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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2절 역사유적 1. 다솔사(多率寺)   방장산(方丈山) 다솔사(多率寺)는 경상남도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방장산(方丈山) 동남쪽 기슭에 있는 사찰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4교구 본사인 범어사(梵魚寺)의 말사이다.   이 절은 옛날 행정 구역상으로 곤양군에 속해 있었으므로 흔히 곤양 다솔사로 부르고 있으나 실제로는 곤명면에 속한다. 다솔사는 주산인 봉명산(일명 방장산) 기슭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춘일암(春日庵)ㆍ보안암(寶安庵)ㆍ서봉암(棲鳳庵) 등이 있다. 다솔사의 연혁은 1704년(조선 숙종 30년)에 절 경내 아래쪽 넓은 평지에 세워진 조선국 경상우도 곤양군 북지리산 영악사 중건비(北智異山 靈岳寺 重建碑)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외에 1761년(조선 영조 37년) 기록된 다솔사 명부전ㆍ대양루ㆍ사왕문의 중건기와 1779년(조선 정조 3년)에 기록된 ‘다솔사 팔상전 중수기’등 두 기록이 참고가 되고 있다. 그런데 채팽운이 지은 영악산 중건비에 나타난 임진란 이전의 기록은 매우 간략하고 애매한 부분이 있으나 이를 기준하지 않을 수 없다.   영악산 중건비에 나타난 다솔사 연혁은 신라 지증왕 4년(503년 일부자료에는 다솔사의 창건을 신라 지증왕 12년인 511년에 창건하였다고 하는데 이는 어느 자료에 근거 했는지는 알 수 없다)에 연기조사(일설 영악대사가 창건)가 창건하여 영악사라 하였고, 그 후 선덕여왕 5년(636) 자장율사가 건물 2동을 신축하고 다솔사로 개칭하였다 한다. 의상대사가 문무왕 16년(676)에 세 번째 중수하고 절 이름을 영봉사라 고쳤는데,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네 번째로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영악사로 다시 고치고 그 뒤(1326년 고려 충숙왕 13년) 나옹화상이 중수하였고, 고려 말 공민왕 때(1352~1374)에 왕사 보제존자 혜근이 다시 중수하였다. 조선 초기에 영일ㆍ효익 등이 중수하였으며, 임진왜란의 전화로 완전 소실되어 폐허가 되었던 것을 10년이 지난 후인 숙종 12년(1686)에 승려들이 힘을 모아 10년 세월에 걸쳐 중창불사로 크게 중흥했다. 그러나 영조 24년(1748)에 큰 불로 말미암아 불행히도 큰 재앙을 겪었으며 같은 왕 34년(1758)에 여러 승려가 또 합심하여 명부전과 대양루 그리고 사왕문을 중건했다.   연기조사는 544년 구례화엄사를 창건하였는데 이보다 41년 전에 다솔사를 창건하였다. 그가 방장산에서 토굴 수도 하였다는 전설이 소년기에 있었음을 추정하게 한다. 다솔사의 절 이름이 절을 중수할 때마다 바뀐 것은 신라 시대의 사찰 대부분이 고승의 이름을 창건주로 하여 유래와 그 전통을 높이려는 뜻에서 자주 개칭된 것으로 해석된다. 1704년 이전의 기록에는 영악사로 나타나는데 1758년부터는 일관되게 다솔사로 나타난다. 절 이름인 “다솔”에 대해서는 이 절에 소나무가 많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지만 주산이 마치 대장군이 앉아 있는 듯하기에 거느린다는 뜻에서 다솔이라 붙여졌다고 한다.   다솔사 입구에는 계곡수를 담은 저수지가 막혀있고, 계곡의 편편한 지대에는 소나무의 집단지로서 거목의 적송이 하늘 높이 밀림을 이루고 있는 가운데 간간히 전나무 군사를 이루고 있다. 사찰 입구에서부터 울창한 수목이 자연의 힘찬 기상을 자랑하는 듯 서있고, 절 입구로 들어서면 봉명산이 우뚝 높이 힘차게 서 있고, 주변의 산맥이 두 팔을 넓게 벌리듯 사찰을 품고 있다. 울창한 대나무가 사찰 주변을 감싸고 있고, 절 앞의 넓은 광장 주변에는 전나무가 줄을 서 있다. 주산인 봉명산의 웅대한 위용과 계곡의 수목은 천년 고찰 다솔사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사찰입구 큰 바위에 “어금혈봉(御禁穴封)”가 크게 음각되어 있고, 광서 11년 을유 9월이라고 뚜렷하게 새겨져 있는데 이는 고종 22년(1885) 승려 정모ㆍ정암ㆍ해명ㆍ응월이 직소하자 고종께서 어명으로 금지시킨 것이라 한다.   우거진 녹음을 지나 경내로 들어서면 대양루와 첫 인사를 하게 된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는 1749년 조선 영조 25년에 건립되어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는 맞배집이다. 정면 5칸ㆍ측면 4칸 전체 건물 길이 13m에 이르며 건평 106평의 큰 건물로 육중하면서도 고졸한 맛이 있다. 대양루로 올라가는 계단 앞 한켠에는 숙종 30년(1704)에 세운 다솔사 중건비가 서 있다.   거북이 몸통같이 생긴 자연석 위에 영악사 중건비라는 비명이 새겨져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적멸보궁을 중심으로 바로 마당 골에 경상남도 유형문화제 제83호로 지정된 대양루가 있고, 뒤쪽에는 응진전ㆍ극락전ㆍ요서거 등이 서 있으며 오른편에는 승방과 종무소 등 10동의 건물이 있다. 건물 대부분은 1914년 화재로 소실된 것을 재건한 것들이다.   1914년 12월 7일 다솔사에 뜻하지 않은 화재가 발생하여 모든 전각이 불탔으나 다행히도 대양루는 소실되지 않았으며, 3년간 각고의 중건 노력 끝에 1916년 대웅전ㆍ나한전ㆍ명부전을 비롯한 선당ㆍ승당이 중건되었다. 이 때 대양루 위에는 추사 김정희의 휘호인 유천희해(游天戱海)라는 현판이 걸려있었으나 지금은 그 행방을 알 수가 없다. 서기 1933년 최범술ㆍ한용운ㆍ김범부ㆍ김법린 등 독립지사는 만당결사본부를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서울에서 다솔사로 옮겼는데, 이 무렵 독립운동자금 조달기관인 백상상회의 연락처가 다솔사였다고 한다.   다솔사에 관련된 주요문화재로는 대양루ㆍ극락전ㆍ응진전ㆍ보안암 석굴이 있다.   주 : 다솔사는 곤명면에 위치하고 있으나 곤양과는 여러 인연이 있어 간단히 기록한다.   1) 다솔사 대양루(多率寺 大陽樓)   ◦유형문화재 제83호(1974. 2. 12 지정)   ◦면 적 : 1,292㎡   ◦소재지 : 사천시 곤명면 용산리 산86번지   ◦수 량 : 1동(108평)   ◦구 조 : 정면 5칸, 측면 4칸, 목조와가 2층 맞배지붕      대양루(大陽樓)는 다솔사의 현존 건물 가운데 가장 오래된 누각(樓閣)으로서 조선 영조 34년(1758)에 중건된 건물이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 대개의 사찰이 그러했듯이 다솔사도 병화(兵火)로 인하여 완전 전소되어 그대로 방치되어 오다가 95년이 지난 후 숙종 12년(1686)에 승려 신양자(神陽子)ㆍ사연(思衍)과 주지 자청(自淸) 등이 힘을 모아 10년 동안 중창불사(重創佛事)를 하여 당(堂) 3개, 각(閣) 6개, 요(療) 3개 등 다시 제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재건된 다솔사는 62년 뒤인 영조 24년(1748) 야밤에 실화로 인하여 거의 모든 전각이 다시 전소되었다. 이로부터 10년 후인 영조 34년에 승려 월징(越徵)ㆍ일진(一眞)ㆍ일휘(日輝) 등이 힘을 모아 명부전(冥府殿)과 대양루사왕문(大陽樓四王門)을 중건하였다. 결국 대양루의 창건은 1758년이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인 1914년 12월 7일 다시 다솔사는 실화로 인하여 모든 전각이 전소되었으며, 이때 유독 대양루만이 전소되지 않고 그 화(禍)를 면했다.   그 후 8ㆍ15 광복이 될 때까지 주지는 최범술(崔凡述 : 초대 제헌국회의원)이었다.   (주) 소재지는 곤명면 용산리이나 곤양군 시절부터 곤양과 인연이 많은 사찰로 간기(簡記)한다.   2) 朝鮮國慶尙右道 昆陽郡北 智異山 靈岳寺 重建碑   (1) 비문   朝鮮國慶尙右道 昆陽郡北 智異山 靈岳寺 重建碑   宣務郞 前郡守 司諫院正言 知製敎 蔡彭㣧 撰   嘉善大夫咸鏡道觀察使 兼 兵馬水軍節度使   巡察使 咸興府尹 李震休 書   嘉善大夫原任 司憲府大司憲   權珪 篆

영악사 중건비

昆明南極于海其鎭曰智異山波奔雲矗綿旦二道九郡數百里直昆之北其峯曰鳳鳴繇鳳日庵折而南可二里所右顧靑鶴臺循湧井而東石門峭崇於人三之相傳崔文昌與智英能敏二釋子盤旋而樂之者也寺之實自梁天監二年新羅智證王癸未始始名曰靈嶽而再新於慈藏法師而爲陀率卽唐貞觀之十年善德王丙申也三新於圓敎大師義相而爲靈鳳卽儀鳳之元文武王丙子也四新於了空大師道詵復爲今名卽咸通乾符之際而景文憲康之間也胡元之季麗恭愍王師普濟尊者惠勤增而大之是爲五傳越我壬辰之縕火其半 聖上之十年季丙寅神陽子靈日昆峯子惠能思行住持自淸四道人以南宗之秀擁錫而來顧而歎曰此非靈聖之區耶起我初祖浮海之世浸更浸續百四十年而有慈藏四十年而有圓敎二百年而有了空四百年而有普濟二百年而火火且今百六十有五年矣其獨無有乎於是合志同願廣集諸檀凡歷十寒暑而大功以完盖爲殿三爲堂六閣三寮一廊以夾其門二摠而門之曰增山溢谷悉復舊觀其剗除修廊之功不啻如側金開山者矣嘗覽 古記慈藏之入於中國也見文殊化身於終南之雲際寺卽以信貝付之曰三韓日尋干戈旄俾塡壑非佛之靈不濟必南湫壇而毒龍伏然後其災已矣及了空之西學於一行也行取山水圖經指示曰東方之地勢固戰場也譬人病切脈鑱石之可也時則遍國中而爲伽籃之所者三千五百而是寺也與通度華嚴溪先起此裨補之術之所由興也則無論已智異天下之神山也四大師山門之祖宗也參최치원(崔致遠) 선생과 지영(知英) 능민(能敏) 두 고승(高僧)이 노닐었다고 전하는 다솔사 석문(石門)

최치원(崔致遠) 선생과 지영(知英) 능민(能敏) 두고승(高僧)이 노닐었다고 전하는 다솔사 석문(石門)

綠蓄靈而殘鐵不圖若四道人者豈 不誠法胤之堂搆哉況四大師之時費皆出縣官王人董之今四道人後以誓心苦行積銖寸之微而成之是友難也神陽子旣新其寺則擧墜弛 之戒律興禪誦之遺風三道人輿羽翼焉爬梳而濯刷 之幾盡已桂坡大師性能讚次本末以四道人聲謁余文余賞爲能以文相丈六殿之後矣感其從事善勝不怠且嘉四道人之功遂爲銘曰頭流造天南海之堧浮屠宮焉羅絡厥巓 我究開緣靈嶽實先惟慈惟圓勤後詵前慧緖綿綿千二百年城隍交嬗環 海兵纏 金地揚烟乃夷乃騫懿厥老禪聿來聯翩載眷周旋載䟽載觸 列欒䕺祿鬱虹鮮福含復 全遐軌其騈 壙世此肩如朝暮然心心相傳勝業是延劫火수 燃智燈長懸 康熙四十三年甲申九月立 行郡守通政大夫 黃奎 조선국 경상우도 곤양군북 지리산 영악사 중건비 조선국 경상우도 곤양군북 지리산 영악사 중건비 선무랑 전군수 사간원정언 지제교 채팽윤 찬 가선대부 함경도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 순찰사 함흥부윤 이진후 서 가선대부원임 사헌부 대사헌 권규 새김 다솔사 중건비   곤명 남쪽에 바다를 이은 곳에 그 진 좌한 산은 지리산이라 산 봉은 우리들이 파랑을 이룬 듯 하고 구름 속에 우뚝 솟아 있는 듯한데 경상도와 전라도 아홉 고을 수 백리를 뻗쳐 있다. 곤명의 북쪽으로 그 봉우리를 봉명이라 하는데 봉일암으로 2리를 더 가서 오른쪽으로 돌아보면 청학대와 순용정이 있고 동쪽으로 석문이 있는데 사람보다 높고 세 개가 서로 보고 있는 형상이라 전하는 말로는 최치원과 지영과 능민 두 스님이 즐기던 곳이라 했다. 다솔사의 유래는 양나라 천감 2년 신라 지증왕 계미년에 처음 영악사라고 했다.   두 번째 당 정관 10년 선덕왕 병신년 자장율사가 중창하여 타솔사라 했다. 세 번째 원교대사 의상이 새롭게 중창하여 영봉사라 했다. 네 번째 요공대사 도선이 중창하여 다시 영악사라 했는데 이 때는 함통과 건부의 때로서 신라 경문왕과 헌강왕의 사이였다.   다섯 번째는 고려 공민왕의 왕사이신 보제존자 해근이 사찰을 크게 중창하여 대 가람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후에 왜구의 침략으로 그 반이 화재로 소실됨이라 숙종 12년 병인에 신 양자 영일과 곤봉자 혜능사연 주지 자청 등이 당세에서 수승한 도인들이라 석장고를 안고서 이곳을 돌아보고는 아하 참으로 신령스러운 땅이로구나?   이 사찰은 초조 달마대사가 동토를 건너 올 무렵 개산하여 이어오다가 140년 후에 자장율사가 주석 하시고 40년 후에 의상대사가 주석했고 200년 후에 국사가 주석했고 400년 후에 보제존자 혜근이 주석했고, 200년 후에 실화 화재로 또한 165년 세월이라 원래 존재하였던 것이 홀로 없어서야 되겠는가? 그래서 뜻을 합하여 서원을 같이하여 널리 시주를 모아서 10년만에 중창함이라 전 3개 당 6개 각 3개 요사 1개 그 사이에 두 문이 있는데 천왕문과 증산문이라 했다. 계곡이 넘치도록 옛날과 같이 복원했음이라 그 복원한 공덕은 처음 창건한 공덕과 같다고 할 수 있도다. \"옛 기록을 보면 자장율사가 중국에 들어가서 문수보살 화신을 종남산 운 제사에서 만났는데 신물을 자장율사에게 부착하면서 말하기를 삼한(우리나라)땅은 본래 전쟁이 끊어지지 아니하는 곳이라 시체가 골짜기를 매움이라는 이는 부처님의 영험이 아니면 구제하지 못함이라. 반드시 남추단에 독용을 항복시킨 뒤에야 그 재앙이 끝남이라\"   또한 요공대사 도선이 중국의 일행선사에게 수학했는데 일행선사가 우리의 산수도경(지도)를 가지고 와서 말하기를 너희 나라는 지세가 본디가 전쟁터라 비유하자면 병이 있으면 그 혈처 에다가 침으로 다스려서 병을 낳게 하듯이 너희나라는 제세는 기, 혈이 고르지 못한 곳이다. 때로는 산세가 끊어진듯하고 혹은 갑자기 솟았다 사라지는 가파른 형국이 많음이라 마치 기, 혈이 고르지 못함 사람과 같도다. 그 혈의 요소 요소마다 사찰을 건립하여야만 국토가 평안하게 되어서 국운을 도움이라. 이것이 곧 산천 비보 술에 의한 것이라 지리산의 천하의 신령스런 산임을 말할 필요조차 없거늘 어찌 4도인이 우리 산문의 조종이 신데 폐허된 사찰을 복원하지 않겠는가?   그 당시에는 관리 등 세력가의 사람들에게 능히 시주를 받을 수 있었으나 4도인은 다만 마음으로 서약하기를 고행을 하여 작은 돈을 모아서 많은 이들에게 인연을 맺게 해서 중창을 한 것이니 어찌 어렵지 아니 했겠는가. 신 양자가 이 절을 새롭게 중창한 즉 땅에 떨어졌던 계율이 일어나고 선문의 유풍을 다시 세우게 됨이라 나머지 3도인은 익조 함이라 계파대사 성능이 4도인을 아름다운 이야기를 장육전에 쓴 젓이 있는데 내가 그 글을 보고 이일에 종사한 것이 참으로 아름다움을 느껴서 게으르지 못하고 명하여 가로되 두류산(지리산)은 하늘이 만듦이라 남해의 울이 됨이라 부처님의 보당이라, 그 산의 으뜸이 됨이라 내가 이 사찰이 개산한 인연을 궁구하니 영악사가 먼저요 그 다음이 자장율사요 다음은 도선과 혜근 조나 이라 지혜광명이 면면이 1200년이 계속됨이라 이 아름다운 구토를 왜구의 침략으로 병화를 드날림이라.   아하 노승이 부지런히 왔다갔다 하면서 주변을 빠짐없이 돌아보고 깨끗이 하여 석가여래를 세우고 부연을 걸고 단청을 새롭게 하여 보배로운 궁전을 장엄함이라 이것을 광세 비견하면은 아침이슬과 저녁 연기가 같음이라 마음으로 수승한 업을 늘리고 때로는 겁화가 있으나 지혜의 등불로 길게 이어가는 도다.   강희 4십 3년 갑신 9월에 입 행군수 통정대부 황 규3)   서기 1704년   3) 서봉사기   조선 효종 8년(1657)에 고성현령 최응천이 지은 서봉사기에는 곤양군 서봉사는 신라 눌지왕 때에 묵호자의 문인이 기틀을 마련하고 진평왕 때 운집대사(雲集大師)가 문무왕 때 의명대사(義明大師)가 갈마 드려 수보(修補)했다. 그 후 세종 1421년에 도판양종(都判兩宗) 수좌각의(首座覺義)가 이 절에 와서 여러 대중의 힘을 모아 옛 모습대로 크게 복원하여 다섯 번을 고쳐 오래도록 화려하게 장식하였으나 불행히도 임란의 7년 병화로 하루아침에 소실(燒失)되어 승려들은 별같이 흩어지고 돌길엔 푸른 이끼가 끼여 옛터를 분별하기 어려웠다. 만력갑인(萬曆甲寅:1614년 광해군)에 운수납자(雲水衲子) 의현대사(義玄大師)가 황폐한 터를 애석히 여겨 거칠고 더러운 것을 정리하고 옛 우물과 주춧돌을 찾아 점차로 중창하여 경전을 간행하였고 이어서 일잠(一岑)과 경희(敬熙) 두 스님이 계속 발원하여 대불전을 먼저 보다 더 화려하게 꾸미고 동서선실을 넓고 시원하게 옛 자취를 따라 검소하게 지었으며 남쪽에 누각을 지어 편액을 봉황(鳳凰)이라하고 동쪽 산의 바위를 봉명(鳳鳴)이라 하였다. 누각 남쪽에 있는 산을 학유봉(鶴遊峯)이라 하고 그 아래에 있는 절을 영악(靈嶽 : 옛 다솔사의 이름)이라 하였다. 서남쪽에는 미륵봉(彌勒峯)이 있고 그 안에는 장육불상이 있다.   곤양읍성지 비


  3)황규군수 : 숙종 30년(서기 1704년)부터 32년(1706년)까지 곤양군수로 재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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