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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문달사지(대밭 속)

7. 사지(寺址)   1) 문달사지(文達寺址)   곤양읍지에는 문달사는 제방산록(諸方山麓)에 있다고 하였으나, 건립 및 상존 년한과 규모는 나타나 있지 않다.   문달사지는 명당이라 전해지는 흥사리 최북단 곽가등 아래 제방에서 뻗어내려 온 산줄기에 흥사 도로에서 실개천을 따라 1㎞정도 떨어진 대밭 속에 주춧돌로 추측되는 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고 기왓장 조각들이 발견되고 있으며 주변은 완전 대숲으로 덮여 있다.   확실한 기록(건립년대, 규모) 등은 찾을 수 없으나 곤양읍지(1832발행)에 절은 영악사와 문달사가 있다고 기록되고 있고 문달사지에서 2㎞정도 떨어진 곳에 매향비(매향비란 참조)가 있고, 매향비 내용 중 이 매향 행사를 추진한 달공(達空)은 문달사 주지인 것으로 생각할 때, 이 절은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당시 매향 행사에 4,100명이 참가한 규모는 큰 사찰에 속하였으며 이 주변에는 불당골(佛堂谷) 사립골(寺入谷)이란 지명이 있고 바로 인근 선들재에도 절터가 있으며 기와파편들이 지금도 발견되는 것들이 절의 규모를 상상하게 한다. 그러나 이 절이 폐사된 기록은 없으며 구전(口傳)에 의하면 곤양향교를 정동에서 현 위치로 이동시킬 때(서기 1808년) 그 곳에 있는 묘를 문달사 절의 뒷산에 이장한 후부터 절이 폐허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며 그 당시는 이 절 앞 현재의 곽가등 절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한다.   2) 탑동석탑   지금 진양호 방수로가 흐르는 가화리 탑동(탑골) 서쪽의 논 가운데에 6층 석탑이 있었으나 현재는 없다. 이곳은 흥사리 문달사지와는 고개 하나를 두고 1㎞이내 지역으로 가화리는 가불개 가화라고 했고, 이 탑이 있는 골짜기를 탑골이라 했다. 이웃 산록의 대밭에서는 부처의 일부분이 발견되었는데 전문가의 감정에 의하면 고려 말 불상으로 추정되니, 문달사와 같은 시대에 절이나 암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3) 대곡사지(大谷寺址)   ◦소재지 : 곤양면 무고리 산78번지   ※ 무고리(舞鼓里) 한재골(韓在谷) 안의 탑(塔)골에는 옛날부터 절이 있었다고 전하여 왔는데, 구전(口傳)만으로 전하여 오던 이 절이 산주인 김기태(金基泰)가 소장하고 있던 민유산(民有山) 매매계약서(賣買契約書)에 의하여 고증되었다.   민유산(대곡사) 매매계약서   이 고증에 의하면 1910년 5월 26일자(隆熙 4年) 곤양군수(昆陽郡守) 김선재(金善在)가 발행한 민유산 산야 약도(略圖)에 기재된 바에 의하면 사찰명은 대곡사(大谷寺)라고 한다. 그리고 이 대곡사 산의 봉우리를 감투봉(장군이 관과 투구를 벗어 놓는 곳)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민유산(대곡사) 매매계약서

  이 대곡사(무고리 산78번지)의 절터에는 지금도 탑골해(塔骨骸) 및 괘불(卦佛)을 세웠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이 대곡사의 창건과 폐사된 원인 및 그 연대를 알 수가 없는 것이 아쉽기만 하다(사진 참조). 그러나 현재 대곡사(大谷寺)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 이 곳을 발굴하면 상당한 유물들이 나올 것으로 추정되며, 또한 이 유물의 고증(考證)을 거치면 대곡사의 유래에 관한 것들을 많이 알 수 있을 것으로 본다.   4) 목단의 사지(寺址)   사입골 사지(寺入谷 寺址)의 위치(位置)는 묵곡리(黙谷里) 산(山)201-1번지이며 소유주는 묵곡리 손을용(孫乙龍)이다. 이절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으며 당시 이 절은 조그마한 절인데도 불구하고 매일 수백명의 불도(佛徒)가 운집하여 주지가 고민 중에 있는데 마침 도사(道師)의 래방(來訪)이 있어 사연을 여쭈니 도사(道師)의 말인즉 절의 동북부(東北部)에는 아래 질매재와 윗 질매재가 있는데 아래 질매재를 돋우면 손님이 줄어든다고 하자. 많은 인부를 들여 목을 북돋운 이후로는 불도가 줄어들고 절에는 온통 빈대가 들끓어 일시에 절이 망하게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그 이후 근래에 와서(1970년대) 남문외리 거주 김민수(金玟洙:곤양 옥곡)는 이 사연을 듣고 백방으로 수소문한 결과 아랫 질매를 원상 복구하여 절을 재 창건하면 절도 옛날과 같이 흥하고 목단 마을도 발전된다는 이야기를 듣고 지주(地主) 손을용(孫乙龍)를 만나 아랫 질매 등을 낮추기를 합의하고 장정 5명을 채용하고 먹거리도 준비하여 종일작업(終日作業)으로 길이 8m, 폭 3m로 좁혔는데 그 이후 김민수의 별세로 인하여 계획대로 절을 복원 못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이 있던 골짜기를 사입곡(寺入谷)이라 칭하고 절의 복원을 몇 번 시도하였으나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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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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