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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1. 주문리(朱文里)   주문리는 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2㎞정도 떨어져 있으며 동으로는 덕곡리, 북으로는 금문리, 남으로는 남양동의 대포동(大圃洞)과 접하여 있다.   1675년(숙종1) 오가통(五家統)의 사목(事目)에 의하면 사천현(泗川縣) 9방면(坊面) 중의 하나인 하남면(下南面)에 속해 있다가 1895년 5월 칙령(勅令) 제98호로 목(牧),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과 관명(官名)의 변경에 따라 사천군(泗川郡)으로 되고, 1907년 지방행정구역정리에 따라 하남면(下南面) 주물동(走勿洞), 신평동(新坪洞)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군,면폐치분합에 따라 읍남면(邑南面) 주문리(朱文里 : 주물, 신평, 남양면의 대선동 일부 포함)로 되었으며, 1931년 4월 1일 부령(府令) 제12호에 의한 면제(面制)의 개정으로 이 해 8월에 읍남면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고쳐 용현면 주문리(주문, 신평마을)로 되었다.   주문리는 바닷가에 접해 있어 선사시대(先史時代) 이전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이라고 추측되나 고증할 수 있는 문헌은 없고, 이는 다만 기원전 3세기초에 형성된 포상8국(浦上八國)이 해안가에 형성되어 그 유적이 발견되고 있다는 기록에 의하여 유추할 따름이다.

  • 주문(朱文)      서포쪽 사람들은 구우진머리라고도 부른다.   주문마을은 웃땀과, 나루가 있었던 아랫땀으로 형성되어 있고 동네 이름이 조선시대에는 주물(朱勿)로 되어 있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주문(朱文)으로 된 연유는 알 수 없으나 일제가 억지로 바꾸었다고 본다.   바다가 가까워 어업과 농업이 병존(竝存)하는 마을이며 옛날에는 서포와 연결되는 나룻배가 있어 하동이나 서삼면(서포, 곤양, 곤양면등 서부 3개면을 말함)쪽으로 갈 수 있는 교통의 요충지로 사람의 왕래가 많았고 이에 따른 산업도 번창하여 다른 동네보다 부유하였던 곳이다.   전주이씨(全州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가 대성(大姓)으로 거주하고 있으나 먼저 입향(入鄕)한 성씨(姓氏) 및 연대(年代)는 불명(不明)하다.   1999년 5월 19일에 주문과 서포 자혜리를 잇는 사천대교의 기공식이 있었는데 김혁규 경남지사와 노무현 국민회의부총재, 황성균 국회의원을 비롯한 각급 기관단체장, 시민 등 2000여명이 참석하였다. 사천대교는 균형적인 지역발전의 촉매가 될 것이며 1202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교량 2.06㎞와 접속도로 5.37㎞를 건설하는 사업으로 오는 2004년 완공예정이다.      <웃동네>   주문의 웃동네는 본동네을 말한다.      <아랫동네>   주문 웃동네의 서쪽 바닷가에 있는 마을로 \'구신머리\' 또는 \'구진\'이라고도 부른다. 옛날에 서포면 자혜리와 연결되는 나룻터가 있었다.      <구신머리>   아랫동네를 일컫는 이름으로 구우진(九牛津)이 변음되어 불려진 것이다고 본다.      <구진>   아랫동네를 일컫는 이름으로 구우진이 변음되었다고 본다.      <당치>   아랫동네 서쪽에 있는 개(바닷가)를 부르는 이름이다.      <큰고랑>   주문마을 중앙으로 흐르는 내. 옛날에는 상당히 넓었으나 수로가 정비되고 주위의 논밭이 개간되면서 작아졌다고 한다.      <중여>   주문마을 앞 남서쪽 약 1.5㎞ 지점에 있는 수중여인데 한 스님이 바다를 건너기 위하여 배가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젊어지고 있던 바랑을 내려놓았는데 이 바랑이 바닷물에 떠내려가는 것을 건지려던 스님이 빠져 죽어 여가 되었다는 설과, 나룻배를 타고 서포 쪽으로 건너가던 한 스님이 이 곳에 빠져 죽어 그 넋이 바위가 되어 간조시 물이 나면 중머리처럼 맨들맨들한 바위섬이 보인다하여 \'중여\'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설이 있다.   이 중여는 평소에는 물에 잠겨 있다가 바닷물이 제일 많이 빠지는 영동시에만 보이는데 그 위치를 알려면 서포쪽의 산을 가늠하여 그 위치를 알았다고 하며 이 여에는 민물이 솟는 샘이 있어 농어, 감숭어가 많이 서식하여 설낚기가 아주 잘 되었다고 한다.   남양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 (이백산 편저, 1996. 5 .1 발행) 87쪽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중여 : 숨은여>   용현면의 주문리 신평마을과 주문 본 마을의 중간 지점에서 바다 건너의 서포를 건너다보는 바다의 중간되는 지점 쯤에 숨어 있는 여를 중여라 하는데 여름에는 이 곳에서 배낚시를 많이 한다. 주로 낚시에 오르는 고기는 농어, 도미 등이라 들었다. 1980년도 여름 대포, 심포, 노례에 이르기까지 폭풍에 의한 대피해가 있을 때 여기서부터 바람이 일어났다.\"      <덩덕궁>   주문 바닷가에 있는 암초인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지리산에 살고 있는 산신(山神) 마고할미가 남해로 가다가 이 곳을 지나던 중 잠시 앉아 쉬었던 곳으로써 바위 위에 사람의 궁둥이가 꼭 들어맞는 모양의 자국이 있다. 그리고 이 덩덕궁에는 똥딴지라고 하는 구멍이 하나 나 있는데 금문에서 거문고를 타면 이 똥단지 구멍에서 덩더꿍 소리가 났다고도 전하는 일설(一說)이 있다.   약 4~50년 전의 이야기로는 이 구멍 속에 마고할미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호기심이 많은 한 젊은이가 머리를 들이밀고 구멍 안을 살피던 중 마고할미에게 끌려 들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어 12-3세의 어린 여자아이들이 하남개(금문마을 아래 바다)에 어른들이 캐 놓은 개발을 이러 가면서 이 덩덕궁의 똥단지 구멍을 들여다보고 \"마고할미 똥딱개\"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장난을 치고 도망을 갔다고 한다.      또한, 온정마을 부잣집 아들 한사람이 앞갯벌에 둑을 막아 뒷뻔득을 개간하려고 방천을 쌓기 위한 돌을 이 덩덕궁의 바위를 깨뜨려 사용할 수 있도록 당시 마을 구장에게 승낙을 얻었는데 이 승낙이 있은 후 구장의 집안이 편치 않아 굿을 하던 중 무당이 쏜살같이 덩덕궁으로 내달아 동네 사람들이 뒤따라 가보니 덩더궁의 마고할미가 \'아무리 동네 어른이라도 내 집을 부수는 자는 천벌을 받아야 한다.\' 고 주술을 하였으므로 이 일이 있은 후부터는 덩덕궁에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뒷뻔득>   주문 아래 바닷가에 있던 언덕배기인데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나갔다가 사람이 죽거나, 주문의 객주를 만나기 위하여 전라도 등의 객지 사람들의 왕래가 잦았는데 외지사람이 객사하거나 할 때 이 뻔득에 시신을 묻었다고 한다.   일제시대 뒷뻔득 밑에 있는 논을 일본사람 두 집이 관리하면서 이 뻔득에 뽕나무를 심기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 사람의 유골이 출토되기도 하였다하며 면적은 1000여 평이 넘었고 100m 정도의 대밭이 있었다고 한다. 이 뒷뻔득에 관한 이야기로는 서포로 건너가던 나룻배에서 어떤 스님주문동네를 바라보면서 뻔득 아래 갯가를 막으면 동네의 운세가 쇄신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였다고 하는데 그 뒤 인근 동네의 모 인사가 모래 언덕을 막아 농토를 만들고 난 뒤부터 주문마을에서는 출중한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도 있다.      <대밭>   아랫동네 북쪽에 있는 대숲이다. 뒷뻔득의 대밭으로 여겨진다.      <뒷강>   아랫동네 서북편에 있는 개(바닷가) 이름도 뒷강이지만 아랫동네 북쪽의 모래톱도 뒷강이라 한다.      <모래언덕>   뒷뻔득이 옛날에는 모래 언덕이였으므로 여기를 모래언덕이라 한다.      <가오리 새미>   아랫땀 앞에 있는 새미인데 이 새미의 물이 아주 차가워서 냉장고가 없던 시절에 배에 나가 고기를 잡아오면 이 새미에 넣어 두었다가 뒷날 사천장이나 진주장에 이고 가서 팔았다는데 주로 가오리를 많이 잡아넣어 놓았다하여 \'가오리 새미\'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고 \'가을새미\' \'가올새미\' 등으로 변음되어 불리기도 한다.      <할만네 새미>   아랫땀 남쪽으로 있는 새미였는데 물이 좋아서 2월 초하루 할만네 고사시나 평소 부녀자들이 치성을 드릴 때 이 새미의 물을 떠서 정한수로 사용하였다 하여 \'할만네 새미\'라 한다.      <초구 새미>   윗땀과 아랫땀 중간쯤에 있었던 새미로 지금은 독강을 묻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안새미>   새미 안이 옴빡하게 생겼다하여 \'안새미\'라 불렀으며 겨울에도 물이 따뜻하여 부녀자들의 서답 빠는데 좋은 새미였다고 한다.      <소뜩새미>   초구새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는 새미인데 이름의 연원은 알 수가 없다.   \'솟대새미’ 또는 ‘소태새미\'등으로도 불린다.      <땅개밭>   주문마을 남쪽에 있는 밭이 많은 들판이다. 주문과 신평사이의 들은 밭이 많은 편이였는데 경지정리를 함으로써 논으로 많이 전환 되었다.   옛날 이곳에 밭이 많을 때는 여름에 수박, 참외등을 많이 심었으므로 여름방학 때가 되면 수박, 참외서리를 많이 하던 곳으로 추억이 많는 곳이다.      <술도가터>   아랫땀에 있었는데 주문나루에 배가 많았을 때에도 객주와 어부들이 북적거리고 나룻배를 이용하는 왕래객도 많아 술도가가 호황을 누렸던 시절이 있었다한다.      <주문나룻터>   아랫땀의 옛날 구신머리 장이 서던 곳의 나룻터이다.      <장터>   주문나루가 한창 번창할 때에는 두메의 사람들과 해변가의 사람들이 모이는 곳으로 장이 섰는데, 지금의 최인생씨 집 부근이 장터였다고 한다. 주로 해산물을 비롯한 토산물이 거래되었는데 특히 대구가 많이 잡할 때에는 인근에서 제일 큰 장이 섰다고 한다. \'구신머리장\'이라고도 불렀다.      <마앙갈이들>   주문마을 동쪽에 있는 들의 이름으로 토질이 안 좋아서 마을이 망했다고 한글학회의 한국지명총람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남양의 역사와 문화 이야기」(이백산편저.1996.5.1발행) 65쪽에 \'주문리의 들판을 망갈이들이라 한다\'고 언급되어 있으나 불려진 연원은 알 수 없으며 \'마앙갈이들\'로 발음하고 있다.      <주문마을회관>   주문리 506-1번지에 위치하고 대지면적 44㎡에 브럭스라브 단층건물 42.98㎡를 1980년에 건립하여 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 신평(新平)      신평마을은 우리 면의 제일 남쪽에 있는 마을로써 웃신평과 아래신평으로 형성되어 있는 조그맣고 아담한 마을인데 옛날에는 밭이 많은 지역이었으나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고 백천저수지의 용수가 풍부하여 주위의 농토가 전부 논으로 변모하였다.   지리적으로는 대포동과 연접되어 있어 같은 법정리인 주문보다는 오히려 대포마을 사람들과 친분이 더 두텁다.   전국의 신평이라는 땅이름을 우리말로는 \'새벌\' \'새벌말\'이라고 부르는 곳이 많으나 여기의 신평을 새벌이라고 부르는 이는 없다. 바다가 가까워 농업과 어업이 병존하고 있으나 사천만의 수질 오염으로 해산물이 전과 같이 생산되지 않는다고 한다.      <웃신평>   신평마을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뒷골이라고도 한다.      <아랫신평>   신평마을 아랫쪽 갯가에 있는 마을이다.      <정피새미>   신평 웃동네 서쪽에 있는 우물이다.      <뒷골들>   윗신평을 뒷골이라 하는데 뒷골에서 주문쪽으로 새길(옛날에는철길이였으나 지금은 국도임) 아래의 들판을 \'뒷골들\'이라 한다.      <진새미>   뒷골들에 있는 새미인데 새미의 생김이 길쭉하게 생겼다하여 \'진새미\'라고 불렀으며 경지정리로 인하여 지금은 흔적도 없다.   여름철 꼴을 베던 어린아이들, 논을 매던 청장년들이 즐겨 멱을 감던 곳이었다고 한다.      <신평마을회관>   주문리 685-1번지에 위치하였으며 대지면적 97㎡에 시멘브럭스레트 단층건물 66㎡를 1976년에 건립하여 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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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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