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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2. 긴 노디끝과 솔예교   동천(東泉) 마을 산끝에서 검정(儉丁) 아방(牙方)의 깔밭목까지의 지점(地点)인데 지금은 벽해(碧海) 변전(變田)이 되어 그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지만 옛날은 흥사까지 바닷물이 드나들고 갯벌이 연이어져 있었다. 동천(東泉)쪽에서 저 건너 엄방이를 건너려면 조수(潮水)가 만조일 때는 한나절이나 기다렸다가 간조(干潮)가 다 되어서야 무릎까지 푹푹 빠지는 개펄과 허벅지까지 닿는 갯고랑을 건너다니기란 너무나도 불편하고 힘들었고 겨울철 추울 때는 그 고생은 말할 수도 없었다. 그 무렵에 산 모퉁이 끝 동리(洞里)에 자식도 없이 홀로 사는 할머니가 살고 있었는데 사고무친(四顧無親) 의지 할 곳이 없는 분이었다. 자연히 생계가 어려워서 남의 집의 품도 팔고 힘겹게 사는데 동리사람들이 권해서 여기다 주막(酒幕)을 내어 살게 되었다. 그런데 거기가 양안(兩岸)을 건너다니는 길목인지라 장사가 잘 되어 그럭저럭 살아가면서 늘 개를 건너다니는 사람의 불편함에 마음 아파했다. 그러다가 이 노파는 몇 해 동안 모은 전 재산을 털어 이 갯길에다 징검다리(노디)를 놓기로 마음먹었다. 거리가 200m가량이고 근처에는 돌이 귀해서 먼 곳에서 큰 돌을 목도를 해서 운반하였으니 그 당시 사정으로서는 너무나 어려운 공사로 기간도 오래 걸려 겨우 이 노디가 완성 되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이 갯길을 편리하게 건너다닐 수가 있었다.   그 뒤 많은 세월 속에 노디 다리가 솔예교로 변하였고 다리는 자주 파손되어 보수를 하였고, 또 자주 파손되고 하니 최성원 이하 여러명이 합심하여 이 다리를 보수하고 경비염출과 사용내역들을 기록한 사적비가 세워져 있다. 이후 일본치하시 일본인(구강)이 고동개에서 건너편 와티쪽으로 방조(防潮)둑을 막아 간척지가 수 십 만평이 조성되고 농경지로 개간되면서 이 다리도 없어지고 황새목 쪽에 지금의 장포교가 가설되고 아방 중항쪽으로 가는 길이 방천으로 왕래하게 되었으며 지금도 이 일대 지점을 “긴 노디끝”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은 노디와 솔예교는 없어졌으나 다리가 있던 동천(회사) 쪽 산기슭에 있는 솔예교 중수내역을 기재한다. 1) 率禮橋 重修碑 ( )而 率禮橋 重修碑此橋創設 不知幾萬年也昔壬午爲毁破行人致傷數多故 崔聖元 慨然自備十貫錢雇立完築( )九年庚寅分亦爲毁破恨無奈何一 之力難當以艱力成功之計( )丁卯二月日( )意呈單某某人前略干財力精題錢 五分同十二月( )同年十三日完築成功之時酒肴十錢在錢( )於此橋遂( )丙申七月分同橋西邊福德山山腰路傍( ) 酒肴丁巳八月日同橋修補時二兩二( )雇價下其餘( )五分五( )無( )辛丑正月二十日加利面牙方員使字畓內下地七十五( )之方( )下( ) 化( )南北山東同人畓西路( )給價四十錢( )同二十合( )定禾穀設置亦爲 主( )返還( )洞各一年式畓禾穀二石推尋此橋修護千秋( )焉 乾隆四十六年辛丑四月初六日 立 ( )又錢八兩碑石加下 施主 車仁甲 姜渭三 姜月尙 金德河 化主 崔聖元 其外百名餘 ※ ( )안은 마모되어 區別이 안되는 곳.

率禮橋 重修碑

  이 다리의 창설은 기만년(幾萬年)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옛 임오(壬午)년에 파손(破損)되어 행인(行人)이 많이 상심(傷心)하였다. 최성원(崔聖元)이 이를 개탄(慨嘆)하여 독단으로 십관전(十貫錢)을 출자하여 완축(完築)하였다. ○○○ 9년 경인(庚寅)에 또 훼파(毁破)되어 한사람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정묘(丁卯) 2월 ○일에 몇몇 사람들이 약간의 재전(財錢)을 거출하였고, 동년 13일에 완축(完築)하였다. 낙성일에 酒 肴代로 10전(錢)을 쓰고 남은 돈이 조금되었다. 병신(丙申) 7월에 다리 서편 복덕산(福德山) 산허리에 비를 세우고 정사(丁巳) 8월 ○일 다리 보수시 2냥(兩) 2전(戔)을 고용가(雇傭價)로 지불하고, 남은 돈이 조금 되었다. 신축(辛丑) 정(正) 월 20일에 가리면 아방원 사자답 내(內)의 땅 75○와 남북산(南北山) 동동인(東同人)의 답(沓) 얼마간과 금액(金額) 40전(錢)과 ○○○으로 수곡을 설치하고, 동(洞)마다 수곡 2석(石)을 추심하여 이 다리를 천추(千秋)토록 수호(修護)할 것이다.   서기 1770년 庚寅○ 辛丑 ○ 4월 6일 세움.   또 전(錢) 8냥(兩)은 비(碑)를 세울 때에 쓰기로 가산되었다.   시주 차인갑 강위삼 강월상 김덕하   화주 최성원 그 외 백여명   ※ 장소 : 장포교에서 남쪽으로 100m지점 회사마을 입구에 있으며 6ㆍ25시 총탄자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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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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