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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3. 만 1) 광포만(廣浦灣)

광포만과 옛창고 모습

  광포만(廣浦灣)은 중항리(中項里) “미느리”와 서포면(西浦面) 조도리(措道里)를 연결(連結)한 내해(內海)를 말하며, 자연(自然) 그대로의 옛 조수(潮水)의 흐름을 살펴 보면, 곤양천(昆陽川)을 따라 곤양고등학교(昆陽高等學校) 앞까지 해수(海水)가 올라왔으며 북문 밖까지 배가 드나 들었다고 한다. 당천(塘川)마을 앞 원예 들과 제민(濟民)마을 앞 먼 원예 들과 석문(石門) 들 그리고 서포면(西浦面) 남구(南鳩) 방천마을과 서구(西鳩, 배비드리)마을 동구(洞口) 앞 정자나무 숲이 있는 곳까지가 바다였고, 동구(東鳩)마을 앞 들도 바다였으며, 그리고 작도정사(鵲島精舍)가 있는 까치섬도 역시 바다 가운데 있었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때 양포(兩浦)로 통하는 길은 소티골로 해서 숫돌고개를 지나 삼정마을을 거쳐 서구(배비드리) 하남(河南)고개를 경유해야 했다. 그리고 환덕리(還德里) 고동포(古洞浦)와 중항리(中項里) 앞들 사이에 둔 바다는 고동개끝과 동명학교(東明學校) 앞을 거쳐 장포교와 매향비(埋香碑)가 있는 앞들까지가 바다였고, 또 해수(海水)가 광포 아래쪽 “여끝”에서 덕진포 제방을 지나 통둔에 이르니 여기도 선창이 있었고, 그 위 목단쪽으로도 바닷물이 올라갔다.   광포만(廣浦灣) 일대(一帶)는 해안선(海岸線)의 드나듬이 복잡(複雜)하고 갯벌이 넓어서 간척공사(干拓工事)로 많은 농토(農土)를 개척(開拓)하였다. 간사지(干瀉地)는 일시(一時)에 이루워지는 것이 아니고, 삶의 터전을 조성(造成)하기 위해 조상(祖上)의 지혜로 오랜 세월동안 무리(無理)하지 않고, 힘이 미치는 대로 개인(個人)이나 또는 몇 사람의 협동(協同)으로 농지(農地)를 개간한 것이 옛날의 공통된 양상(樣相)이였다. 당천마을 앞 원예 들과 제민마을 앞 먼 원예 들은 언제 개간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랜 세월이 걸려 다른 곳과 비슷한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동구마을 앞 들도 옛날부터 들 변두리와 산밑 등 높은 곳부터 논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1930년 전후한 70여년 전 일본인(日本人) 야마다(山田)란 자(者)가 와서 제민마을 끝에서 서포면 조도리 물건의 수문통까지 물막이 제방공사(堤防工事)를 준공(竣工)하였으나, 제방 준공 직후인 1933년에 제방이 터져서 다시 바닷물이 들어와 힘써 지은 벼 농사를 망쳐 흉년이 들고 오리방천 곁에는 물살에 파인 “소(沼)”가 생겨나 지금까지 늪지인 못(池)으로 남아 있으며, 석문 들은 그 전에 개간 되었는데 먼저 개간한 곳은 안쪽으로 안 둑 또는 안 들이라 하고 뒤에 막은 바깥 둑 쪽은 바깥 들이라 하여 여러 해 동안 조금씩 차근차근 개간하여 80여 년전에 제방이 준공되었다.   광포항(廣浦港)이 개항(開港)하기 전에는 석문마을 등(嶝)넘어 광포 위쪽 바닷가 널비렁에 선창(船艙)이 있었다. 1910년대 곤양 사람들이 부산방면(釜山方面)으로 출행(出行)을 할려면 역시 광포에서 작은 배를 타고 2시간 동안이나 가야 선진(船津)에 도착하고 거기서 기선(汽船)을 타야 했다. 그 후 1930년에 성내에서 광포까지 도로(道路)가 개통(開通)되어 하동군 북천면에서 출토(出土)된 고령토를 이곳으로 수송하고 창고(倉庫)를 지어 집하(集荷)하여 일본(日本) 대판등지(大板等地)로 수출(輸出)하였다. 수심(水深)이 얕고 큰 배가 입항(入港)할 때는 광포항에 접안(接岸)이 어려워 서포면 조도리 소쿠리 끝 선창에 있는 창고로 운반(運搬)하여 보관해 둔 고령토(高嶺土)를 거기서 실어 출항(出港)하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통둔에도 작은 선창이 있어서 일제시(日帝時)에 광포와 함께 고령토를 수출(輸出)하는데 일조(一助)를 했고, 8ㆍ15광복 뒤에도 땔나무(신목(薪木) = 송엽, 장작)를 배에 싣고 부산 등지로 수송해서 팔아왔다.   1945년 광복후부터 1970년대까지는 농축산물을 실은 화물선이 부산으로 5일마다 곤양장날 오후면 정기적(定期的)으로 운항하였고, 1960년대까지는 이곳에서 고동포를 거쳐 서포면 구랑리 질구지와 자혜를 경유 삼천포까지 매일 1회 여객선(旅客船)이 왕복 운항해 곤양의 해상(海上) 관문(關門)으로써 역할을 훌륭히 해 왔다. 그리고 6ㆍ25동란 이전부터 지방의 뜻있는 여러분들이 광포만 간척지 조성추진위원회(廣浦灣 干拓地 造成推進委員會)를 조직하여 농토확장을 위한 계획과 추진을 여러 차례 시도(試圖)해 왔으나 번번히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곤양천의 물을 월천고개를 뚫어서 한월마을 쪽으로 넘기는 계획도 해 보고, 또 다른 안은 지금의 물길 그대로를 조도마을 윗마을과 아랫마을 사이로 넘기자는 계획까지도 해 보았으나 지금까지 성사시키지 못해 아쉽기만 하다.   광포만 갯벌은 주민들 생활 터전의 보고였다. 갯벌에 특히 많았던 게(蟹)는 반찬뿐 만 아니라 낙지나 쭈꾸미를 잡을 때 미끼가 되기 때문에 수요(需要)도 많았고, 많이 잡히기도 해서 수입이 좋았다. 그리고 바지락, 고막, 백합, 재첩(갱조개) 등의 패류와 파래, 해태 등의 해조류나 청정해역의 풍부한 어종 등으로 죽방염과 어업(漁業)이 성행(盛行)하였으나, 점차 생산량이 감소되다가 1970년대 들면서부터 생활폐수와 버려진 바다밑 오물, 기타 공해 때문에 갯벌이 오염(汚染)되어 죽음의 바다로 변하다 보니 생산량과 소득이 줄고 있다.   100년 세월의 광포항은 애환(哀歡)과 추억(追憶)도 많았지만 지금은 불꺼진 항구로 초라한 갯 구석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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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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