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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2. 일본의 패망   일본인들의 착취와 억압이 날로 더욱 가중되는 중에, 1919년 3월 1일 고종황제의 인산날을 맞아 서울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를 외치는 독립기념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때 일경들과 충돌한 무수한 애국지사들이 검거 되고 투옥 당하자, 당시 숨죽이며 억압당하고 울분을 삼키고 있었던 무수한 조선인들이 전국 각지에서 일어났다.   곤양에서도 3월 13일 곤양면 송전리 김진곤 외 4명이 흰 종이에 태극기를 그리고, 한 면에 “독립만세”라고 크게 쓴 기(旗)를 곤양주재소에 투입한 후 주민들을 규합하여 독립만세를 크게 외쳤다. 뒤이어 4월 6일과 4월 19일에는 곤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과 규합한 주민들은 만세를 크게 불렀고, 이 때 출동한 사천헌병분대는 학생들과 주민들을 무자비하게 저지하였으며 주모자들은 체포당하였다. 곤양의 3월 13일 의거는 진주 의거보다 5일, 사천 의거보다 8일이나 먼저였다. 그리고 대진리에서도 만세운동이 발생하여 많은 주모자들이 검거되고, 헌병이 진압하였다고 하고 있으나(사천시사, 2004) 구체적인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우리 민족이 이렇게 참담한 고통을 겪고 있는 와중에서도 일본제국주의의 야욕은 끝이 없어 1931년에는 만주사변을,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 1941년에는 태평양전쟁을 무모하게 감행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소요되는 각종의 병참물자 생산을 위하여 각종의 공출제도를 강행하고, 쇠붙이, 송진액(松津液) 등을 강제로 거출하였다. 이때에 젊은 청년들은 전쟁의 총알받이로, 또 강제징용으로 모집 당하였고, 어린 소녀들은 정신대로 끌려가 갖은 수모를 당하여 그 문제가 오늘날까지도 민족의 상처로 남아 있으며, 남아 있는 이 땅의 조선 동포들은 초근목피(草根木皮)로 근근히 생명을 이어가고 목숨을 부지하는 비참한 지경에 처해지게 되었다.   1940년 사천비행장 건립시 곤양면민들이 강제노역에 동원되어 노력의 댓가인 임금은 커녕 식사, 의복, 제반 의약품도 없이 삼엄한 감시 속에 살벌한 구타와 체벌의 고통을 당하면서 공사노역에 종사하여야 하였다. 일본은 세계정복의 야욕과 한민족을 괴롭히며 비참한 고통에 빠뜨린 댓가로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廣島)에, 8월 9일에는 나가사키(長崎)에 미국의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일본은 8월 10일 항복 결심하고, 8월 14일 포츠담 선언을 모두 수용하고 무조건 항복 선언을 하였다. 8월 15일 일본 천황의 항복 선언이 라디오로 방송되었으나, 곤양에서는 라디오도 듣지 못하였던 때였는지라 곤양면민들은 며칠 뒤에야 해방된 것을 알게 되었다. 해방이 되자 일본인들은 학교에 모여서 부산으로 철수하게 되었고 우리 민족과 더불어 곤양사람들도 해방을 맞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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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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