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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4. 무고리(舞鼓里)   무고(武庫)라 음각되어 있는 바위   무고(舞鼓)는 곤양면(昆陽面)의 서쪽에 위치한 곳으로 동남쪽으로는 맥사 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데, 그 경계에는 무고의 관문(關門)으로 조삼리(造森里)라는 곳이 있다. 이 조삼리는 노송군(老松群)으로 이루어져 있고 또한 이 곳은 이명산(理明山)에서 흐르는 내와 다솔골에서 흐르는 내가 합류하는 곳으로 여기에서부터 무고(舞鼓)마을이 시작된다.

무고(武庫)라 음각되어 있는 바위

  그리고 서(西)로는 하동군 진교면과 북(北)으로는 하동군 북천면 및 사천시 곤명면(초량리)을 경계로 하고 있는 마을이다.   무고마을 회관   무고(舞鼓) 마을은 조선시대는 곤양군 서부면(西部面)이였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사천군(泗川郡) 서포면(西浦面)에 편입되었다가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곤양면에 편입되었다. 이 무고의 옛 마을명은 물고뱅이 또는 무고뱅이2) 및 무고(武庫)라고 부르다가 현재의 무고(舞鼓)로 개칭된 것으로 전해오고 있다.


  2)물고뱅이는 물을 가두어 두는 곳으로 해석이 되고, 무고뱅이는 무기고의 방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무고마을 회관

  무고는 만점(萬点), 원동(院洞), 신촌(新村), 상촌(上村), 평촌(坪村)이라는 다섯 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는데, 여기에서 편의상(행정구역상) 만점, 원동, 신촌을 무고리(舞鼓里)라 하고 상촌과 평촌을 상평(上坪)마을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무고라고 하면 이 다섯 개의 자연마을을 모두 다   물고뱅이는 물을 가두어 두는 곳으로 해석이 되고, 무고뱅이는 무기고의 방이라는 뜻으로 해석되는 것 같다.   합쳐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고는 궁골(弓谷), 다솔골(多率谷), 죽마등골(粥馬嶝谷), 한재골(韓在谷), 방골(坊谷) 등의 다섯 개 골(谷)로 이루어져 있다.   무고(舞鼓)는 이명산(理明山)을 주봉(主峯)으로 하여 수윤산(水潤山 : 일명 물불이 산)과 봉명산(鳳鳴山)이 있는데, 수윤산(水潤山)은 옛부터 산봉우리에 기우제단(祈雨祭壇)이 있었고, 그 산의 중턱에는 석불(石佛)로 유명한 보안암(普安庵 : 미륵암)이 있으며, 봉명산(鳳鳴山)은 다솔사(多率寺)의 주봉(主峰)으로서, 이 삼봉(三峰)은 사천시(泗川市) 서부(西部)의 주봉(主峰)이다. 특히 이명산(理明山)과 수윤산(水潤山)의 중턱에 있는 고사리재(薇嶺) 무고천의 발원지일 뿐만 아니라 이 천은 산수가 좋아 항상 맑은 물이 흐르고 있다. 그리고 농토가 비옥하여 농산물 촉성재배를 위한 비닐하우스 단지가 조성되어 토마토, 오이, 단고추 등을 많이 생산ㆍ수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산지(山地)를 이용하여 밤, 단감 등의 생산으로도 유명하다.   무고(舞鼓)는 산수가 웅장하고 화려하여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많은 명당(明堂)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즉, 만점의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 : 이 매화낙지형은 천하 명당자리로 전하여지고 있음), 신촌의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 : 장군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자리라고 하는데, 이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은 평촌의 한재골에 있다는 설도 있음), 평촌 방골의 선동취적형(仙童吹笛形 : 신선 동자가 피리를 부는 형상이라고 하여 지어진 이름인데, 백세아동주의타(百世兒童朱衣打)라 하여 백세에 걸쳐 벼슬이 나올 명산으로 전하여지고 있음)등의 명당이 있어 요즈음에도 이 명당을 찾아 경향각지(京鄕各地)의 지관(地官 : 풍수)들이 자주 찾아들고 있다.   상평마을 회관ㆍ경로당   무고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무(武)와 관련된 명칭들이 많이 전하여져 오고 있어 옛 명칭이 무고(武庫)라고 한다. 이 무고(武庫)라는 옛 명칭은 곤양(昆陽)의 산세가 천군만마(千軍萬馬)를 거느릴 대천자가 나올 곳으로 천자가 세력을 발휘하기 위하여 필요한 무기를 만들어 보관하는 곳인 무기고(武器庫)라는 뜻이다. 또 실제로 조선시대에는 무기창고가 무고에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을 뿐 아니라 무고(武庫)는 남해안을 끼고 있는 곤양군의 군사적 요새지(軍事的 要塞地)였다고 한다.

상평마을 회관.경로당

  이와 같은 무(武)에 관한 유래를 살펴보면 ① 맥사에서 무고로 들어오는 길목에는 몰(말)미(馬上들)라는 산이 있고, ② 평촌마을의 한재골에는 장군터가 있는데 그 곳에는 왜인들이 장군이 못 나오도록 불(火)을 떴다고 하는데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 있으며, ③ 상촌마을의 앞 들을 장막(將幕)들이라고 하는데 이는 장수(將帥)와 막하(幕下)들이 있었던 곳이며, ④ 장막들 앞의 궁골(弓谷)은 군사들의 활터로 전하여지고 있으며, ⑤ 이 장막들의 옆에는 죽마등이 있는데 이 곳은 말에게 먹이(죽)를 주는 곳으로 전하여 지고 있으며, 또한 그 앞 들이 섬안으로 군량미를 보관하는 곳이었으며, 그 옆에는 치마산(馳馬山)이 있는데 이 곳은 말의 훈련장이었으며, ⑥ 상촌마을의 뒷산에는 장군번덕(산 등성이가 광활함)이 있는데 이 곳은 군사들의 훈련장이라고 전해지고 있으며, ⑦ 평촌 한재골의 대곡사(大谷寺 : 사적지 참조) 산의 봉우리를 감투봉이라 하여 이 곳은 장군이 관과 투구를 벗어 놓는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이상의 무(武)와 관련된 자세한 내역은 지명란 참조).   이와 같이 전해오고 있는 자연 촌락들의 지명을 살펴볼 때 조선시대에 곤양군(昆陽郡) 곤양군은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에서는 해안을 가장 많이 끼고 있었던 고을이었다. 그 경계가 현재 사천만에서 섬진강이 흐르는 하동쪽의 광양만 일부까지였다. 따라서 곤양군은 왜구들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내륙침략의 길목으로서의 군사적 요새지였음으로 추정된다.   은 남해안의 군사적 요새지(軍事的 要塞地)였으며, 무고(舞鼓)는 곤양군(昆陽郡)의 군사적 요새지(軍事的 要塞地)였음으로 추정(推定)된다. 따라서 임진왜란 이전에는 무고(舞鼓)는 무고(武庫)라는 지명이였으나, 임진왜란 당시 왜구들이 남해안에서 내륙침략의 길목인 곤양군(昆陽郡)을 침략한 후 무(武)와 관련이 많은 곤양군의 군사적 요새지(軍事的 要塞地)인 무고(武庫)를 춤추고 북치고 노는 무고(舞鼓)로 개칭하였다고 전하여 오고 있다. 그리고 마을 어귀(신촌)의 큰 바위에는 무고(武庫)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다.(연대 미상) 따라서 무고의 동민들은 무고(舞鼓)가 무고(武庫)로 개칭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부부송

  1) 지명(地名)   ◦만점(萬点) : 무고 마을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전란 때 많은 사람들(만명의 사람들)이 피난을 하였다고 하여 만점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산에 돌 너드렁이 많다는 뜻으로 만점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곳에는 부부송(夫婦松)이 있는데, 이 부부송은 두 그루의 노송(老松)이 부부(夫婦) 같이 서 있다고 하여 부부송(夫婦松)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고 만점의 보안암(미륵암)의 옆에는 시루떡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시루떡과 같이 생겼다고 지어진 이름이며, 만점 입구에 있는 탕근바위는 그 모양이 탕근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탕근 바위라고 부르고 있다.   ◦원동(院洞) : 신촌 서쪽 마을로 원님이 쉬어 가는 원두막이 있었다고 하여 부르는 이름이다.   ◦신촌 : 평촌 서북쪽에 새로 생긴 마을이다.


  3)곤양군은 임진왜란 당시 남해안에서는 해안을 가장 많이 끼고 있었던 고을이었다. 그 경계가 현재 사천만에서 섬진강이 흐르는 하동쪽의 광양만 일부까지였다. 따라서 곤양군은 왜구들이 조선을 침략하기 위한 내륙침략의 길목으로서의 군사적 요새지였음으로 추정된다.
  ◦궁골(弓谷) : 신촌의 북쪽에 있는 마을로 활 모양으로 생겼다고 하여 붙혀진 이름이다.   ◦상촌(上村) : 신촌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평촌(坪村) : 무고의 한 마을로 들판에 마을이 이루어져 있으며, 마을 가운데는 정자나무(느티나무) 군(群)이 있다. 마을에서는 이 정자나무를 큰 정자나무와 작은 정자나무로 부르고 있다. 큰 정자나무(식재자 미상. 연대는 250년 이상)에는 주로 남자 분들이 많이 모이고, 작은 정자나무(식재자는 金贊庸(김기태 증조부), 연대는 150년 정도)에는 부인들이 많이 모여서 더위를 식히면서 여름 한철을 보내는 상평(上坪) 마을의 쉼터가 되고 있는데, 큰 정자나무에서는 동제(洞祭)를 모시기도 한다. 그리고 상평(上村) 마을 앞을 가로질러 평촌(坪村) 마을의 뒷 들로 흐르는 냇가에는 왕(王)바위라는 큰 바위가 있었는데, 경지정리로 땅속에 묻혀 그 일부만 보이고 있다. 이 바위는 옛부터 용왕제(龍王祭)를 모셔 오던 영암(靈岩)으로 알려져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왕바위를 제자리에 복원시켜 놓아야 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평촌 마을의 뒷들에는 지금도 옛 기와와 사기 조각(김기태 박사 소장)들이 많이 나오고 있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옛날에 큰 부자가 이 마을에 살았으나 옛 마을은 없어지고 지금의 새 마을이 생겼다고 전하여 오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에 의하면 언젠가는 고증(考證)을 거쳐서 이 마을의 유래(由來)를 밝히면 무고의 유래도 밝혀질 것으로 보고 있다.   ◦신촌의 다솔골 : 현고등(懸鼓嶝)으로서 북을 달아 놓은 형상이라하여 붙혀진 이름으로 이 골의 뒤쪽에는 다솔사(多率寺)가 있다.   ◦보안암 : 만점 북쪽에 있는 암자로 다솔사에 속하는 암자이다. 이 암자에는 돌로써 석굴을 만들어 부처를 모시고 있다. 일명 미륵암(미륵골)이라 하며 해가 뜨면 이 해가 미륵부처를 비추어서 자비로움을 더해 준다.   ◦물불이산(水潤山) : 미륵암 옆에 있는 작은 산으로 가뭄 때 곤양 군수가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고 한다.   ◦불당골과 삼밭골 : 불당골은 상촌 서북쪽 골짜기인데 옛날 절이 있었다고 전하여 지고, 삼밭골은 상촌 서쪽 골짜기인데 옛날 여기에서 산삼을 캐었다고 한다.   ◦정마소(停馬所) : 궁골에 있는 곳으로 말 모양을 닮아 장군들이 이 곳에 말을 세워두었던 곳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에 말을 세워 두고 감투봉(평촌 앞의 대곡사 산의 봉우리)에 투구를 벗어 놓고 군사(軍士)의 휴식과 군마(軍馬)들의 정마를 위하여 현고등(懸鼓嶝)에서 북을 쳤다고 한다.   ◦죽마등(粥馬嶝) : 상촌 서쪽 마을로 말이 죽을 먹는 모양새라고 한다.   ◦치맛골 : 죽마등 옆 골짜기이다.   ◦한재골(韓在谷) : 평촌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이 한자골에는 장군터와 탑골이 있다. 장군터는 왜인들이 불을 떴다는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다. 그리고 탑골에는 대곡사(大谷寺 : 사적지편 참조)라는 절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대곡사 산의 봉우리를 감투봉이라고 한다.   ◦방(坊)골 : 평촌의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이 곳에는 옛 도요지(陶窯地)로서의 흔적들이 지금도 남아있다.   ◦다솔골 : 상촌 뒤쪽에 있는 다솔사가 있는 골짜기.   무고 탕건바위   ◦시루떡 바우 : 미륵암 옆에 있는 바위(시루떡과 같이 생겼음).

무고 탕건바위

  ◦탕건(宕巾)바우 : 만점 입구에 있는 탕근 모양의 바위.   ◦신촌의 장군대좌형(將軍大坐形) : 장군이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는 자리라고 하며 이 명당에 하씨(河氏) 문중의 선산이 있기도 하다.   ◦평촌 선동취적(仙童吹笛) : 신선 동자가 젓대를 부는 형상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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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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