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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1. 매향비   ◦보 물 : 제614호(1978.3.8 지정)   ◦소 재 지 : 흥사리 산48번지   ◦건립년도 : 고려말 우왕 13년(1387)   1978년 3월 8일, 보물 제614호로 지정된 흥사리 매향비는 곤양면 흥사리 산48번지에 있다. 이 매향비는 높이 160cm 가로 및 두께는 각 120cm의 흑운모화강암(黑雲母花崗巖) 자연석으로 되어 있으며, 이 돌의 전면(全面)에 자경(字經) 5cm 내외의 전자체(篆字體) 문자가 세로 15행 모두 204자로 음각(陰刻)되어 있다. 비문의 글자는 오랜 풍우로 많이 마멸되어 있고, 204글자 중 글자 한 자는 아쉽게도 판독이 불가능하지만, 매향비의 전문을 해석하는 데는 큰 지장이 없다. 마모된 글자의 위치는 다음에 소개한 비의 전문에서 ○으로 표시된 부분이다.   매향비는 주로 억압당하고 고통 받는 피지배층의 백성들이 현실의 고통과 괴로움을 잊고자 초월적 신앙대상자를 앙망하며 주로 미륵신앙의 바탕위에서 내세의 복된 삶을 간절하게 꿈꾸고 염원하는 마음의 발현으로 세워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향(香)은 신에게 바치는 공물(供物) 중에서 가장 으뜸으로 여겨지고, 대부분 불태워져서 하늘의 신명을 청배(請拜)하는 습속으로 활용되어지고 있지만, 매향(埋香) 또는 침향(沈香)은 향을 태우지 않고, 청정한 곳을 가려서 향나무를 묻고 천지신명에게 발원하는 의식(儀式)으로 분명히 분향(焚香)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렇게 묻은 향나무를 침향목(沈香木)이라 하는데, 침향목은 태워도 그을음이 없고, 강철처럼 단단하게 되어 두드리면 쇠소리가 나며, 심기ㆍ울체를 소통케 하는 한약재로서 영약(靈藥)으로 여겨지며, 신성한 효험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 매향비에는 매향의 목적ㆍ시기ㆍ장소ㆍ관련된 사람이나 집단이 기록되어 있으며, 주로 간절하게 원하는 바(大願)가 반드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구(祈求)하는 내용들이 들어 있다. 이 매향의식은 민간불교의식의 한 갈래로 인식되어 전해지고 있다.   매향비를 설치하는 장소는 대개 바닷물(海水)과 계곡물(溪谷水)이 만나는 지점인데, 흥사리 매향비의 위치로 보아 옛날에는 이곳까지 바닷물이 유입되었을 것으로 보여진다. 흥사리 매향비가 설치되어 있는 상류지역에는 문달사지(文達寺址)가 남아 있고, 흥사의 첫 마을이 단숙인데 세속과의 인연을 끊는다는 의미를 가진 단속(斷俗)과 같은 어원으로도 생각하며, 인근에 유명한 다솔사가 위치하여 있는 점을 미루어 볼 때 이 지역에서 매향의 불교 풍속이 자연스럽게 거행될 수 있었으리라 추정된다.   흥사리 매향비는 고려 말 우왕(禑王) 13년(1387)에 세운 것으로, 고려 말 당시 왜구의 횡포가 극심하고, 나라의 운명마저 위태롭게 되자 생존의 위기를 느끼면서 불안하게 살아가던 불자들과 지역주민 4,100명이 승려와 함께 향계(香契)를 맺고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에는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살기 평안함을 미륵보살(彌勒菩薩)께 비옵니다”라는 뜻의 204자의 글이 새겨져 있다.   비문에 새겨진 글자의 배열과 그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행. 千人結契埋香願王文   2행. 夫欲求无上妙果必須行願相扶有行无願其行必/   3행. 孤有願无行其願虛設行孤則果喪願虛則福劣二業/   4행. 双運方得助○妙果貧道與諸千人同發大願埋/   5행. 沉香木以待 慈氏下生龍華三㞧持此香達/   6행. 奉獻供養弥勒如來聞淸淨法悟无生忍/   7행. 成不退地願同發人盡生內院訂不退地慈氏如/   8행. 來見爲我訂預生此國預在礿㞧聞怯悟/   9행. 道一切具足成其正覺/   10행. 主上殿下萬萬歲國泰民安/達空/   11행. 洪武廿年丁卯八月廿八日埋/刻 金用/   12행. 優婆塞優婆夷此丘此尼/ 書 守安/   13행. 大化主覺禪/   14행. 都計四千一百人 個中/   15행. 宝上

  천인결계 매향 원왕문   무릇 더할 나위 없는 좋은 결과(无上妙果)를 바란다(欲)고 한다면, 간절하게 원하는 것(願)과 행동하는 것(行)이 반드시 서로 일치되어야(相扶) 비로소 가능하게 됩니다. 만약 간절하게 바라는 바도 없이 행동만 하게 된다면 그 행동은 아무런 호응도 없는 외로운 행동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만약 아무런 행동도 없이 간절히 바라기만 한다면 그러한 소원과 바램 역시 허망하게 끝나버리고 말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호응하여 주지 않는 고독한 행동은 죽은 결과로 나타날 수밖에 없고, 허망하게 비는 소원은 결과적으로 그 복이 빈껍데기에 불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첫째 간절하게 원하는 것과 더불어, 둘째 많은 이들이 호응하는 행동의 움직임, 이 두 개의 기운이 함께 해야 (双運方得助) 드디어 원하는 것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결과(妙果)를 가져올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소승은 이러한 까닭에 수많은 사람들(千人)과 더불어 침향목(沉香木)을 묻으면서 먼저 커다란 소원(大願)을 발하고자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미륵여래님이 이 세상 낮은 곳으로 내려와(慈氏下生) 아름다운 이상세계를 이루신다는 용화법회를 세 번이나 개최하였고, 지금 그러한 세계를 간절하게 기다리면서 이 향을 묻어 미륵여래님에게 봉헌하여 공양하고자 합니다. 미륵여래님의 청정한 진리의 말씀(法)을 듣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겪는 이 인생의 인고(忍苦)가 아무 것도 아닌 것임을 깨달아, 아무리 괴롭고 고통스럽더라도 아무도 이 땅에서 물러서지 않고, 이 땅을 지켜 나갈 것임을 모든 사람들이 뜻을 합하여 대동발원(大同發源)합니다. 모든 이들이 저마다의 목숨(生)을 다하여 도솔천 내원궁에 왕생할 것을 발원하며, 이 땅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임을 당신께서 보시고, 우리들을 위하여 이 땅에 나시어서, 이 약회(禴會)위에 계시면서 당신의 진리를 듣고 깨닫게 하고 계십니다. 모든 사람들이 바르게 깨닫도록 하고 계십니다.   무궁하도록 임금님의 만세와 나라의 태평성대, 그리고 백성의 편안함을 비옵니다.   고려 우왕 13년(1387) 정묘 8월 28일에 묻다.   글 지은이 달공1) , 글 쓴이 수안, 글 판이 김용   기혼 미혼 남녀 불자 도합 4,100인 대표 대화주 각선   천지신명(寶-불,법,승)전에 올림   이 매향비를 흥사리 사람들은 “상무러기”ㆍ“상무데미”ㆍ“상구데미” 등으로 불렀는데, 상은 향(香)의 경상도식 발음이고, 무러기ㆍ무데미ㆍ구데미는 묻다ㆍ묻은 곳의 경상도식 발음이다.   이렇게 불려졌던 흥사리의 매향비가 국가보물로 지정되기 까지에는 이름 없는 향토지인(鄕土志人) 정재화2)의 헌신적인 노력과 그의 아들 정용대의 적극적인 활동이 있었다. 600여년 간 신비함만을 간직한 채 사람들의 무관심 속에 있다가, 1970년대 개발의 시기에 수해복구공사에 사용될 석재로써 이 매향비의 자연석이 주민들에 의해 일부 깨뜨려져 윗부분이 다소 파손 되었으며 계속하여 깨뜨리려는 것을 김점수(金占秀)의 적극적인 만류로 중지시켰다. 정재화는 이후 요철(凹凸)이 심한 자연석에 새겨져 오랜 세월동안 풍화된 글자를 어렵게 찾아내어 지극한 정성으로 탁본하고, 이를 해독하기 위하여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 매향비의 중요성을 지역 주민들 및 학계에 적극적으로 알리는 등 정재화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흥사리 매향비의 존재는 이 세상에 드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600여 년 전 매향비를 묻은 옛사람들의 염원과 오늘날 정재화의 이러한 노력이 시대를 초월하여 연결되어(相扶), 바야흐로 1977년 6월 동아대학교 강용권(康龍權) 교수와 동대학 박물관 김동호(金東豪) 관장의 학술조사가 있게 되었고, 그 결과로 매향석각비(埋香石刻碑)로서는 국내에서 하나밖에 없는 불교사 및 귀중한 금석문 사료로 밝혀져 국가보물로 지정되어지게 되면서 비각을 세우고 주변을 정화하여 영구보존토록 시설을 갖추게 되었고 역사를 연구하는 많은 학생과 사학자들이 답사하고 있다.


 1)고려 말의 선승(禪僧). 호는 본적(本寂). 중국을 거쳐 고려에 들어온 인도승 지공(指空)을 스승으로 섬겼고, 그 뒤 일정한 거처 없이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고행수도한 지 10여 년 만에 평소에 의심을 품고 있던 선(禪)의 공안(公案)에 관하여 용문(龍門)의 장공(藏公)과 더불어 논의하였다. 또 10년만에 깨달음의 경지를 나옹(懶翁)에게 전하여 그 경지를 인가받았다.(자료:야후 백과사전)   2)정재화(鄭再和) : 1929-1986, 호는 해동초부(海東樵夫), 향토사학자. 애향심이 돈독하여 1978년 부전가요 ‘영남가(嶺南歌)’를 학계에 드러내는 것을 시작으로 ‘곤양산수가(昆陽山水歌)’ㆍ‘사천가(泗川歌)’ 등을 작사하여 지역주민들의 애향심을 높이는데 정열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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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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