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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 산속(産俗)에 관한 것   사람들은 가족(家族)을 이루고 가통(家統)을 이어 대대(代代)로 번창(繁昌)하는 것이 궁극(窮極)의 희구(希求)이므로 아들을 낳는다는 것은 비중(比重)이 대단하였다 여자가 출가(出稼)하여 아들을 낳고 못 낳고는 운명(運命)이 좌우되고 신분(身分)과 지위가 달라지는 세상을 살아오면서 생자기원(生子祈願)은 속신(俗信)으로 또 민담(民談)으로 설화(說話)가 많다. 여기에 몇 가지 구전(口傳)되어 오는 것을 적어 본다.   1) 조상묘의(祖上墓) 이장(移葬)   생자(生子)를 못 하는 것을 선조(先祖)의 묘소가 잘못된 것이라 하여 길지(吉地)를 찾아 이장(移葬)을 하고 그래서 득남(得男)을 하면 선조(先祖)의 덕분(德分)으로 여겼다.   2) 산신(山神)에게 기원(祈願)   명산(名山)이나 영험이 있다는 산신당(山神堂)을 찾아 기자치성(祈子致誠)을 했다. 당(堂)이 없는 명산(名山)에서는 거목거암(巨木巨岩) 앞에서 산신(山神) 강림(降臨)을 빌고 생자(生子)를 기원(祈願)했으며 이 때는 몇 일 전부터 목욕(沐浴)재계(齋戒)하며 집에 황토(黃土)를 뿌리고 상가(喪家) 출입은 물론 부정(不淨)한 곳에 가지 않고 정성(精誠)을 다하여 제물(祭物)을 마련 의례(儀禮)를 올리고 제례(祭禮)가 끝나면 소지(燒紙)를 하여 산신(山神)의 응감(應感)을 알아보는데 소지(燒紙)의 종이가 잘 타면 산신(山神)이 기원(祈願)을 잘 들어 주었다 하여 기뻐했으나 잘 타서 하늘로 올라가지 않으면 치성(致誠)이 부실했거나 부정(不淨)을 탔다고 믿어 다시 산신제(山神祭)를 지냈다.   3) 거암 치성(巨岩 致誠)   곳곳에 기자치성(祈子致誠)을 하는 바위가 있는데 서 있는 바위와 누워있는 바위가 있다. 여기에다 금줄을 매고 촛불을 밝혀 산신제(山神祭)와 같이 제례(祭禮)를 지낸다. 그리고 입암(立岩)과 와암(臥岩)에 힘을 다 하여 만지고 문지르기를 반복한다. 우리 지역에는 없지만 입암(立岩) 중에는 고산(高山) 협곡(俠谷)에 있어도 남근(男根) 바위라 하여 생자 치성(生子 致誠)하러 오는 사람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것도 있다.   4) 기자(祈子) 굿   무당(巫堂)을 불러 안택(安宅) 굿과 가자(祈子) 굿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마당 끝에다 신당(神堂)을 설치(設置)하여 주과포(酒果脯)등 제물(祭物)을 차려 놓고 무당의 축원 사설(辭說)과 가무(歌舞)로 굿을 하여 아들 낳기를 빈다.   5) 부처에게 치성(致誠)   기자(祈子)에 효험(效驗)이 있다는 사찰(寺刹)을 찾아서 불치성(佛致誠)을 드려 생자(生子)를 비는 것이다. 의식(儀式)에 따른 공물(供物)은 현물(現物)이나 현금(現金)으로 하고 치성(致誠) 기간 동안은 절에서 묵으며 정한 시간에 불공(佛供)을 드리고 시간(時間)나는 대로 불당(佛堂)에 올라가 기원(祈願)을 하기도 한다. 이 치성(致誠)기도(祈禱)를 위한 택일(擇日)이 되면 부정(不淨)을 가려야 하고 기간(期間)은 삼일기도ㆍ칠일기도ㆍ백일기도 등등 정성(精誠)을 다하는데 사찰(寺刹) 법당(法堂) 안에서만 아니고 경내(境內) 산신각ㆍ칠성당 등을 돌면서 기도(祈禱)를 드린다. 우리 지역에서도 곳곳에 있는 절을 찾아 불공치성(佛功致誠)을 드리는 사람이 흔히 있었다.   6) 용신기도(龍神祈禱)   생자(生子)를 용신(龍神)에게 기원(祈願)하는 것인데, 이 용신제는 물가에 제단(祭壇)을 만들어 놓고 무당(巫堂)을 불러 굿을 하기도 하고 조용히 혼자서 의식(儀式)을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용신(龍神)은 일월(日月)과 상관(相關)이 있다고 하여 정월달 상원(上元)에 일출(日出)이나 월출(月出) 때를 맞추어 일월을 향해 절을 하면서 생자(生子)를 기원(祈願)하기도 한다.   7) 태몽(胎夢)과 태교(胎敎)   태몽(胎夢)은 포태(胞胎) 뒤에 얼마 안 되어 꾸는 경우가 있고, 출산(出産)이 임박(臨迫)해서 꾸는 사람도 있으며 어떤 사람은 임신(姙娠) 중 수시로 꾸기도 한다. 태몽(胎夢)을 통하여 태아(胎兒)가 남자(男子)냐 여자(女子)냐를 식별(識別)한다고 믿고 있으며 태아(胎兒)의 성장(成長)까지도 안다는 신앙(俗信) 때문에 부인(婦人)들은 태몽(胎夢)에 큰 관심(關心)을 가졌다. 같은 태몽(胎夢)을 꾸어도 일정치 않고 상반(相反)된 경우도 있는데 일반적(一般的)으로 화조류(花鳥類) 꿈을 꾸면 여자(女子)라 하고 짐승이나 과일 꿈은 남자라고 믿었다. 그 밖에 용(龍)ㆍ거북ㆍ태양(太陽)ㆍ고추ㆍ콩ㆍ호랑이ㆍ사슴 등은 남아(男兒)이고 달ㆍ구름ㆍ닭ㆍ반지ㆍ은장도ㆍ산수도(山水圖)ㆍ물고기 등은 여아(女兒)의 태몽이라 했다. 태몽(胎夢)이 아니고도 임신(姙娠) 중 태아(胎兒)의 태동(胎動)이 심하면 남아(男兒)이고 태동(胎動)이 약(弱)하면 여아(女兒)라고 추측(推測)하기도 했으며 임산부(姙産婦)의 배 윗부분이 부르면 남아(男兒)이고, 아랫부분이 부르면 여아(女兒)라 하여 또 임신부(姙娠婦)가 식품(食品) 중에 신 것을 좋아하면 여아(女兒)이고 그렇지 않으면 남아(男兒)라고 예측(豫測)했다. 그리고 태교(胎敎)는 특별한 과정(課程)이 있는 것이 아니고,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태중(胎中) 아기가 장차 잘되기를 염원(念願)하면서 조심하는 것이 태교(胎敎)였다.   8) 임신부(姙娠婦)의 금기(禁忌)   임신부(姙娠婦)에게는 행동(行動)이나 언어(言語)ㆍ음식물(飮食物) 등이 태아(胎兒)에 영향이 미칠 것으로 생각하여 좋지 않다고 알려져 온 것들에 대해서는 관습(慣習)상 금(禁)하는 것이 많이 있다.   밖에서 부정(不淨)한 것을 보거나 듣는 것을 조심하기 위하여 바깥 출입(出入)을 삼가 하고, 친족(親族) 중 덕행(德行)이 있는 부인(婦人)을 자주 만나게 하여 부덕(婦德)을 쌓아 태아(胎兒)에게 좋은 영향을 주게 하였다. 음식물(飮食物)에도 금기(禁忌)하는 것이 많았다. 오리 고기를 먹으면 아기의 손가락 발가락이 오리발 같은 물갈퀴 모양이 된다고 하는 속언(俗言)들이 있다.   9) 출산(出産) 때의 속신(俗信)   임산부(姙産婦)의 순산(順産)을 기원(祈願)하기 위한 여러 가지 속신(俗信)이 있는데, 먹는 것으로는 호박 덩쿨이나 마의 줄기를 삶아 먹거나 낮 거미줄을 걷어 삶아 먹기도 했다. 그리고 방법(方法)으로는 산신할머니 앞에 제수(祭需)를 차려 놓고 비손하여 기원(祈願)을 하며 무당(巫堂)을 불러 푸닥거리도 하고 남편이 북두칠성(北斗七星)을 향하여 땅에 칼을 꽂고 절을 하며 순산(順産)을 빌었다. 또 남편(男便)의 속옷을 임산부의 배 위에 올려놓기도 하고, 인삼을 영험이 있는 약(藥)이라 하여 배 위에 놓기도 했다.   순산(順産) 잘 하는 이웃 부인을 불러 배를 쓰다듬어 주기도 하고 다듬이 돌을 엎어 놓는 등 의학적(醫學的)인 방법(方法)보다는 기구(祈求)하는 방법에 많이 의존(依存)해 왔다. 그리고 출산(出産)을 하면 이웃에 경험(經驗)이 많은 여성 노인(老人)이 와서 아기를 받았고, 친정어머니나 시어머니, 그 밖에 다른 사람이 아기를 받을 때에는 상가 출입(喪家出入)한 사람이나 근래에 짐승을 잡은 사람은 안되고 그 밖에 부정(不淨)한 사람은 산실(産室)에 들어가지 못하며 금기(禁忌)를 엄격(嚴格)히 지켰다. 또 오징어나 문어 같은 것을 먹으면 뼈가 연(軟)한 아기를 낳는다는 옛말이 있고, 쌍둥밤ㆍ쌍달걀을 먹으면 쌍둥이를 낳는다고 했으며, 비둘기고기를 먹으면 남매(男妹) 두 아기 밖에 못 낳는다는 말이 있었으며, 닭고기를 먹으면 아기의 피부(皮膚)가 좋지 않다고 믿어 왔으며, 굽은 오이를 먹으면 곱추아기를 낳는다고 했다. 그 밖에 임신부(姙娠婦)는 궂은 음식이라 하여 상가(喪家)집 음식(飮食)은 먹지 않았다. 그리고 임신부(姙娠婦)는 조그만 미물(微物)이라도 살상(殺傷)을 하지 않으며, 집안의 큰 행사(行事)에 부득이 돼지나 닭을 잡을 때는 집 밖에서 남을 시켜서 잡게 했다 그리고 임신부(姙娠婦)는 남을 미워하거나 악담(惡談)을 하지 않으며 산월(産月)에는 집 수리(修理)나 방의 벽에 못을 박지 말며 안정된 분위기(雰圍氣)를 갖도록 힘썼다. 같은 해에 한 모릿대 밑에 두 번 아기를 낳으면 한 아기는 치인다고 하여 친정이나 이웃집을 빌러 출산(出産)하는 풍속(風俗)이 있었다.   10) 태(胎)에 관한 산속(産俗)   아기가 태어나면 배꼽의 태(胎)를 자를 때 가위 같은 쇠붙이를 쓰지 않고 이빨로 끊거나 죽도(竹刀) 같은 도구(道具)를 썼다고 하는데, 파상풍(破傷風)같은 무서운 병을 의식(意識)한 조상(祖上)들의 지혜(知慧)인 듯하다. 태(胎)를 인간(人間)의 운명(運命)과 관계(關係)가 깊은 것으로 여겨 소홀(疎忽)히 여기지 않았다. 우리 고장 명산(名山)에 세종태실(世宗胎室)과 단종태실(端宗胎室)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왕실(王室)에서도 태(胎)를 소중히 했음을 알 수 있으며 각처(各處)에 태봉(胎峰)이란 산이 있는데 사람들은 태(胎)를 산이나 땅에 많이 묻었다. 태를 묻을 때는 일진(日辰)에 따라 액(厄)이 없는 방향(方向)에 묻는데, 태(胎)가 난치병(難治病)에 약(藥)이 된다는 말이 있어 누가 훔쳐갈 염려 때문에 밤에 은밀한 곳에 묻었다. 그 뒤에는 태(胎)를 소각(燒却)하거나 깨끗한 냇물에 던져 보내기도 했는데, 소태(燒胎)할 때도 산실(産室)에서 가까울수록 다음 잉태(孕胎)가 빠르다는 속신(俗信)이 있어 대문(大門) 안에서 태우기도 하고 대문 밖에서 태우기도 했다. 소태(燒胎)할 때 왕겨를 바닥에 깔고 그 위에 태(胎)를 놓고 다시 왕겨를 덮어 불을 사르는데 당일(當日) 다 타기도 하고 2,3일간 걸리기도 한다. 모두 다 탄 재는 땅에 묻거나 강물에 띄우기도 한다. 해산(解産)을 하고 나면 산모(産母)에게 음식을 주는데 대부분 미역국에 백반을 준비한다. 이것을 “첫국밥”이라 하고 반찬은 간장으로만 하는 풍속이 있다. 산모(産母)는 미역국을 보통 7일간쯤을 먹는데 입이 달면 때마다 한 그릇씩 잘 먹어내고, 싫증을 내는 사람은 이 기간 동안 못 먹어 내는 사람도 있었다. 미역을 사서 준비할 때도 미역단을 꺾지 않고 둥그렇게 말아서 보관(保管)한 것을 끓여 먹인다. 첫국밥에 꺾어진 미역을 사용하면 불길(不吉)하다는 속신(俗信)이 있기 때문이다.   11) 산표(産標)와 산후금기(産後禁忌)   산표(産標)를 금줄이라고 하는데, 보통 짚으로 왼 새끼를 꼬아서 군데군데 고추나 솔가지ㆍ미역ㆍ숯을 꽂는데 남자(男子)아기는 붉은 고추를 달고 여자아기는 솔가지나 숯을 꽂아 금줄을 만들어서 대문(大門)이나 사립문 위에다 가로 걸었다. 금줄을 하는 것은 외부(外部)의 부정(不淨)을 막고 잡귀(雜鬼)를 막는다는 속신(俗信) 때문이므로 사람들은 출입을 삼가 했으며 걸인(乞人)의 동양도 거절했는데 금줄은 보통 세 이레(21일) 동안 걸었다. 자손(子孫)이 귀한 집에서 아이를 낳으면 금줄 표시를 반대로 하여 아들을 낳았는데도 딸을 낳았다고 속이기도 했다. 그렇게 하면 아이의 수명(壽命)이 길어진다는 풍속(風俗) 때문이었다. 산실(産室)에는 산후(産後)구완을 맡은 사람만 출입(出入)하고 잡인(雜人)은 들어오지 못했다. 산후(産後)에는 짠 음식을 금하는데 짠 것은 모유(母乳)에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출산(出産) 초기(初期)에는 흰밥과 미역국만을 먹었고, 닭고기나 계란은 신생아(新生兒) 몸에 종기가 난다고 하여 기(忌)해 왔으며, 산모(産母)의 유량(乳量)이 부족(不足)할 때 돼지 족발을 고아 먹기도 했다 산모(産母)가 조리를 하는 중󰡐바람󰡑이라는 게 있는데 산실(産室)을 차게 하거나 산모(産母)가 찬 공기(空氣)를 쏘이면 바람을 맞았다 하여 산후(産後) 회복(回復) 후 산후풍 등 내내 후유증(後遺症)이 온다고 믿었다. 그리고 산모는 안정(安靜)을 하고 몸을 따뜻하게 하여 산후조리를 잘하면 전에 몸이 약했던 것까지 치유(治癒) 될 수 있다고 한다. 출산(出産) 중에는 새로 못을 박지 못했다. 못 같은 것을 박으면 신생아(新生兒)의 눈이 먼다는 말이 있기 때문이다.   12) 산신(産神)   삼신할머니라고 흔히 부르는데 출산(出産)과 성장(成長)을 주관(主管)하는 신으로 믿었다. 출산(出産)을 하면 삼신상을 차리고 산신(産神)을 모시는데, 흰밥과 미역국 그리고 수저를 놓고 집안 주부가 비손을 하고 혹은 무당(巫堂)을 불러 빌기도 한다.   13) 신생아(新生兒) 목욕(沐浴)   아기는 출생(出生) 즉시 목욕(沐浴)을 시키고 그 후는 매일 또는 격일(隔日)에 한번 시키는데 3일에 한 번 또는 이레에 한 번 시키는 집안도 있었다. 그리고 아기의 손톱은 보통 100일에 깎는 경우가 많았다. 자란 손톱이 얼굴에 상처(傷處)를 낼까봐 옷소매를 길게 하여 손이 소매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했으며, 첫 손톱을 깎을 때는 가위나 칼로 깎지 않고 산모(産母)가 정성을 다 한다는 뜻에서 이로 잘라 주는 풍습이 있었다. 뒤에 가위나 칼로 깎을 때는 집안에서 재주가 뛰어난 사람을 시켜 손톱을 잘라 주었는데, 그렇게 하면 아기가 장차 머리가 명석(明晳)해진다는 속신(俗信) 때문이다. 그리고 자른 손톱은 아무데나 버리거나 태우지 않고 흙에 묻거나 물에 흘려 보냈는데, 첫 손톱을 태우면 아기가 자라서 불효하게 된다는 옛말이 있다. 머리털도 백일에 깎거나 첫돌에 깎았는데, 가위로 깎을 때 다 깎지 않고 한 부분에 몇 개는 남겨 두었다가 뒤에 깎는 풍습(風習)이 있다. 그 이유는 다 깎으면 아이의 수복(壽福)이 줄어든다고 여겨 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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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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