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곤양향토사



곤양향토사

석문마을 회관ㆍ경로당

7. 대진리(大津里)   대진리는 조선조에는 곤양군 동부면에 속해 있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석문(石門)ㆍ제민(濟民)ㆍ한월(寒月)ㆍ어류(魚遊)를 병합하여 큰 나루가 되었다고 하여 대진리라 해서 곤양면에 편입되면서 석문ㆍ제민ㆍ한월 3개 마을로 구성되었다.   석문은 남으로는 서포와 바다를 경계하며 북으로는 한월과 접하고 있다. 본래는 까막골이라고 했는데 옛날에는 소금을 만드는 가마솥이 있어 가마골이라고 하다가 가마골이 막골로 변했고, 왜구 등 외적을 막기 위해 돌문을 세웠다 하여 석문이라 하였다. 마을 앞으로 넓은 들이 있으며 이들은 오리방천을 막아 농토로 개척하여 미맥의 곡창지이며 이모작으로 마늘 주산지를 이루고 있다.   한월은 남쪽은 바다와 접하고 북은 국도와 고속도로가 통과하며, 목단과 본촌을 경계하며 동으로 덕진포를 접하고 있다.   예로부터 한월은 앞바다에 배를 띄우고 정박하게 하는 큰 나루가 있었는데 이 큰 나루라 하여 한널로 불리다가 한월로 되었다고 하고, 긴긴 밤에 차가운 달이 바다에 비춰진다 하여 한월이라고도 하는데 한널이 한월로 변한 것이다.   도로는 곤양 당천 삼거리에서 월천고개를 넘어 고동포로 하여 중항으로 연결되며, 최근까지 곤양의 항구로 불리는 광포에는 부산으로 가는 공진호가 화물을 싣고 떠났으며, 하동 북천 등지에서 생산되는 백토를 운반하는 항구였다.   마을이 분산되어 어류는 본 마을과 떨어져 있으며 옛날에는 고기들이 유회했다하여 어류라 하였으나 지금은 모두 농토로 변하여 있고, 성남재를 오르는 골짜기에는 (주)사천환경이 들어와 건축 폐기물 처리를 하는데, 옛 농토는 간 곳 없고 건축 폐자재를 처리하는 기계소리만 요란하다.   제민은 조선조에는 제민창이 있어 제민곡을 쌓아두는 창고가 있었다고 한다.   남쪽은 서포와 경계를 이루고 동은 석문과 경계를 이루는 오리방천의 곤양천에는 재첩과 어패류들이 잡히고 있다.   1) 지명(地名)   ◦고승당산 : 고시랑당이라고도 하며 어류마을 서쪽에 있는 산이며 동학혁명 때 접두 김학두(金學斗)를 비롯하여 많은 교인이 참몰당한 곳이라 함.   ◦광포만(廣浦彎) : 넓은 포구라는 뜻으로 곤양의 외항으로 해상교통 수반 역할로서 농축산물, 임산물, 백토 등을 운반했다.

대진교

  ◦대진교 : 제민마을과 석문마을을 잇는 다리로 옛날에는 징검다리(돌다리)가 있었다 하며, 지금의 다리는 1971년에 건설되었던 다리를 철거하고 다시 준공하였음(2003년).   ◦손오고개 : 한월 동쪽에 있는 마을 고개로 광포쪽으로 가는 길목.   ◦신선바위 : 제민 서북쪽(곤양 남산의 앞쪽) 중턱에 있는 바위로 신선이 놀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   한월마을 회관ㆍ경로당   ◦산산골 : 한월 북쪽의 산.

한월마을 회관.경로당

  ◦어류골 : 어리골이라고도 하며 옛날에는 바다였는데 그곳에 고기가 많이 놀았다하여 지은 지명.   ◦덕진개 : 한월 안산 밑 서쪽에 있는 간척지로 1967년 조성하였음.   ◦용수덤 : 한월 서쪽에 있는 산(용의 형상이라 함).   ◦월천(越川)고개 : 한월 가는 길에 있는 고개로 한 예언가가 이 고개로 물이 넘어갈 것이라고 하여 월천고개라고 이름 지어졌다고 하며 오창 고개라고도 함.   ◦저전산(楮田山) : 한월 동쪽에 있는 닥나무가 많이 자생했던 곳으로 닥발골 이라고도 한다.   ◦정지골 : 제민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샘이 있었음.

제민마을 회관

  ◦탁산 : 한월 안산.   ◦하늘들 : 한월 동쪽에 있는 들로 한월들이라고도 함.   용수산(한월)   ◦오리방천 : 옛날에는 이 곳이 개펄이였는데 1930년대 일본인 야마다(山田)가 5리(2km)나 되는 둑을 축조하여 둑 양편으로 넓은 농경지가 조성되었다. 하천에는 재첩, 은어, 장어 등 어자원이 서식하여 주민 소득원이 되기도 했으며, 6.25 동난시는 오리방천에 많은 주민들이 피난하던 중 미군 비행기의 오폭(1950.8.2)으로 많은 희생자를 낸 아픈 역사를 간직한 곳이기도 하다.

용수산(한월)

  ◦용수산 : 용의 머리 모양을 하고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   ◦제민창 : 제민마을 옛날 백성을 구제하기 위하여 곡식을 저장하는 곤양군 제민 창고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   ◦가마골(石門) : 까막골이라고도 하는데 옛날에 소금을 생산하는 가마솥이 있었다. 가마골이 막골로 변하였고, 왜구 등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돌문을 만들었다 하여 돌문이라 부르기도 했다.   ◦무당바위 : 석문마을 앞. 지금의 석문교회 앞으로 옛날 바닷물이 여기까지 들어 왔으므로 바닷가의 바위에서 무당이 굿을 하다가 물에 빠져 죽은 바위라 하여 무당바위라 한다.   ◦허방굼터 : 월천고개를 넘으면 사천농산 아래 지역인데 옛날에 허씨와 조씨가 서로 조상의 묘를 모셔놓고 서로 자기가 주인이라고 우기다가 허씨가 지게되자 허씨가 허방에 빠졌다고하여 생긴 이름으로 지금도 허씨묘는 성묘객이 없다고 함.   ◦서남지 : 한월마을 입구 정자나무가 있는 곳으로 옛날에 정자나무 건너편으로 큰 서나무가 있었다고 하여 서남지로 불리고 있다.   ◦가장골 : 서남지에서 약 200m 광포쪽 지점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사람이 죽으면 이 곳에다 가매장을 해놓았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   ◦차낙골 : 지금 용화사가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그곳이 전부 논이였는데 찬물이 많이나서 일반벼는 재배가 되지 않아 찰벼를 많이 심었다 하여 찬나라골이 차낙골로 변하였다 한다.   ◦허리질넘 : 가장골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부근에 있는 산으로 산허리에서 석문으로 넘어다니는 길이 있어 허리질넘이라고 하며 지금도 그 길이 있음.   ◦외붕골 : 손호곡에서 광포쪽으로 약 300m 쯤 가면 옛날에 사람이 운명하면 시신을 이 곳에 두었다가 시체가 육탈이 되면 뼈만 골라 매장 하였다고 하며 또한 전염병(호열자, 장질부사) 환자들이 소생 가망이 없으면 이 곳으로 보내며, 격리 수용하여 운명하도록 하였는데 그 중에는 간혹 살아서 돌아오는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장터골 : 외봉골에서 광포쪽으로 150m 나가면 옛날에는 광포가 항구로써 번창할 때 임시 시장이 형성되었던 곳이라 하여 장티골이라 불리고 있으며 지금도 이 곳을 파 보면 사기파편과 조개껍질이 나오고 있다.   ◦장곡재 : 장터골 산 정상부근으로 옛날에 광포시장에 갔던 사람들이 고개를 넘으면서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붙어진 이름   ◦박골 나들이 : 독진개 중간부분에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바다에 굴(석화) 발을 막아놓고 굴을 따가지고 나오는 길이였다고 발골 나들이가 박골 나들이로 변하여 전하고 있음.   ◦선창 : 옛날 석문으로 가는 배가 물이 빠지면 석문까지 올라가지 못하고 임시로 정박해 있던 곳으로 근간에는 두산농산이 있던 산 밑 바다로 배가 많이 정박해 있던 곳이라 함.   ◦발굼터 : 선창에서 광포쪽으로 150m 정도 지점에는 옛날 석문 사람들이 발을 막아서 해산물을 채취하던 곳이며 발이 있었다는 곳이라 하여 불려진 곳.   ◦맨지끝 : 광포에서 바다를 따라 어장발 쪽으로 따라가면 끝이 닿는 지점으로 일명 여끝, 또는 맨지끝이라 한다.   ◦뉘 머리끝 : 산의 지형이 누에 같이 생기고 끝 부분이 누에머리에 해당되는 혈이라 하여 누에 머리 끝이라 불렀던 것이 뉘 머리끝으로 변함.   ◦건내몰 : 한월 안산의 덕산밑에 있는 곳으로 옛날에는 마을이 형성되어 있어 윗마을 아랫마을 건너마을로 불리고 있던 것이 지금은 윗마을은 웃물, 아래마을은 아래몰, 건너마을은 건내물로 불리고 있음.   ◦마아골 : 산골이 사방으로 막혔다 하여 막힌골이 마다골로 하며 윗마을 우측에 있는 골짜기 임.   ◦유통골 : 마다골짜기 옆골로써 산 중턱에 샘이 있고 살골짜기 형세가 여자 유방같이 양쪽으로 볼록 솟아 있다고 하여 붙어진 이름.   ◦뽈지골 : 광포 아래 선창에서 약 200m 정도가 맨지끝으로 산속으로 굴이 있어 옛날에는 물이 들어와서 마을로 올수 없으면 그 굴을 통하여 광포로 다녔으며 쁠지골, 박쥐굴 이라고도 함.   ◦해탕골 : 뉘머리 끝에서 약 100m 정도 떨어진 곳으로 옛날에 여자들이 해수탕을 하던곳이라 하여 해이탕골로 불리우다 해탕골이 되었음.   ◦마당재 : 성남재 산맥이 한월로 뻗어 내려 고개를 이르고 있으며 고개 아래에는 남해고속도로 사천 터널이 복선으로 관통되어 있으며 이 고개는 곤양에서 사천으로 동부지역에서는 곤양으로 왕래하는 큰 도보길 이였으나 성남재로 도로가 개통되고 고속도로의 터널이 개통함으로 이 길이 폐도가 되었다.   이 고개는 가운데 지점이 평평하여 마당같다 하여 마당재로 불리기도 하고 재에 큰 바위가 있어 그 바위에 쉬었다 사천으로 가면 꼭 사천에서 매를 맞는다고 하여 매달재라고도 한다. 이 재는 1960년대 이전만 해도 통학으로 시장 등으로 많은 학생과 주민들이 곤양을 드나드는 길목으로 이 재에서 쉬어가면서 씨름 등 기타 놀이를 하던 곳으로 추억이 많이 깃든 곳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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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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