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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양향토사

제5장 곤양면 마을 이름   곤양면은 신라 이전에는 포상8국 중의 하나인 곤미국(昆彌國)에 속했고, 삼한시대에는 변한(弁韓)에 속하고 그 12국 중의 하나인 군미국(軍彌國)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에는 포촌현(浦村縣)으로 거열주(居烈州)에 속했고, 신문왕 5년에는 거열주를 청주(菁州 : 진주)라 개칭하였는데 이때 포촌현은 한다사군(韓多沙郡 : 하동군)으로 개칭되었다. 신라의 포촌현은 경덕왕 16년에 하읍현(河邑縣)으로 개칭되어 하동군에 속했다.   1914년 3월 부령 111호에 의거 종래 317군을 218군으로, 4,351면을 2,517면으로 하는 군, 면의 폐합으로 인해 종전 10면 85동리를 소관 했던 곤양군은 그 관할구역을 사천군과 하동군에 분할ㆍ이속함으로써 곤양군이 종말 되었다.   고려 태조 23년(940)에 강주를 진주로 개칭할 때 하읍현은 곤명현으로 합현되어 하동군에 속했으며, 현종 9년(1016)에 곤명현은 진주목의 속현으로 이속되었으며, 세종 1년(1419)에 세종ㆍ단종어태를 곤명현 은사리 소곡산에 안치하였고, 곤명현은 남해현을 합하여 곤남군(昆南郡)으로 승격되고 이 때 읍기를 현재의 곤양면 성내리로 이전하였다.   세종 12년(1430)에 곤양읍성을 완성하였고, 세종 19년에 진주의 남해현을 다시 분리하고 대신 금양부곡(金陽部曲 : 진교, 금남)을 합하여 곤양으로 고쳤으며, 고종 32년(1895)에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13도제로 개편할 때에 곤양을 다시 군으로 회복하여 사천군과 함께 진주부 관할로 되었다.   곤양은 495년 동안 곤양군의 중심이었고, 곤양군일 때에는 동부면(東部), 가리면(加利), 서부면(西部), 양포면(兩浦), 금양면(金陽), 서면(西), 초량면(草梁), 소곡면(所谷), 성방면(城方), 곤명면(昆明)의 10개 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지방행정구역 정리 시 동부면과 가리면을 하나의 면으로 합했으며, 동부면은 9개 동리를 관할했는데 성내리(城內), 서정리(西鼎), 송정리(松亭), 가전리(加田), 사동(仕洞), 포곡동(浦谷洞), 대진동(大津洞), 남문외촌(南門外村), 동정동(東鼎洞)이다. 가리면은 10개 동리를 관할했는데 본촌동(本村洞), 환덕(還德), 탑동(塔洞), 중항동(中項洞), 가화동(加花洞), 제방동(諸方洞), 묵곡동(黙谷洞), 검정동(儉丁洞), 갑사동(甲士洞), 흥속동(興俗洞)이다.   일제강점기인 1914년 군면 폐치분합 때 곤양군을 없애면서 지역을 갈라서 서면ㆍ금양면은 하동군에 예속시키고, 다른 지역은 사천군으로 병합했으며, 1983년 2월 15일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서포면의 무고리와 맥사리가 본 면에 편입되고, 가화리 일부는 진양군으로 편입되었다. 1995년 7월 1일부로 사천시가 되면서 사천시 곤양면이 되었으며, 동으로는 축동면, 남으로는 서포면, 북으로는 곤명면과 진주시 나동면과 접하고 있다.   곤양은 고려 때 곤명현으로 불리워진 이래 지명에 곤(昆)이 따라다녔다. 세종 때 곤명의 ‘곤’자와 남해의 ‘남’자를 따서 곤남군으로 하다가 남해가 분리되고 금양부곡을 합치면서 곤남의 ‘곤’자와 금양의 ‘양’(陽)자를 따서 지금의 곤양이 되었다. 따라서 풍수지리의 측면에서 지명을 보자면 곤양이라는 지명을 뜻풀이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 곤(昆)은 맏이를 의미하며 양(陽)은 일월성신(日月星辰)의 기운이 한데 모인 힘찬 밝음이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곤양은 조선초기부터 경제ㆍ군사적 요충지였고, 풍수지리에서 볼 때 왕성한 지기로 말미암아 제왕이 나올 지역으로 알려져 있으며, 관내에는 송전리 향교, 우산봉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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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20-07-28 15:5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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