 놈이 여기에 와서 잠을 자나? 무험 하도다. 아주 태평스럽게 자는 저 젊은 놈 좀 봐. 즉시 묶어서 궁중으로 데려가자!”   선조는 이 젊은이를 보고서 놀랐다. 도저히 역적을 할 놈이 아니었다. 몸은 우람하지만 군사를 거느린 것도 아니고 무슨 영문으로 여기에 끌려 왔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해 하고 있었다.   “너는 내가 누구인 줄 아느냐?”   “모릅니다. 촌놈이 서울에 와서 어디가 어디인 줄도 모르고 저녁 때가 되어 주막에 들 돈도 없어서 잠을 잘 자리를 한데에서 찾을까 하고 두리번 두리번 하다가 웬 큰집이 하나 있기에 들어갔습니다. 지키는 사람도 없고 방문도 없기에 그냥 거기서 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더 큰 집에 끌려 왔으니 도대체 촌놈이 어리둥절해서 모르겠습니다.”   “음. 여기가 궁궐이고 나는 임금이다!”   “옛?”   하고 그 총각은 그만 기절을 할 뻔하였다.   “아, 죽을 죄를 졌나이다. 저는 그것도 모르고 이 새벽녘에 무슨 일인가 하고….”   “하하하. 무슨 일이기는 일이지. 네가 촌놈으로 임금을 이 첫 새벽에 만났으니까 말이다. 그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어디서 왔느냐? 무엇하러 서울에 왔느냐?”   “예. 저는 경상도 곤양에서 올라온 정무수라고 합니다. 올해 나이 스물네 살이고, 고향 고성 고을에서 무과에 급제하고서 이번에 서울에서 무과시험을 보려고 합니다.”   “음. 책은 보았느냐?”   “병서(兵書)를 많이 보았습니다. 친구들은 저를 선비같이 대하여 매헌(梅軒)이라는 호로 부르고 있습니다.”   “음. 내가 너의 이름을 새로 지어 주고 싶다. 용(龍)이 일어난다는 뜻으로 일어날 기(起), 기룡(起龍)이라고 하여라.   그리고 이번에 무과에 급제하여 이 나라가 어려울 때에 목숨을 바쳐서 나라를 구하여라.”   “예. 황공하여이다.”   이리 하여 정무수 청년은 정기룡 청년이 된 것이다. 이 용은 역적이 아니라 인재라는 뜻이었다.   정기룡 재혼에 관한 전설이다.   선조 27년에 장군은 나라의 일로 전주 권현감의 집에서 머물게 되었는데 현감에게는 재덕을 겸비한 사랑하는 딸이 있었다. 자랄수록 아름다운 모습과 남다른 선견지명이 있어 현감의 총애를 독차지 하였으나 부모가 딸의 배필만 정하려고 하면 한사코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여 부모의 걱정이 태산 같았다.   어느 날 현감은 딸을 불러 앉혀 놓고 자초지종을 다그쳐 물었다.   “여자가 나이가 차면 시집을 가서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낳아 기르는 것이 도리인데 너는 어이해 부모가 정하려는 배필마다 마다하고 과년토록 부모의 속을 태우는지 말해 보거라”   부친의 엄격한 물음에 권처녀는 자세를 가다듬고 간곡한 말로 답하였다.   “아버님 혼사는 인륜지대사인데, 만약 부모님께서 정해 주신 배필이 옳은 배필이 아니라고 하면 저의 평생을 그르칠 뿐 아니라 이로 인해 부모님을 근심시키는 불효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연유로 저의 배필은 제가 구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부디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해 주시고 헤아려 주신다면 불효를 만분의 일이라도 없애는 계기가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비록 부드럽고 겸손한 말씨였으나 그 속에 꺾이지 않을 결의가 엿보였다.   권현감은 눈앞이 깜깜했다. 비록 철부지 딸의 외람된 말이나 평소 딸이 총명하고 선견이 있는데다 결의가 확고해 보여 약속한 것이 어느덧 세월이 흘러 귀엽던 딸이 스물다섯 살의 노처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러한 때에 준수한 정기룡이 나타났으며 그의 건장한 체격과 별빛 같은 눈, 우뢰 같은 목소리를 들은 권처녀는 이분이야말로 나의 천생 배필이다 결심하고 부모에게 결혼을 청했다.   “아버님, 이제 저도 남의 아내가 되고자 합니다. 원하옵건대 소녀의 배필이 이 집에 나타났으니, 그에게 혼사를 청하여 성사시켜 주시기를 소녀 간곡히 소원하옵니다. 그 동안 그의 인물됨을 관찰해 보니 범상치 않은 인물 이옵고 소녀가 이제까지 기다리던 옳은 배필이 되기에 과분한 분이라 여겨 이렇게 청하게 된 것입니다. 해량하여 주옵소서.”   그 동안 과년한 딸의 혼사 문제로 노심초사하던 권현감은 총명한 딸의 인물 봄을 흡족하게 생각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사랑에 나가 정기룡과 마주앉았다.   “정공, 오늘 내 정공께 외람된 부탁을 드리고자 하니 거절하지 말아 주오. 나에게 과년한 딸이 하나 있는데 그 애는 옳은 배필을 만나기 전에는 결혼할 수 없다고 했고 나도 딸아이의 뜻을 살려 배필 나타나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조금 전 딸이 정공이 배필이니 청혼하여 주십사고 간곡히 청하기에 부랴부랴 뛰어나온 것입니다. 다행히 인물이 빠지지 않고 재덕을 공들여 가르쳤으니 마음을 정해 주셨으면 합니다.”   뜻 밖의 청혼을 받은 정기룡은 전쟁으로 사랑하는 아내 강씨를 잃고 분노에 치를 떨며 목숨을 초개같이 여기며 맹호처럼 전장을 누비던 순간 순간과 아직도 끝나지 않은 왜적과의 싸움 등을 생각하며, 그 날 밤을 뜬눈으로 새우고 날이 밝자 현감을 만났다.   “저의 형편을 알고 계시는지요?”   “정장군의 신상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습니다. 진주성에서 부인을 잃은 것까지”   정기룡은 청혼을 받아 들여 권씨 처녀와 혼례를 올렸다. 정기룡의 부인이 된 권씨는 일찌기 한 필의 말을 기르고 있었는데 그 말의 체격이 장대하고 성질이 거칠 뿐 아니라 날래기가 비호 같아서 다른 사람은 말 곁에 얼씬도 못하고 오직 권처녀만을 따랐다. 그래서 이 말은 하늘이 낸 용마이니 이 말을 탈 수 있는 사람이야말로 하늘이 낸 인물이고 자기의 배필이라 굳게 믿으며 지성으로 길렀는데 정기룡이 이 말을 타고 달리자 신장이 용마를 타고 달리듯이 위엄이 넘쳐 수많은 전장에서 왜적을 무찌르고 승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것이다.   ‘장군 나면 용마난다’는 옛말과 같이 장군은 현처와 용마를 얻어 정유재란 때 처가의 재력에 도움 받아 무기를 만들어 왜적을 무찔렀으니 이것은 천우신조요, 천생연분으로 신의 도움이라고 이 고장에서 전설처럼 전해 오고 있다.   현재 하동군 금남면 중평리 상촌 마을에 사당인 경충사가 있고, 중평리 당산골 진양 정씨 사당 아래쪽 100m지점이 정기룡 장군의 생가가 있었던 곳인데 지금은 밭이 되어 있고 생가 뒤쪽에 있던 대밭이 약간 남아 있다.   (3) 여생(呂生)의 전설   해설 : 동야휘집(東野彙輯) 권7에 ‘영만금(萬金) 부처치부(夫妻致富)’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여생(呂生)」이라 제목을 바꾼 것이다.   이 「여생(呂生)」은 연암의 「허생전(許生傳)」 같은 유형의 작품이다. 독서하던 선비가 나가서 치부하여 돌아오는 과정은 「허생전」 유사하며, 부인이 치산하여 부자가 된 것은 「독역」과 상통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후반의 북벌책(北伐策)에 대한 비판이 없이 치부를 묘사하는 것만으로 끝나는 것이 특징이다.   당시 서울의 갑부인 김동지(金同知)에게 영남의 연해 지방에 그의 판화전(販貨錢)을 실은 배 수척이 있다고 하는 이야기로 미루어, 그의 상업조직(商業組織)이 지방의 시장에 뻗쳤음을 알게 된다. 작중 주인공 여생(呂生)은 이 김동지의 상업자본을 이용하여 전라도와 경상도의 문화가 집중된 하동(河東)ㆍ곤양(昆陽) 지방을 거점으로 장사를 하였던 것이다. 이 때 김동지의 수표를 가지고 현지에서 환전(換錢)하는 방법이 흥미롭다.   여생은 상업 활동을 통해서 큰 돈을 벌자, 농업 부문에 새로운 시도를 하였다. 그는 「허생전」에서 보듯 도적들을 거느리고 무인도로 들어간 것이다. 이들 도적들은 물론 농토를 상실한 유랑 농민들이다. 그는 이러한 유휴 노동력을 생산적인 방향으로 전환시켰다. 많은 노동력을 집중하여 황무지를 개간해서 농사를 짓고 축산을 하였으며,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품 생산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곧 상업적인 농업으로서 기업적인 농업 경영 방식을 취하여 크게 치부하였다. 「허생전」에서 허생이 무인도에 이상국(理想國)을 건설하려 하였던 것에 비해, 여생은 새로운 생산 방식으로 부(富)를 획득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이리하여 생산력을 증대시켰을 뿐 아니라 유랑 농민들을 취업시킬 수 있어, 당시의 사회적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한 셈이다. 여기서 우리는 여생이 ‘경국제세(經國濟世)할 재질’을 갖춘 인물임을 보게 된다.   여생(呂生) 모(某)는 남산 밑의 궁한 선비다. 집은 가난하였으나 글 읽기를 좋아하였고, 경국제세(經國濟世)할 재질이 있었지만 쓰임을 얻지 못한 것이다. 집을 팔아서 호구하고 사랑채 단칸방에서 부부가 거처하는데, 기한(飢寒)을 이기지 못하여 여생이 아내에게 말하였다. “여보, 내 외출할 일이 있는데 걸칠 만한 옷이 없소?”   “참 딱도 하구랴. 의복을 잡혀먹은 지 옛날 아니우? 남은 것이라고는 지금 몸에 걸친 누더기뿐입니다요.”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야 없잖소. 그럼 어떡한다지.”   “다 헤어진 도포 한 벌이 있는데 사당(祠堂) 참배할 때 입었던 것입니다. 입고 나갈 수 있겠어요?”   “그거 됐소.”   여생이 그것을 주워 입고 나서니, 길거리 아이들이 그의 더럽고 누덕누덕 기운 옷을 보고 손가락질하며 웃어댔다.   종루(鐘樓) 거리에 나가자 시전 상인들이 길을 막고 무슨 물건을 팔려느냐고 묻는다. 여생은 팔 물건이 있는 것처럼 점방으로 따라 들어가서 시전상인에게 말했다.   “아니, 내 꼬락서니가 물건을 매매하러 나온 사람 같아 보이우? 지금 서울에서 당대 제일가는 부자가 누군지나 가르쳐주오.”   시전 상인은 다방골 김동지(金同知)라고 대답했다.   여생은 곧 김동지 집을 찾아갔다. 주인은 얼굴이 윤택하고 의복이 화려했다.   “주인이 근래 시정간에서 부자로 이름난 김동지요?”   “그렇소.”   “내 소청이 있오. 들어주시려우?”   김동지는 양식이나 구걸하려는 것이겠거니 하여, “무슨 어려운 일이 있오? 우선 말해보오.” 했다.   “내 곤궁한 형편에 경륜(經綸)을 좀 펴볼까 싶은데, 주인이 만 꿰미의 돈을 빌려 주시겠소. 만 꿰미가 못되면 곤란하오.”   김동지는 여생을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한참을 생각하다가 흔쾌히 승낙하는 것이었다.   여생은, “먼저 천 꿰미는 우리 집으로 실려 보내주오. 내 집에 가서 이것을 구처(區處)하고 곧 돌아와서 오늘 중으로 떠나겠소.” 하고 집에 가서 천 꿰미를 아내에게 맡기며,   “이것으로 10년 동안의 생계를 삼으시오. 내 오늘 집을 나가면 10년 뒤에나 돌아올 것이오.”   부인에게 당부하고 나서 김동지 집으로 되돌아오자, 김동지는 오찬을 준비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로 가시려오?”   “영남이요.”   “내가 일을 맡겨온 하인이 하나 있어, 근면하고 민첩한데 데리고 가 보겠소?”   “그야 물론 좋겠지요.”   “영남의 연해 지방에 내 판화전(販貨錢)을 실은 배 수척이 있소. 내 어음을 보면 즉시 환전(換錢)해줄 것이오. 이렇게 하면 운송하는 비용이 절감되지요.”   “더욱 좋다뿐이오.”   김동지가 의복 일습을 내다가 여생에게 갈아입도록 하니, 여생도 사양하지 않았다. 다 떨어진 옷가지는 싸서 행장 속에 간직하는 것이었다.   여생은 하동(河東)ㆍ곤양(昆陽) 등지, 영남ㆍ호남의 물산이 모이는 곳으로 내려갔다. 거기서 그는 장날을 따라 다니며 매양 물가를 올려 사들이니 장터에 나온 물건이 죄다 그의 수중으로 들어왔다. 내일도 모레도 연일 이같이 하여 9천 꿰미의 돈이 거의 다 나갔을 때는, 드디어 영남ㆍ호남의 쌓인 물화가 바닥날 지경에 이른 것이다. 물건이 달려서 나오지 못하자, 사들인 물화를 팔아서 몇 배의 이득을 보았다.   여생의 장사는 별다른 묘수가 아니고 그저 헐 때 사들였다가 귀할 때 내는 것 뿐이다. 돈이 자꾸 불어날수록 그 용도도 더욱 무궁하여 몇 년 사이에 번 돈이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것이었다.   대로변에 있는 부잣집을 보고 여생이 객주(客主)를 삼자고 청했더니, 부자가 난색을 표했다.   “우리집이 촌 중에서 가장 크기 때문에 종전까진 부상대고(富商大賈)들이 연락 부절이었습죠만, 수년 이래 무뢰한 자들이 작당을 해가지고 멀지 않은 곳에서 출몰하니, 부상 대고들이 모두 발길을 끊고 아예 이 마을을 왕래하지도 못한답니다.”   “도적들이 얼마나 되며, 놈들 소굴이 어디랍디까?”   “도적들이 수백 명이나 된다든데... 여기서 서쪽으로 10리를 가면 지세가 험준하고 숲이 울창한 산이 나서지요. 그 산을 따라 북쪽으로 들어가면 골짜기가 툭 트인 데에 큰 굴이 보인답니다. 그곳이 바로 도적들이 웅거한 곳입지요.”   여생은 하인에게 명하여 돈을 가지고 연해의 배가 닿아 있는 곳으로 가서 있으라 하고 약속하기를, “내 어음을 보거든 돈을 보내라. 기간이 오래거나 금방이거나 오직 이렇게 나를 기다리고 함부로 그곳을 떠나지 말아라.”   하인이 명을 받아 떠나고, 여생은 단신으로 입산하여 골짜기 상하 10리를 들어가 도적의 처소를 찾았다. 산허리에 토굴이 있어 굴 밖으로 돌문이 달렸고, 수십 보 들어가니 굴이 점점 넓어지고 있었다. 이우명(二牛鳴)의 거리에 당도하니 초가 40ㆍ50간이 나오는데, 쑥대머리 밤송이 수염들이 그곳에 우굴거리고 있다가, 여생을 보고 놀라 몽둥이를 들고 나서는 것이었다.   “놀랠 것 없네. 나는 포도군관이 아닐세. 내가 너희들을 잡으러 왔다면 왜 단신으로 이 소굴에 들어오겠나. 못 믿겠으면 돌문 밖에 나가서 나를 따라온 자가 있나 보라구.”   도적들이 나가보니 과연 아무도 없는지라, 비로소 마음을 놓고 물었다.   “우리를 잡으러 온 것이 아니라면 무슨 일로 이 굴 속까지 찾아 왔소?”   “내 자네들을 위해 할 일이 있네. 나를 용납하겠나?”   뭇 도적들이 크게 기뻐하여 줄지어 절하며, “우리들이 대장을 잃고 통솔할만한 사람이 없어 분산될 판이었는데, 오늘 대장님이 오셨으니 천만 다행이올시다.” 하며, 상좌에 앉히고 수령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3일이 지나서 여러 도적이 아뢰기를, “장중에 군량이 떨어진 지 오랩니다. 무슨 대책이 없겠습니까?”   여생이 20꿰미 어음을 배가 있는 곳으로 보냈더니, 돈이 즉시 와서 여러 도적은 크게 기뻐했다. 돈이 떨어졌음을 보고하매, 다시 30꿰미 어음을 보냈고, 이러하기를 여러 번이었다.   어느 날 여생이 여러 도적에게 묻기를, “너희들 중에 부모처자를 둔 사람이 몇이냐?”   “있는 사람이 과반수입죠.”   “그럼 어떻게 살아가느냐?”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저희들이 춥고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집을 버리고 이곳에 들어온 지 여러 해 지났습지요. 그 사이 식구들의 생사를 막연히 모르고 있습니다. 문득 생각할 때마다 가슴이 미어집니다.”라고 했다.   여생은 돈 만 꿰미를 가져오게 하여 1인당 100꿰미씩을 나누어주고는 “이것을 가지고 너희들 집에 가서 부모처자를 구원하고, 각기 곡식종자ㆍ농기구를 구해지는 대로 사가지고 오너라.”   여러 도적들은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고 흩어졌다.   기한이 되어 여러 도적들이 모이는데, 각종 곡식과 농기구 등속이 두루 구비된 것이다. 이에 여러 도적들과 배가 닿아 있는 곳에서 만나, 그곳에 있는 돈을 선적하고 농우 4ㆍ50두를 사서 싣고 배를 띄워 서남 대해로 나가서 폭이 10리에 초목이 무성한 섬을 발견하고 배를 그 섬에 대었다.   초가를 세워 거처를 만들고 불을 놓아 태워서 뭇 도적들과 힘을 합쳐 황무지를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더니, 곡식의 소출이 10배나 되어 동산만한 노적이 쌓였다.   몇 년을 이같이 농사를 지었다. 관북 지방에 흉년이 들자 벌목을 하여 배를 만들어 곡식을 싣고 가서 팔았다. 또 수년 후 서도(西道)가 대기근이라 다시 곡식을 싣고 가서 교역했다.   돈을 배로 계산해야 될 지경이었다.   소를 들에 놓아먹였더니, 새끼를 쳐 무리를 이루어 수 백 두를 헤아렸다.   이에 돈과 곡식과 소를 선적하고 경기 해안에 정박했다. 여생이 뭇 도적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들도 역시 모두 양민인데, 하필 괴롭게 도적질을 일삼겠느냐? 오늘부터 각기 너희들 집으로 돌아가 다시 양민이 되어라.”하고 1인당 500꿰미에 곡식과 소를 분배해주었다.   여러 도적들은 감격하여 절을 하고 눈물을 닦으며 흩어졌다.   여생은 하인과 함께 나머지 돈을 셈해보니 아직도 100여 만이 되는 것이었다. 다시 배를 띄워 경강(京江) 위에 닻을 내렸다. 그 하인에게 배를 지키라 하고 여생은 행장 속에서 다 헤어진 옷을 꺼내 입고 곧장 김동지 집으로 갔다.   여생이 서울을 떠난 뒤 만 10년이었다.   김동지가 깜짝 놀라 묻기를 “어찌하여 이 꼴이 되었소?”   “내 행장이 다소 여유가 있어 옷 한 벌이야 충분히 마련할 수 있겠지만, 옛날을 잊지 않는다는 뜻으로 갈 때 싸둔 옷을 다시 꺼내 입은 것이오.”   주인이 성찬으로 대접하자, 여생은 10년 동안의 일들을 이야기했다.   김동지는 다시 크게 놀라, “당신은 실로 일세를 경륜할 선비시구려. 기껏 농사와 장사에 조금 시험해보고 말았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하고 돈을 반으로 가르자고 하였다.   여생은 사양하기를, “그럴 것 없소. 나도 이제 늙었소. 매일 한 꿰미의 돈을 대어 여생을 마치도록 의식을 걱정하지 않으면 족하겠소.”   “그야 물론 명대로 거행하다뿐입니까.”   여생은 자기 집을 찾아가보니, 단간 행낭은 온데간데없고 웬 솟을대문이 거기에 서 있다. 문 밖에서 안을 기웃거려보니, 안팎 저택이 굉장한 것이었다. 하인이 나와서 어디서 온 손님인가 물었다.   “이게 누구 댁인가?”   “양반댁입죠.”   “주인이 계시는가?”   “바깥어른은 집을 나가신지 10년이 지났으나 아직 돌아오시지 않고 안방마님뿐입죠.”   “그래, 내가 이 집 주인이다.”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여생 부처는 서로 손을 쥐고 눈물을 흘렸다.   “여보, 어떻게 이런 굉장한 집을 지었오?”   “제가 천 꿰미 중에서 다섯 꿰미로 노복을 사고, 400꿰미로 집을 지어 이만한 가업(家業)으로 그 나머지 돈을 먹고 살면서 지금은 수십 만냥이 되었습니다.”   여생은 웃으면서 말하였다.   “부인이 가진 바가 적은데, 여기 앉아서 치부를 나보다 많이 한 셈이구려.”   (출처 : 이우성 임형택 역편, 이조후기 한문단편집(상), 일조각, 1973.)      (4) 효자이야기   철종4년(1853) 곤양현(昆陽縣) 유지(有志)와 사림(士林)이 추성원(秋成元)의 허벅지살 봉양효행을 임금님에게 상주하여 나라에서 효행상을 내렸다(포창완의문(褒彰完議文)에 적힘)는 기록이 있다. 상주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곤양에 사는 추성원이 괴질에 걸린 아버지의 약초를 구하기 위하여 지리산골짜기에 들어갔을 때 흰 옷 입은 노인이 나타나 「아버지의 병환에는 인육이 특효약」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성원(당시13세, 명심보감을 지은 추적(秋適) 선생의 적손)은 자신의 허벅지 살을 도려내어 국을 끓여 봉양 아비의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이 상주문으로 고종임금은 예조(禮曺)를 통하여 보약 1백첩, 쌀 다섯말, 보리 다섯말 하사토록 하였다.   (5) 곤양에 유배온 백일헌   이삼장군의 자는 원백이고, 시호는 백일헌이며, 본관은 함평인으로 상월면 주곡리에서 태어났으며, 명재 윤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힘이 장사였고 담력이 있었다.   병조판서 김구의 추천으로 숙종 31년(1705) 무과에 급제하여 함경도 병마절도사를 거쳐 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경종 3년(1713) 1등 공신에 책록 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영조 1년(1725)에는 어영대장으로 임명되었지만 무고로 경상도 곤양에 유배되었다.   귀양지에서 풀려난 후 영조 3년(1727) 훈련대장이 되어 이인좌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2등 공신에 책록되고 함은군에 봉해졌다.   그 뒤 한성판윤을 거쳐 병조판서ㆍ공조판서를 역임하고 1735년 5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에 영조는 이삼장군의 높은 뜻을 기려 시호를 충관백일지의이니 백일헌이라 내리고 손수 붓을 들어 쓰시니 그 현판이 상월면 석종리 묘 앞 영당에 있다.   영당의 주초석은 전면에 가공 석주를 세운 후, 원주를 세워 겹처마 부연을 설치한 맛배 지붕으로 5량 집이며 내부에는 우물마루를 설치하고 기단석재는 장대석을 사용하였다.   (6) 미래를 예언하는 곤양지명에 관한 전설로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월천(越川)고개(광포가는 길)에 관한 전설로 나중세상(말세)이 되면 물이 고개를 넘는다는 뜻이 있다고 한다. 그 의미를 잘은 모르겠지만 이렇게 생각하여 본다. 1) 현재 조성된 진양호 댐으로 인하여 (터지건 어찌되건) 물이 넘쳐서 흐른다. 2) 상수도 공사로 수도관이 넘는다. 3) 광포만 매립으로 항공단지가 들어서면 훌륭한 인물(水=지혜=인물)이 출퇴근 하느라 고개를 넘나든다.   남산위로 쇠배(=비행기)가 하늘을 떠다닐 때 밝은 세상이 온다는 전설이 있었다. 까마득한 옛날의 전설로 이 소리를 듣고 쇠배가 하늘을 떠다닌다는 말에 모든 사람들이 웃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하루에도 몇 차례씩 쇠배가 남산위로 떠다니고 곧 사천 항공단지가 본격화되면 쇠배는 너무 많이 떠다닐 것이다. 그때 이 세상은 얼마나 좋아지겠는가.   기타 다음과 같은 점들도 무시할 수 없다.   현재 곤양초등학교 운동장 밑에서 송전의 동 밖 마을로 하수구가 놓여 있다. 성곽의 배수구인 것 같다. 조선건축사 연구에 도움이 될 것 같다.   (7) 형제바위의 전설   한월 광포 선창의 윗선창과 아래선창에는 옛날부터 바위가 두 개 나란히 서있었는데 하나는 크고 하나는 작았으며 그 바위 앞에는 조그마한 밥상바위가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침략하여 윗선창에다 배를 전부 정박지 못하자 아래 선창을 만들려고 밥상바위를 깨트렸으니 피가 바위에서 흘러나오고 석공이 상처를 입고하여 바위를 깨트리지 못하고 산 밑으로 우회하여 길을 내었고 지금도 이 두 개의 바위(형제바위)는 바다를 바라보고 우뚝 서 있으며 그 당시 만든 길은 지금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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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체육과 문화예술팀 055-831-2714
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만족도 조사 민원신청  시장에게 바란다  조직도  공지사항  공고/고시/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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