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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3절 문화의 숨결 1. 곤양 백토와 백자(白磁)   조선시대 초기에 분청사기와 함께 소량 제작되던 백자는 15세기 중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고려시대에 백자를 제작하던 전통이 전해지는 한편, 당시 중국 명나라에서 만들어지던 경질백자(硬質白磁)의 영향으로 질과 형태, 장식 등에서 이전과는 구분되는 조선백자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특히, 15세기 후반 왕실(王室)과 관청용(官廳用)의 백자를 전담하여 제작하는 사옹원(司饔院)의 분원(分院)이 경기도 광주(廣州)에 설치되면서 조선 특유의 순백자(純白磁)와 청화백자(靑畵白磁) 등을 생산하는 제작기반이 조성되었다. 경기도 광주(廣州) 우산리(牛山里)와 번천리(樊川里) 등의 가마에서 백자를 제작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6세기 전반에는 백자와 청화백자의 제작이 더욱 활발해졌다. 광주(廣州) 우산리와 번천리 이외에 도마리(道馬里) 등지에서도 중국의 백자, 혹은 금속기와 유사한 형태의 자기가 제작되었으며, 대접과 접시 이외에도 항아리, 병, 잔, 합(盒) 등 다양한 종류가 만들어졌다. 청화백자의 장식 소재로는 매화와 대나무, 소나무와 인물, 용 등이 즐겨 그려졌다. 16세기 후반에도 순백자와 청화백자의 제작은 이전과 같이 지속되었지만, 전에는 거의 볼 수 없었던 철화백자(鐵畵白磁)가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주로 항아리의 그림장식에 사용되었다.   17세기 전반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을 겪으며, 이전과는 다른 제작상황을 보인다. 청화안료(靑畵顔料)를 구하기 어려워 이를 대신한 철화백자가 주로 제작되었으며, 백자의 색깔도 연한 회백색(灰白色)을 보이는 것이 주류를 이룬다. 대접과 접시 등 일상생활용 그릇이 주로 제작되었으며, 그릇의 종류도 이전만큼 다양하지 못하다. 17세기 후반에도 이전의 상황이 지속되었으며, 전국 각지에서는 대부분 질이 다소 좋지 못한 순백자와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그러나 관어용(官御用) 백자를 제작하던 경기도 광주에서는 제작활동이 점차 활발해지며 회백색의 백자를 대신하여 우유빛과 같이 흰색의 백자가 조금씩 만들어지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전반에는 경기도 광주(廣州) 금사리(金沙里) 등의 가마에서 유백색(乳白色)의 질이 좋은 백자가 제작되었다. 백자 달항아리나 굽이 높은 제기(祭器)가 등장하였고, 표면에 육각 혹은 팔각으로 모깎이 장식을 하거나 청화안료로 난초 혹은 대나무를 간략하게 그린 병, 항아리, 접시 등이 집중적으로 제작되었다. 또한 색과 형태 등에서 17세기와는 구분되는 백자가 제작되던 시기였다. 18세기 후반에는, 그 동안 광주(廣州) 내에서 백자제작에 필요한 땔나무를 구하기 위하여 수목(樹木)이 무성한 곳을 찾아 약 10년을 주기로 이동하던 분원이 1752년부터 남종면(南終面)에 정착하였다. 1780년대부터는 분원리가마 특유의 담청백색(淡靑白色)을 보이는 백자가 제작되며, 이후 음각, 양각, 투각(透刻), 상형(象形) 장식이 빈번하게 사용되었으며, 필통, 연적과 같은 문방구(文房具)의 제작도 이루어졌다.   19세기 전반에는 분원리 가마의 제작활동 뿐만 아니라, 순백자와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한 음각, 양각, 투각, 상형장식의 백자가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졌다. 제작이 활발했던 연적의 경우 개구리, 잉어, 복숭아, 금강산, 사각, 팔각 등 갖가지 모양으로 다양화되었으며, 표면에도 민화(民畵)에 사용되던 십장생(十長生), 운룡(雲龍), 운봉(雲鳳), 모란 등의 소재가 즐겨 장식되었다. 19세기 후반에는 전반의 제작 전통이 답습되지만, 1883년 이후 분원이 민영화되어 민간 경영체제로 전환된다. 이후 조선왕실의 몰락으로 왕실 백자의 제작 전통이 사라지고, 일본에서 제작된 왜사기(倭沙器)의 유입으로 경쟁력을 잃은 분원이 마침내 제작 활동을 중단하게 된다. 또한 각지에서 제작되던 투박한 조선백자 역시 왜사기의 영향으로 변화되거나 사라지며, 조선왕조 500년의 제작 전통은 단절의 위기를 맞게 된다.   백자의 제작에 사용된 백토는, 조선시대 초기의 산출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16세기인 1530년(中宗 25) <중종실록(中宗實錄)>에는\"백점토(白粘土)는 이전에 사현(沙峴)이나 충청도에서 가져다 썼지만 지금은 양근(楊根)에서 파다 쓴다\"고 적고 있으며, 17세기 후반에서 18세기 초에는 양구(楊口), 봉산(鳳山), 진주(晋州), 선천(宣川), 충주(忠州), 경주(慶州), 하동(河東), 곤양(昆陽) 등지에서 상황에 따라 채취했음이『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된다. 또한 18세기 중반의 기록인『속대전(續大典)』공전(工典) 잡령조(雜令條)에는,\"사옹원 번조사기의 원료로는 광주(廣州), 양구, 진주(晋州), 곤양(昆陽) 등지의 백토가 가장 적합하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심금숙,김경숙, 도자기기행-도자기 문화를 찾아서2, 한겨레신문사 문화센터, Copyright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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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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