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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2. 덕곡리(德谷里)   덕곡리는 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1.5㎞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송지리, 동으로는 와룡산을 경계로 사남면, 남으로는 남양동의 노룡동과 배천동, 서로는 금문, 주문리와 접하여져 있다.   1675년(숙종1) 오가통(五家統)의 사목(事目)에 의하면 사천현(泗川縣) 9방면(坊面)중의 하나인 하남면(下南面)에 속해 있었고 1895년(고종32)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진주부(晋州府) 사천군(泗川郡) 하남면이다가 1896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사천군 하남면에 속하여져 있었다.   1907년 지방행정구역정리에 따라 하남면(下南面)의 신덕동(新德洞), 부곡동(釜谷洞), 봉곡동(鳳谷洞)으로 되어 있었으며 이 때 하남면의 면소(面所)가 부곡동에 있는 듯 하다고 사천군지(泗川郡誌 : 1990년 8월 30일발행)에 기록되어 있다.   1914년 4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군∙면폐치분합에 따라 읍남면(邑南面) 덕곡리(德谷里:하남면의 봉곡, 부곡, 신덕동 각 일부)로 되었고, 1931년 4월 1일 부령 제12호에 의한 면제의 개정으로 이 해 8월에 와룡산이 보인다 하여 읍남면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고쳤으며, 1995년 5월 10일 법률 제4948호의 도농복합형태의시설치등에관한법률에 의거 사천시덕곡리는 선사시대의 유적인 고인돌이 많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마을 형성은 아주 오래 되었다고 유추할 수 있으며, 부곡에서는 1980년대 온천 개발 붐을 타고 외지인들의 온천탐사와 토지거래가 활발하여 지가폭등은 물론 동네의 이미지가 상당히 변모된 곳이기도 하다.

  • 신덕(新德)   덕곡마을의 옛 이름으로 물이 좋고 편편한 언덕배기의 농토가 많아 사람 살기에 좋은 곳이라 하여 신덕이란 이름이 붙여졌으며 덕곡이라는 명칭은 일제시대에 신덕의 큰덕(德)자와 백천골의 긴 계곡 아래에 있다하여 골곡(谷)자를 합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영화주식회사의 김기태, 강위수(진주시 정촌면 강주리 사람)의 소작료 수납 창고가 2동이나 있을 정도로 농토가 많은 부동(富洞)이였다고 한다.   전주이씨(全州李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나 입향(入鄕)한지는 약 150여 년 전이고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이보다 100여년 앞서 입향하였다고 전(傳)한다. 현재 마을 안밖에 산재(散在)하고 있는 12~13개의 고인돌과 노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1976년도 경지정리 시에 갯돌을 이용하여 만든 석관묘(길이 1.2㎝정도)가 10여 개 발견되었음은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을 것으로 추측되어 진다.      <멧등걸땀>   신덕 북쪽에 있었던 마을로 묘등 즉, 묘지(墓地)가 많이 있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사배치(泗培川)와 사보(泗洑)>   사배치는 현재의 덕곡저수지가 생기기 전(前), 저수지 둑 아래 하천 북쪽편으로 형성되어 있던 마을인데 저수지 축조로 인하여 없어지고 지금은 담장터만 희미하게 남아 있다.   사보는 백천골에서 내려오는 흰내의 물길을 막아 농사용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덕곡 동네 가운데로 흐르게 한 수로(水路)를 사보고랑이라 하고 수로는 작인(作人)들의 공동작업으로 팠다고 한다. 배천 앞에서 새주막을 거쳐 정니 쪽으로 흐르는 수로를 진보고랑이라고 하는데 이는 행정구역에 따라 사천 쪽으로 이용하는 수로를 사보(泗洑), 진주 쪽으로(당시는 남양지역이 진주군 관할이였음) 이용하는 수로를 진보(晉洑)라고 불렀다.   모충사 주지 이백산 편저 「남양의 역사와 문화이야기」(1996. 5. 1발행) 59쪽의 기록을 보면 다음과 같다.      (배치와 사배치 그리고 진보와 사보)      배치는 현재의 배천마을의 이름이고 사배치(泗培川)는 지금 저수지(덕곡지;德谷池)의 둑 아래에 있던 마을 이름이다. 옛날에는 흰내가 흐르는 하천변인 이 곳 사배치에서만 사람이 살고 있었다. 고성 등지에서나 백천사에서 남해나 하동, 진주로 가기 위해서 이 곳을 통과하여야 하기 때문에 사람이 살게 되었다. 홍수가 지면 집이 떠내려가는 피해가 극심하고 또 세월의 변화에 농사를 짓기 위해 수로가 생기고 도로가 생김에 따라 점차로 현재의 배천 마을로 옮겨 살게 되고 더러는 덕곡(德谷)으로 옮겨 살게 되니 해방 전까지 두어 집 있었으나 집이 저수지 공사로 인하여 모두 옮겨가 지금은 올막졸막한 움팍집이 있었던 담장 터만 남아 있다.   이 사배치는 배천 마을이 생기기 전에 있던 마을로서 행정 구역상 사천군이었으므로 사(泗)자를 붙이게 되었다. 이유는 현재의 배천인 남양은 진주군(晉州郡)에 속하여 있었고 냇가에 있는 이 마을은 사천군(泗川郡)에 속하였기 때문이었다.   또 농사용 수로를 만들어 문바위 아래서 물길을 갈라 놓고 덕곡 방면으로 흐르는 보(堡) 이름을 사보(泗堡)라 하고 배천 노룡쪽으로 흐르는 개울을 진보(晉堡)라 한다.      <덕곡저수지>   덕곡의 동쪽, 백천골로 올라가는 길목에 있는 저수지(貯水池)이다. 백천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1959년에 축조되었으며 수혜면적이 312㏊이고 제당의 높이는 19m, 길이는 293m, 저수량은 81만6천톤이고 유역면적은 686㏊이며 만수면적은 6.8㏊이다.      <장시들>   현재의 검문소 아랫들을 장시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장승들󰡑이 \'장시들\'로 변음 되어 불리고 있다.   위의 책 「남양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1996. 5. 1 발행) 68쪽에 보면 \'장시(將承)들\'이란 노례마을 위에서부터 새주막까지 덕곡 밑의 들을 부르는 말인데 옛날 장터(부곡) 쪽에서 남양쪽으로 오는 길목에 장승이 있었다고 전해져 온데서 붙혀진 이름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동화들>   덕곡과 주문. 금문 사이의 들판을 동화들이라 하고 금문리 편에서 \'도화들\'이라고 소개한 바 있으나 금문에서는 \'도화들\'이라 부르고 있고 덕곡리에서는 ‘동화들’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 곳 지명의 정확한 연원을 아는 이가 없어 안타깝기만하다. 허깨비 불이 보인다는 사실은 두동네의 이야기가 일치하고 있으나 불리는 이름은 서로 틀리고 있다. 움직일동(動)자와 불화(火)자를 써서 움직이는 불, 즉 허깨비 불이 나타난다는 뜻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도덕산>   덕곡과 부곡 사이에 있는 산을 도덕산이라 하고 서포쪽에서 보면 이 도덕산이 마치 황소 아홉마리의 엉덩이처럼 보이는 형상이라 하여 서포에서는 주문을 구우진(九牛津)으로 부른다고 한다.      <도덕골>   덕곡저수지 서쪽의 주문리 공동묘지 뒷편 골짜기를 도덕골이라 하고 부곡마을에서는 가매실 골짜기라고 한다.   옛날에 땔나무를 하러 다닐 때 산판이 없던 금문사람들이 이 도덕산과 댕밑(금구)으로 넘어가는 땅고개에서 도둑나무를 많이 하여 \'도둑골\'로 변음되어 불리기도 한다. 금문마을의 임산부가 산월(産月)이 되어서 출산을 쉽게 하지 못할 때 \'땅고개 솔깽이\'하고 말하면 아기를 쉽게 낳았다고 하는 우스개 말이 있는 것은 자기 산이 없고 땔나무 구하기가 어려웠던 한 시대의 일면(一面)을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박석거리>   백천골에서 뻗어 내린 흰내에는 큰물이 질 때마다 많은 자갈이 밀려 내려오므로 옛날에는 하상(河床)이 높아 박석을 깔아서 사람과 우마차가 통래(通來)하였다고 하는데 현재 덕곡교가 놓여 있는 지점을 박석거리라 하고, 맨 처음 교량을 설치하였을 때는(1934년도 설치) 냇바닥이 높으므로 다리 위에서 손을 씻을 수 있었다고 한다.      <덕곡다리>   희내(백천천)의 다리이다. 국립지리원에서 발행되는 지도에는 백천교라 되어 있다.

  <당산나무거리>   안등의 정자나무가 서 있는 곳을 당산나무거리라 하고 옛날 백천골로 가는 길이 이 곳으로 나 있었으며 전에 있던 정자나무는 느릅나무였는데 이 느릅나무의 뿌리가 창상(創像)에 효험이 있는 약제이므로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그 뿌리를 심하게 캐 가므로써 고사(枯死)하여 없어지고 지금 심겨져 있는 기목은 약 80여 년 전 유학열씨가 사보도랑을 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산에서 파다 심은 것이라 한다.

당산나무 아래에 덕곡리 지석묘군이 지방기념물 제49호로 지정되어 산재해 있다는 비석

  <탑거리>   덕곡마을 동쪽의 돌탑이 서 있는 곳을 탑거리라 하고 당산나무거리나 같은 위치이다.      <뒷고래이>   흰내 쪽으로의 마을 뒷편을 뒷고래이라고 한다.      <안등>   덕곡 저수지와 덕곡 동네 사이의 들판을 안등이라 한다.

  <숫탑과 암탑>   안등의 당산나무 거리에 커다란 암수 한쌍의 돌탑이 있는데 그 축조 연대는 알 수 없고(경주박물관의 권위있는 인사가 내사(來査)한바 있으나 축조연대는 알 수 없다는 말을 하였다고 함) 직경 5m의 남쪽에 있는 탑을 숫탑(남근의 표식이 있음)이라고 하고 직경 6m, 높이 4m의 북쪽에 있는 탑을 암탑이라고 하며 해마다 이 곳에서 동제(洞祭)를 지내고 있다.   옛날에 혼인을 하는 신랑, 신부가 이곳을 지날 때는 가마에서 내려 걸어서 지나가고, 상여는 절대 이곳으로 통과하지 못하였다고 한다.      <비석거리>   국도변의 전주이씨 집안 며느리인 철성이씨의 열행비가 서 있는 곳을 비석거리라고 한다. 열행비는 1968년도에 세웠다고 한다.      <빨래터>   신덕 동네 중앙으로 흐르는 사보고랑에 있는 빨래터이다. 지금의 마을회관이 있는 곳이다.      <새끼고랑>   큰고랑보다 작은 고랑이라 하여 새끼고랑이라 하는데 옛날 짚은개(심포)로 가는 길가의 고랑을 말한다. 지금은 경지정리를 하여 없어지고 말았다.      <큰고랑>   동네 가운데 고랑을 말하는데 지금은 복개하여 동네 안길처럼 보인다. 옛날에는 사보 고랑이라고도 불렀다.      <동제 : 洞祭>   덕곡마을의 동제는 설날부터 대보름날 안에 길일(吉日)을 잡아서 그날 자시(子時)에 제를 지내는데 제주의 선발(選拔)은 그 해 상(喪)을 당하였거나 임산부가 있는 집을 제외(除外)하고 동네에서 가장 깨끗한 장정으로 지정하여 제(祭)를 모시기 3일전부터 제주집에는 일체의 출입을 삼가하여 외부인과 접촉을 금하고 찬물에 목욕재계하여 정신을 썼으며 제수를 준비하기 위하여 시장에 갈 때는 여름철에 쓰는 밀짚모자를 쓰고 갔는데 엄동설한에 밀짚모자를 쓴 사람은 제수(祭需)를 준비하려 온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시장 상인들도 좋은 제수를 알맞는 가격에 주고 자기들의 장사를 번창하도록 기원해 줄 것을 부탁하며 제주도 상인이 부르는 값을 절대 깎는 일이 없다고 한다.   제물 및 제기를 전부 새것으로 갖추어 제를 지내는데 동네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주문을 하였으며 촛불은 완전히 타서 없어질 때까지 끄지 않고 켜 두는데 제주는 촛불이 꺼졌는지 켜져 있는지 날이 밝을 때까지 수시로 나와서 확인을 한다.   만약 촛불이 다 타지 않고 꺼지면 제주의 정성이 부족한 탓이거나 동네에 불길한 기운이 온다고 하여 정성을 다하고 동제를 지낸 뒷날 마을 어른들이 모인 장소에 제수를 진찬하고 제주는 동제 비용을 결산 보고 하는데 일말의 거짓없이 양심껏 보고하고 일년내내 마을에 아무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도록 염려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는 젊은이들이 동제 지내는 것을 번거롭게 생각하고 소홀히 하는데 대하여 노인들의 걱정이 매우 크다.      <태봉산>   행정구역상으로는 신벽동으로 되어 있으나 덕곡마을과 인접하여 소개한다. 현재 남양검문소 동쪽에 있는 야산을 태봉산이라 하는데 산 정상에 올라보면 2000~3000평의 면적으로 돌담이 남아 있다. 임진란 때의 진(陣)터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이는 태무덤이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도 있다. 이곳의 지명으로 보면 진(鎭)터이라는 설이 더 설득력이 있기도 하다.      <덕곡마을회관>   덕곡리 176번지에 위치하고 있고 대지면적 93㎡에 브럭스라브 이  층건물 99.20㎡를 1976년에 건립하여 마을회관으로 49.60㎡, 경로v당으로 49.60㎡로 사용하고 있다.      <경지정리>   덕곡지구 경지정리는 토지의 소재지는 덕곡리, 주문리 일대로 1976. 11. 8 에 110.14㏊의 면적으로 인가되어 1976. 12. 8에 공사를 착공하여 1977. 5. 15에 110.14㏊의 면적으로 준공되었다.      <장터>   부곡(釜谷)의 옛 이름으로 조선조(朝鮮朝) 후반기(後半期)부터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까지 하남장(下南場)이 섰던 곳이라 하여 장터라 불리고 있다.   이 하남장은 삼천리면(三千里面) 팔포(八浦)에 섰던 팔장기장(八場基場)과 말문리의 말문장(末文場 : 현 東洞) 사천의 읍내장(邑內場) 등을 연결하는 장으로서 2일과 7일에 섰다고 한다.   삼천포 방향에서 오는 해산물 등은 주로 주문, 하니, 미룡 등지의 항로(航路)를 이용하여 모이고 또 이 곳에서 거래되는 옹기, 농수산물, 포목, 지물, 기타 토산물이 이 항로를 통하여 남해 등지로 가기도 하고, 주문나루를 이용하여 금양장(金陽場 : 하동 금남)으로 가게 된 것이다.   하남장에 대하여 순조32년(1832)에 발간된 사천현읍지의 장시조(場市條)에 \'하남장(下南場) ; 하남면에 있다(在下南面)\'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을 보면 1832년 이전에 이미 장이 서고 있었으며 100여 년 이상 유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곡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것은 약 70여 년 전이라고 전(傳)하고 있으며 장(場)이 서는 곳이라서 각처의 사람들이 입주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한다.      <봉곡동>   불근디(흙빛이 붉은 버덩: 송지리 편에서 소개)에서 소년골로 가는 중간쯤에 있었던 동네인데 지금의 홍성표씨 집 부근으로 70~80년 전에 이미 없어진 마을이다.   각선당에서 뻗어 내린 산줄기와 북서쪽에 위치한 대밭땀의 좋은 대숲이 있어 봉황이 살 수 있는 곳이라 하여 이름이 붙어졌지만 대밭이 없어져 그런지 동네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봉곡(鳳谷)이라는 이름은 바로 앞에 있는 똥맷등과도 무관하지 않다.      <똥멧등>   봉곡마을 앞에 있는 낮은 구릉으로 면적은 약100여평 정도이며 고인돌이 하나 있다.   최창조의 「한국의 자생풍수2」 (1997. 6. 20 발행.(주)민음사) 708쪽에 \'똥멧등 ; 봉곡 남서쪽에 있는 산. 봉황이 똥을 누어 쌓인 형세라 함\'이라고 소개되어 있고 「이장군과 용머리」의 전설에서는 죽은 이장군을 조 서말과 참깨 서말을 여기 똥멧등에 함께 묻었다고 하여 이장군의 무덤으로 언급되어 있다.   똥멧등의 위치는 지금은 없어진 마을인 봉곡동의 남서쪽이 아니고 북쪽 방향의 구월리와 송지리의 경계 지점에 있다.      <석가골>   장터마을 정자나무에서 동쪽으로 약 200m정도 떨어진 도덕산 줄기로서 현재는 소나무가 많이 서 있는 골짜기 앞쪽을 말하고 지금은 대부분 농지로 개간되어 옛날의 자취를 찾을 수 없는데 약 150여 년 전 석씨(石氏) 성을 가진 부자가 서당(書堂)을 지어 운영하고 있었다고 한다. 60~70년전 서당터를 논으로 개간할 때 소뿔인장, 엽전(葉錢)등이 출토되어 현재까지 소지(所持)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도 한다.      <칠성바위>   장터마을에는 7기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는데 이 일곱 개의 고인돌을 칠성바위라 부르고 있다.   정월달 매구놀이(농악)를 할 때에는 이 칠성바위에서 간단한 제(祭)를 지낸 후 농악을 시작하여 동네의 강녕과 마을 사람들의 건강을 기원한다고 한다. 현재 1기는 매몰되어 잘 보이지 않고 6기는 뚜렷이 찾을 수 있다.      <참새미>   정자나무 아래의 샘을 참새미라 한다. 사시사철 물이 마르지 않고 여름에는 물이 차가워서 지나는 길손들의 목을 축여 주었으며, 겨울철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듯한 물이 되어 아녀자들이 서답 빨기에 아주 좋은 곳이었다고 한다. 겨울에도 얼지 않고 김이 나는 샘이 있고 부곡이라는 지명 때문에 온천(溫泉)이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하여 외지 사람들의 가슴을 방방하게 하였던 것이다.      <보×골>   가매실 응달쪽의 골짜기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자세히 보면 여자의 중요 부위를 닮은 지형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 곳을 보×골이라 한다. 금문마을 사람들의 이야기에 의하면 옛날 백천골에 산재되어 있던 많은 절과 암자에 오갈 수 있는 길이 이 곳 가매실로 통과하였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인근의 부녀자들을 붙잡아다가 이 골짜기에서 대창으로 여자의 중요 부분을 찔러서 죽였던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장터마을 사람들은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고 그냥 지형이 그렇게 생겨서 부르고 있다고 한다. 이 곳 바로 옆에 가까운 곳에 후손이 거주하는 한집안의 선대 묘소가 있으므로 이 곳에 관한 자세한 이야기는 꺼려하고 있다.      <가매실>   장터마을에서 북동쪽으로 조그마한 소류지가 있는 곳을 가매실이라고 하고 \'가마실\'이 \'가매실\'로 변음되어 불리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여기 가매실의 연원에 대하여 이 골짜기에 있는 전주이씨 선영 주변의 바위가 가마솥을 걸어 놓은 것 같다는 풍수설에서 유래되어 한자 표기로 부곡(釜谷)으로 한다고 하며,   최창조의 「한국의 자생풍수2」(1997. 6. 20 발행 (주)민음사) 708쪽에는 \'가메실(釜谷) ; 신덕 북쪽에 있는 마을. 가마솥을 걸어 놓은 형국이라 함\'이라고 기술되어 있다. v배우리의 「우리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① 권」(1994. 5. 23 발v행 토담) 313, 315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는데 앞으  로 우리땅 이름의 정확한 어원 발굴과 표기도 아주 중요한 일이v라고 생각한다. ‘’은 신성하고 높으며 으뜸됨을 뜻하는 옛말v로써 은 감, 가마로 음이 변천하면서 ‘큰’의 뜻을 지니고 있어 우리나라에는 을 뿌리로 하는 지명이 무척 많다. ‘’(크다는 뜻)과 ‘골’(마을을 뜻하며 ‘골’은 평지 마을에 더러 붙기도 하나 ‘실’은 대개 골짜기 마을에 붙는다)이 직접 합하면 ‘감골’이 되지만, 그 중간에 매개모음 ‘ㅇ’을 개입시키면 ‘감ㅇ골’이 되어 ‘가마골(가맛골)’로 읽힌다.   따라서 ‘가마실(큰 마을이라는 뜻임)’도 ‘감ㅇ실(감실)’이 원이름 임을 알 수가 있다. 가마골은 대개 부곡(釜谷), 부동(釜洞)등의 한자로 옮겨갔고 더러는 소리나는 그대로 가마동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더러 ‘지형이 가마솥 같아’ 등의 엉뚱한 이름 풀이가 나오기도 했다.    1999. 7. 11 현지를 답사한 결과 옛날에 마을이 있었던 흔적으로 물새미, 대밭, 집터의 축대, 경작지로 보이는 밭 터, 옛날 인가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버드나무 등을 발견할 수가 있었는데 필자가 추측하기로는 30~50호 정도의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가매실은 ‘가마솥을 걸어 놓은 것 같은.....’의 뜻이 아니고 ‘큰 마을’이라는 뜻의 지명이라고 확신한다.      <가매실골>   부곡 동쪽 가매실이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가매실못>   가매실안에 있는 못으로 일제시대인 1945년에 축조하였는데 집집마다 강제 노역(보국대)을 시켜 만들었고 동력 장비는 하나도 없이 전부 지게로 돌, 흙을 져서 날라 만들었다고 한다.   수혜면적은 13.6㏊, 제당의 높이는 6m, 길이는 136m, 저수량은 9천2백톤, 유역면적은 47㏊, 만수면적은 0.8㏊이다.      <부곡다리>   가매실 서북쪽, 불건디의 약간 남쪽에 있는 조그마한 다리이다.   여기의 소하천은 가매실 골짜기에서 발원하여 대밭땀을 거쳐 사천만으로 흘러 들어간다.      <동네갓>   석가골과 연접되어 있는 북쪽 편의 산을 동네갓이라 하고 당초에는 면유림(面有林)으로 장터마을에서 관리하던 산이다. 현재는 사유림(私有林)으로 되어 있다고 한다.      <보호수 : 保護樹>   덕곡리 369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느티나무는 82년 11월 10일에 2등급으로 지정된 거수(巨樹)로써 수령이 약 500년, 높이 14m, 둘레 5.8m, 임수면적 125㎡ (38평)의 당산목이다.   이 나무는 지상으로부터 1m 부위에 여섯 갈래에 수간(樹幹)으로 형성되어 있고 잎이 무성한 때의 웅장한 모습은 가히 장관이다. 동네의 안녕과 풍년을 이 곳에서 빌며 봄철에 잎이 고루 활짝 피면 풍년이 온다하여 마을 사람들은 기뻐한다고 사천군지에 기록되어 있다.      <부곡마을회관>   덕곡리 413-17번지 대지면적 707㎡에 브럭스레트 단층건물 164.80㎡를 1974년에 건립하여 마을회관으로 124.80㎡, 경로당으로 40㎡를 사용하고 있다.      ★ 참고문헌★   사천군지편찬위원회「사천군지」 1990. 8. 30.   사천문화원「사천.곤양읍지(역본)」 1989. 12. 20.   「사천현여지승람(기묘수정책)」 영인본   「사천현읍지」 영인본   「사천환여지승람」 영인본   「세종실록지리지」 cd-rom   「대동지지」영인본   이행 외「신증동국여지승람」 민족문화추진회 편 1996. 8. 1. 솔출판사   김부식「삼국사기」 이재호역 1997. 6. 30. 솔출판사   일연「삼국유사」 이재호역 1997. 3. 15. 솔출판사   진양문화원「진양지명사」 1991. 12. 31.   진주문화원「진주지명사」 1996. 12. 25.   삼천포문화원「삼천포지명지」1994. 12. 25.   한글학회「한국지명총람(9권부산경남편)」   한글학회「한국땅이름큰사전」   양주동「증정고가연구」 1997. 1. 5. 일조각   김형규「한국방언연구」 1989. 3. 10. 서울대학교출판부   내무부「지방행정지명사」 1982. 12. 10.   내무부「행정구역연혁 및 지명관련사례」 1987. 12.   배우리「우리 땅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1, 2」 1994. 5. 23. 출판회사토담   김기빈「한국의 지명유래 1, 2, 3, 4,」1993. 10. 20. (주)지식산업사   국어국문학회「방언학의 자료와 이론」 1990. 4. 30. (주)지식산업사   이우섭「영동영서의 언어분화」 1988. 6. 30. 서울대학교출판부   박인호「조선 후기 역사지리학 연구」 1996. 11. 30. 이회문화사   이상태「한국 고지도 발달사」 1999. 3. 24. 도서출판혜안   이중환「택리지」 허경진역 1996. 10. 30. 한양출판   이근술「우리 토박이말 3000」 1999. 2. 25. 출판회사 토담   강길부「땅이름 국토사랑」 1997. 10. 15 집문당   이백산「남양역사와 문화이야기」 남양향토사연구회(남양사랑회) 편 1997. 5. 1.   김영상「서울600년」 1994. 6. 10. 대학당   이기문「당신의 우리말 실력은?」 1992. 7. 31. (주)동아출판사   신용하「조선토지조사사업연구」 1991. 5. 25. (주)지식산업사   이기문「훈몽자회연구」 1998. 7. 30. 서울대학교출판부   김완진「향가해독법연구」 1995. 4. 10. 서울대학교출판부   권상로「한국지명연혁사전」 1994. 8. 1. 이화문화출판사   남광우「교학고어사전」 1997. 4. 10 (주)교학사   박용수「새우리말 갈래사전」 1997. 10. 20. 서울대학교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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