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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환덕마을 회관

8. 환덕리(還德里)   곤양에서 사천으로 지방도 1002호선으로 가면 면소재지로부터 6km 지점에서 도로 남쪽으로 위치하며, 남으로는 사천해와 북으로는 묵곡리와 경계로 한다.   조선시대에는 곤양군 가리면의 지역으로 환덕이라 했는데, 1914년 본촌동을 병합하여 환덕리라 해서 곤양면에 속하였으며 환덕ㆍ본촌ㆍ고동포 3개 마을로 되어있다.   3개 마을의 주산이며 가장 높은 산은 물불이산으로 해발 130m 이며 가뭄에는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이 산 주봉에서 동으로 뻗은 능선 밑에 환덕 마을이 있으며 입구에는 바위에 음각으로 조씨동이라고 쓰여 있어서 함안 조씨 집성촌임을 말해준다.   마을 앞에는 저수지가 푸른 물을 담고 있고, 회관 앞에는 주차선이 그어진 주차장이 있으며, 바로 옆에는 고목군이 있고 제단(祭壇)이 만들어져 있어 정초에 동제를 모시고 있으며, 안길은 잘 포장되어 있고 마을 중간에는 도지정 문화재 자료 제116호(89.1.23 지정)인 조씨 고가가 있다.   마을은 밭이 많고 황토땅으로 고구마의 주산지였고 품질도 우수하여 전국적으로 인정해 주는 농산물이다. 마을 좌측으로 달등이산, 우측으로 오봉산이 있으며, 오봉산 남쪽 등넘어가 작은 고등골이며, 남쪽으로 한 등을 넘으면 큰 고등골, 이 골의 언덕받이가 왕우바지, 여기서 동남쪽으로 한 등성이를 넘으면 통태바우골이며 고동포마을이다.   통태바우에서 한 등성이 남쪽 넘어가 솔머리골인데(산의 생김새가 삼베와 무명베를 메는 솔과 같이 생겨서 붙여진 이름), 여기 솔머리산 발치와 중항리 점복개 쪽을 건너 질러 장포농지를 일구어 놓은 방조제가 축조되어 있으며 고동개 새언이라 한다.   솔머리골에서 남쪽으로 한 골짜기 너머가 고동포 본 마을이며, 앞은 사천해와 접하고 건너는 중항리 안도마을과 바다를 경계로 마주 보고 있다. 여기에서 북쪽으로 한등을 넘으면 가마골(산의 형태가 가마솥 같이 생김)이란 골짜기가 있다. 고동포 마을은 물불산이 남쪽으로 뻗은 능선의 마지막 끝 부분에 위치하고 있다. 마을 뒷산에는 성지목이란 재가 있는데 옛날 도선 국사가 이 곳까지 와서 보니 지형이 바다로 빠진 것을 보고 통곡했다는 곳이다. 서쪽의 경계는 목단천이 제방골에서 흘러 이 곳에서 바닷물과 합쳐지며 이 곳에 언을 막아 덕진포 농지를 이루고 있고 언을 따라 곤양으로 통하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고 언 입구에는 이 제방을 축조한 이유생씨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다.   물불이산 서쪽으로 뻗은 능선 밑이 본촌마을이다.

본촌마을 회관.경로당

  본촌은 가리와 삼밭골로 마을이 형성되어 있고, 옛날에는 가리면의 본거지였으며 마을에는 보건진료소가 있고 그 앞에 동수(洞樹)가 있는데 이 곳에 동제를 지낸다.   본 마을 서북으로 재(화경재)를 넘으면 지방도 1002호선 아래로 삼밭골 마을이 있으며, 주위 산에는 밤나무가 조성되어 있고, 도로는 산허리를 돌고 돌아 사천까지 도로구간 중 가장 험로이다. 마을 북쪽으로 남해 고속도로가 있으며 묵곡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다.   1) 지명(地名)   ◦고무실(鼓舞谷) : 삼밭골 북쪽의 골짜기인데 이 곳은 농토가 비옥하여 항상 풍년을 이루며, 이앙을 마치면 써리 씻기 별미로 잔치를 베풀었고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풍년을 그리며 가무를 즐기는 곳이라 하여 고무실이라 칭하고 있다.   ◦평산신씨제단(平山申氏祭壇) : 고동포 성지목(古洞浦 聖地목) 서쪽 20m지점에 큰 포구나무(250년)가 있는데, 이 곳에 제단을 설치하여 1997년도부터 매년 10월 환덕리 지구 평산신씨 문중에서 시제를 모시고 있다.   ◦꽃밭재 : 본촌 본 마을에서 환덕으로 넘어가는 물봉산 남쪽의 언덕길.   ◦너린빌 : 가리 남쪽에 있는 넓은 바위.   ◦다래골 : 가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달등이 산 : 환덕 동북쪽에 있는 산.   ◦덕진개 : 범동골 아래쪽에 있는 간척지로 이유생(李由生)웅이 사재로 쌓은 간척지 이름.   ◦물부리산(수윤산) : 환덕리에 있는 산으로 산 주봉(130m)에서 동쪽으로 뻗은 능선 밑에 환덕 마을이 있고 가뭄 때는 기우제를 지냈다고 하며, 새해 해돋이 기원제와 현재 사천시 산화 경방 총지휘소가 설치되어 있다.   ◦방아골 : 가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범등골 : 가리 남쪽에 있는 골짜기 (범골짜기).   ◦본촌 : 조선시대에는 가리면의 중심지이며, 본촌이란 말은 대개 그 마을이 시작되었거나 그 지역의 지기를 북돋아주는 장소를 말한다고 한다.   암 닭이 알을 낳는 마을 형상이며 닭이 매일 알을 낳는 덕으로 날로 이익을 더해 간다고도 말한다.   ◦삼밭골 : 본촌 서쪽에 있는 마을로 삼밭(麻田)이 많았다고 함.

고동포마을 회관

  ◦성지목 : 다래골과 통대바우골을 성지목이라 부르고 있으며 1950년대까지 중항리ㆍ고동포 사람들이 곤양으로 나들이 할 적에는 이 고개를 넘어야 하며 성지목에는 단 한 가구가 살았는데 1940년도 까지도 천도교 신도들의 교당 역할을 하였으며, 현재 그 집은 없어지고 터만 남았으며 그 옆에는 큰 포구나무 한 그루만이 옛 모습의 증인인양 250년의 연륜을 말해주며, 이 목에서 성인이 목 놓아 울었다는 설과 성인이 성지(聖地)를 알고 바라본 목(장소)이란 말도 전한다.   ◦솔머리골 : 통대바위 골짜기에서 한등 남쪽으로 넘어가는 골짜기.   ◦앵이 바지 : 본촌 동쪽에서 고동포로 넘어가는 고개.   ◦오봉산 : 환덕 동남쪽의 산.   ◦왕우(王牛)바지 : 큰 고동골의 먼 언덕바지. 옛날 큰 황소를 많이 키웠던 언덕을 말함.   ◦작은 고등골 : 오봉산 남쪽 등넘어 있는 골짜기.   ◦큰 고동골 : 작은 고동골에서 남으로 한등너머 있는 골짜기.   ◦통대바우 : 와우바지에서 동남쪽으로 한등 너머 있는 골짜기.   ◦화경재(환덕재) : 환덕에 있는 고개인데 옛날 도로를 개설하기 위하여 산의 목을 자를적에 불빛이 나갔다고 화경재(火炅峙)라 함.   ◦가리(加利) : 본촌의 본래 지명이며 지금도 가리본촌이라 하며, 지형이 닭을 가두어 기르는 가리와 같이 생겼다하여 붙혀진 이름.   ◦가리서당 : 가리에 있었던 서당터인데 밭으로 되어 있음.   ◦가마골 : 고동포 마을에서 북쪽으로 한 등을 넘으면 있는 골짜기로 지형이 큰 가마솥 같다하여 붙여진 지명이라고 하며, 옛날 염전이 있을시 이 곳에 소금굽는 솥이 있었다고 함.   ◦고개넘어재 : 벌점골 위에 있는 고개.   ◦고동개 : 본촌 남쪽에 있는 마을 (고동포).   ◦하이재 : 환덕리 공동묘지의 재.   ◦새언(장포방조제) : 고동포 골머리 산 뿌리와 중항리 점복개산 뿌리를 가로막는 방조제인데, 구강언을 폐쇠하고 하부에 새로 만들었다하여 새언이라 함.

구강언 장소

  ◦구강(龜岡)이 들 : 日本人龜岡(가메오카)이가 1920년대 간척(干拓)사업으로 방조제(防潮堤) 언(堰)을 막아 많은 농토(農土)가 개간(開墾) 되었다. 언을 막기 전에는 바닷물이 깊숙이 고동개 검정(儉丁)ㆍ동천(東泉)ㆍ묵실(黙實)ㆍ흥사(興士) 입구까지 들어갔다. 이 지형(地形) 지점을 일본사람이 알고 동천(東泉) 복덕산(福德山) 끝에서 와티(臥峙) 되박골 쪽 좁은 목에 방조(防潮) 언(堰)을 막았다. 당시(當時) 일제 강점기(日帝 强占期)라 자기 나라 동양척식(東洋拓殖) 주식회사에서 개간(開墾) 사업자금(事業資金)을 받아 공사를 했는데 많은 인부(人夫)가 동원(動員)되었고, 그 때의 장비(裝備)라고는 삽ㆍ괭이ㆍ지게로 작업(作業)했으니 둑과 제방을 쌓는 공사(工事)가 장기간(長期間) 걸릴 수 밖에 없었다. 현장(現場)사무소가 동천(東泉) 아랫마을에 설치(設置)되고 많은 사람이 붐비게 되니 동네 이름을 회사(會社)라고 불렀다. 언(堰) 길이 150m의 큰 둑이 쌓이고 수문(水門) 두 개를 설치(設置)했는데 조수(潮水) 간만(干滿)에 따라 열리고 닫히고 하였다. 만조(滿潮)때에 수문은 닫혔는데 비가 많이 와 내수(內水)가 만수가 되면 양수(揚水)펌프를 큰 발동기로 작동해 내수를 퍼 내었다. 그러나 홍수(洪水)가 나면 그 장비 시설로는 역부족으로 늘 침수(浸水)가 반복되었다. 10년 뒤에 현재의 언(堰)을 고동(古洞)개 끝에서 점복개(占卜介) 쪽으로 막아 새언이라고 부르고 옛날 언은 구언(舊堰)이라 했는데 지금은 흔적이 없다. 개간(開墾)된 논은 600평 단위로 바둑판 같은 들이 이루어지고 면적(面積)이 수 백 정보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리(水利)와 치수(治水) 시설(施設)이 따르지 못하여, 개간 후 수십년 간은 가물면 염분(鹽分) 때문에 작물(作物)이 벌겋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洪水)로 하천(河川)이 범람하여 침수(浸水)가 몇 일간 계속 되어 농사(農事)를 망쳤다. 그런데도 그 때는 논이 귀해 서로 경작(耕作)하려고 하였다. 벽해(碧海)가 변전(變田)으로 들판이 되었으니 이 들을 구강(龜岡)이 들이라 불렀고, 땀땀이 들 이름을 고동개 들ㆍ되박골 들ㆍ회사 들ㆍ검정 들ㆍ황새목 들ㆍ동천 들ㆍ묵실 들ㆍ깬모퉁이 들ㆍ몰구리 앞 들 등으로 불렀다. 들이 이루어지고 난 뒤 자의(自意) 타의(他意)에 의해 일본(日本)인 구강일(龜岡一)이의 시혜(施惠) 공덕비(功德碑)를 작인일동(作人一同) 명의로 동천(東泉) 탱자나무 거리에 세웠다. 당시 작인(作人)들 형편으로는 토지를 매입(買入)하지 못하고 대부분이 소작(小作)으로 논을 경작하였는데 소작료(小作料)가 너무 과도하여 추수를 해도 작인(作人)은 빈 가마니만 들고 들어 올 때도 있었다. 광복(光復) 후 구강일(龜岡一)의 비(碑)는 소작인들의 분노로 인해 무너뜨려져서 길가에 뒹굴다가 방천(防川) 막는데 들어 가 버리고 지금은 그 흔적(痕迹)이 없다.   ◦심보탄 주막집 : 곤양에서 환덕 고개를 넘는 대로변에 독가촌 주막이 있었는데 이 주막집 주모가 빚은 술맛은 천하일품이며 주모의 미모 역시 천하일색으로, 이 곳을 지나는 과객들은 반드시 발걸음을 멈추고 쉬어 간다하여 집 이름을 심보탄 주막이라 불리였는데 지금은 남해안 고속도로 부지로 편입되어 흔적은 없고 이 곳을 심보탄이라 불리어 오고 있다.   ◦다리머리(橋頭) : 위치는 지방도 1002호선이 목단천을 통과하는 지점에 환덕교가 가설되어 있는데 여기를 다리머리 동리라 칭한다. 이 지역은 예전부터 곤양 중부지역의 교통 중심지로서 이 곳을 거쳐 백토(白土) 임산물(林産物)을 해상(海上)으로 운반하고 해상으로부터는 소금과 각종 해산물이 반입되는 곳으로서, 주변에 20여 호의 민가가 정착하여 그 중 주막이 5호, 엽연초 판매소, 이발소, 정부양곡, 수매창고 및 비료 보관창고 등이 줄비해 오랜 세월동안 성시를 이루었으나, 덕진포 방조제 구축, 지방도 확포장 및 고속도로 개통으로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3호가 살고 있다.   ◦통둔(通屯) : 본촌 다리머리에서 남쪽으로 400m지점에 통둔언(通屯堰)이 있는데, 이 언은 1920년대에 축조된 이후 백토(白土) 화목장작(火木長作) 곡물(穀物) 등이 반출되고 각종 해산물도 반입되는 소항구였다. 이 곳에는 유호준(兪昊俊)이 각종 화물의 보관 반출 등의 업무를 관장하였으며 해상교통의 중심지라 하여 통둔이라 칭한다.   ◦다리골 : 환덕교 북쪽 깊숙한 산골에 논이 있는데 이 곳을 다리골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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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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