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용현향토사



용현향토사

10. 금문리(琴聞里)   금문리는 면사무소에서 남쪽으로 약 1㎞정도 떨어져 있고 북으로는 송지리, 동으로는 덕곡리, 남으로는 주문리와 접해 있다.   1675년(숙종 1년 오가통의 사목에 의하면 사천현 9방면(坊面)중의 하나인 하남면에 속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진주부 사천군 하남면이다가 1896년 경상남도 사천군 하남면에 속하여져 있었다.   1907년 지방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하남면의 신금동(新琴洞), 금호동(琴湖洞), 신청동, 부곡동(釜谷洞)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칙령 제111호 군.면폐치분합에 따라 신금, 금호, 신청, 부곡동의 일부가 합하여져 읍남면 금문리라 하였다. 1931년 4월 1일 부령 제12호에 의한 면제의 개정으로 이 해 8월에 읍남면을 용현면으로 고쳐 용현면 금문리로 되었으며, 1995년 5월 10일 법률 제4948호의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사천시 용현면 금문리로 되었다.   금문은 신석기시대의 유구인 조개무지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무렵부터 사람이 거주하였음을 짐작할 수가 있으며 6~70년대에는 사천군내에서 1초전 2금문(사천군내에서 하나인 자연 마을로서 사남면 초전이 제일 크고 두 번째가 금문이라는 말임)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이백대촌(二百大村 ; 200호가 넘는 큰 마을)이였으나 산업화의 물결로 지금은 가구수는 별로 줄지 않았으나 다른 마을과 마찬가지로 젊은층이 대거 출타하고 나이 많은 노인들이 동네를 지키고 있다.

  • 금문(琴聞)      금문마을은 인근 동쪽에 있는 장터(부곡 ; 釜谷)마을에 하남장(下南場)이 서므로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고 사방(四方)으로 길이 나서 사람들의 왕래가 많으면 거문고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을이 될 것이라고 하여 마을 이름이 금문(琴聞)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하고 있으나 금문리의 지명은 \'검물\'에서 유래되었다고 본다. 검물은 검+물로써 \'검\'은 크다, 많다의 뜻인 고어인데 물이 많은 동네라 하여 검물이라고 불렀다고 본다. 와룡산의 북서면인 도솔골과 심적골의 물이 백천골에서 합하여 배치와 신덕을 거쳐 내려오는 희내의 물이 많아서 검물이라고 부르다가 금문으로 변하였다고 본다.   사천현여지승람 기묘수정책(숙종 25년 1699 발간) 형승조(形勝條)에 \'검물섬이 현 남쪽 25리(약 10㎞) 지점에 있다 검물섬\'(黔勿嶼 在縣南 二十五里)\'는 기록으로 보아 \'검물\'이 본래 지명인 것이 확실하다.   금문은 웃땀, 가운데땀, 용시내땀, 희내땀(헤내땀) 등 4개 땀으로 형성되어 있고 옛날에 외지(外地) 사람들은 이 동네를 하남(河南)이라고 불렀는데 하남면의 면소재지는 부곡(釜谷)이였을 것이라고 짐작하는바(사천군지 1990. 8. 30 발행. 170쪽 참조) 아마도 하남면내의 제일 큰 동네이므로 그냥 하남이라고 하면 검물을 지칭하여 그렇게 불렀던성 싶다. 부곡마을에 인접하여 있어 한 때는 온천 탐사로 열광을 받기도 한 곳이다.      <웃땀>   새 길(옛날의 철로로 지금은 국도임)가의 동네로 마을회관 위쪽을 통칭 \'웃땀\'이라고 한다.      <가운데땀>   마을회관 아랫쪽을 \'가운데땀\'이라 한다.      <용시내땀>   마을회관 북쪽편, 송지천 쪽으로 있는 동네를 ‘용시내땀’이라 한다.      <희내땀 ; 헤내땀>   희내(百川)가의 동서(東西)로 길게 쭉 뻗은 동네를 ‘희내땀’ 또는 ‘헤내땀’이라 한다.      <용시내>   송지천을\'용시내\'라고 부르고 있다. 옛날의 송지천은 물이 좋아 \'용왕(龍王)멕임\'을 많이 하였다고 하는데 이런 연유에서 용시내란 이름이 붙어졌는지 아니면 \'진송지(장송마을)\' 앞들에 있는 \'용새미\'와 연관이 있어 불러졌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용왕(龍王)멕임      용왕고사를 이 지방 사람들은 \'용왕멕임\'이라고 하고 있다. 대개 정초, 또는 매월 초하루날이나 보름날 새벽에 깨끗한 물이 있는 냇가나 우물가에다 소금 또는 밥 세그릇을 떠놓고 부인들이 직접 치성을 드린다. 주문은 한결 같지 않으나 대개 가장(家長)과 슬하의 자녀들의 건강이나 가업(家業)의 번창을 기원하면서 빈다.   (이백산의 남양의 역사와 문화이야기. 1997, 5, 1 재판 184쪽참조)      <새도랑>   헤내땀 아랫편에 길보다 낮게 깊이 파여있는 고랑으로, 만들어진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동네사람들이 부역(賦役 ; 국가나 공공단체가 국민들에게 의무적으로 책임을 지우는 노역 ; 勞役)으로 만든 인공(人工) 고랑인데 물이 아주 좋아서 동네 빨래터로 유명하였을 뿐 아니라 농업용수로도 중요한 수원(水源)이였다.      <도창(稻倉)집>   현재의 조용덕씨가 살고 있는 집으로 옛날에 나락을 쌓아 두는 커다란 창고가 있었던 자리라하여 \'도창집\'이라고 부른다.   철종13년(1862)부터 고종3년(1866)까지 집필된 대동지지 창고조에 \'남창(南倉) ; 하남면(下南面)에 있다.\'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 남창이 금문에 있었다는 도창이 아닌지 의구심을 가진다.      <참새미고랑(도랑)>   웃땀 남쪽에서 용시내땀 앞으로 흐르는 고랑을 말하는데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하여 \'물좋은고랑\'즉, \'참새미고랑(도랑)\'이라고 한다.      <희내 ; 헤내>   백천골의 여러 골짜기 물을 합수하여 신덕(덕곡)을 지나고 금문마을을 거쳐서 강지바다로 흐르는 내를 \'희내 혹은 헤내󰡑라고 부르는데 희내는 백천골에서 내려오는 물이라하여 흰백(白)자와 내천(川)자를 풀이하여 \'흰내\'라 하고 이 \'흰내\'가 \'희내\'로 변음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비가 많이 와서 큰물이 지면 백천골에서 내려오는 물이 신덕을 지나면서 물살이 세어지고 물길도 바르게 가지 않고 지그재그로 이쪽 저쪽의 하천 양 뚝에 부딛치면서 흐르므로 둑이 잘 터지기도 하였는데 물이 회오리처럼 헤우고 흐른다고하여 \'헤내\'라 부른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이백산의 앞의 책 54쪽를 보면 \'희내란 희다(白)라는 말과 내(川)라는 말의 합성인데 백천골의 심적골과 도솔골에서 내려온 물이 백천 동네 밑에서 만나 거센 줄기로 하얗게 변하여 내려 쏟아져 신덕(덕곡)을 지나서 금문을 거쳐 강지바다에 이르는 물을 부르는 이름인데 일설에는 옛날 백천에 스님들이 많이 살았을 땐 대중들의 밥을 짓는 쌀 씻는 물이, 골을 가득 메워 흘러 그 물이 하얗게 내려 왔다하여 희내라 하기도 한다\'고 기술되어 있다.      ※희내(흰내 ; 白川) 및 하남(河南 ; 금문을 하남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음)이라는 말은 경남향토사연구협의회에서 95년 11월에 발간한 \'경남향토사논총제4권\' 61쪽 와룡산의사화보존을위한조사보고서(이백산 기고)에도 언급되어 있다.      <도화들>   희내 건너 주문마을 쪽으로의 들판을\'도화들\'이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동화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도화들의 변음으로 여겨진다.   이곳 도화들은 날씨가 굳으면(좋지 않으면) 상여가 나가는 보습의 허화(虛火;옛날에 어른들이 도깨비불이라고 하는 헛불이 보이는 현상을 말함)가 자주 보여 옛날 금문에 살면서 풍수(風水)에 약간 식견이 있는 구씨(具氏) 성을 가진 한사람이 허화가 나타나는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부자가 될 것으로 믿고 집을 지어 살았으나 자기가 바라던대로 살림이 늘어나는 것도 아니고 자식들이 대성(大成)하지도 못하므로 남보기가 부끄러위 외지로 떠났는데 그의 후손들은 현재 전남 구례에 이거(移居)하여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이곳과 가까운 주문마을에서는 이 도화들을 중심으로 옛날부터 좋은 집(또는 규모가 큰 집)이 서거나, 좋은 소(농경생활의 재산목록 1호)가 나거나, 출중한 인물이 나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백산의 앞의 책 83쪽에 동화들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용현면 신덕(덕곡) 밑의 큰 들판을 동화들이라 한다. 이 곳엔 해마다 섣달 그믐날 밤이면 밝은 서기(瑞氣)가 크게 발산되는데 이것을 \'동화꽂\'이라 하여 지사(地師)들은 이 지점을 찾으러 모여드나 워낙 넓은 들인데다 서광이 일어난 지역이 들판인지라 정확한 곳을 찾을 수 없어 늘 이 들판 어딘가 쯤에 명당이 있는데 하면서 ‘반드시 훗일에 크게 될땅이다하고 관청이 들어서면 나라가 편안할 것이요, 사람이 사는 집이 들어서면 크게 될 터라’하는 전설이 전하여 오고 있다. 지금은 가로등 불빛으로 그믐날 밤이라도 밝기 때문에 볼 수 없지만 1950년대 이전에만 하여도 그믐날 밤이면 이 서기를 볼 수 있었다.\"      <서답새미>   신복균씨 집 앞의 샘으로 물이 따뜻하고 가뭄을 안타서 사계절 내내 서답 빨기에(빨래하기에) 아주 좋다고하여 \'서답새미\'라 부른다. 사천군지에 나오는 창새미가 이새미가 아닌지 의구심을 가진다.      <불메등 및 창새미>   사천군지(1990, 8, 30 발행. 사천군) 885쪽 덕곡리산성편에 보면 임진란(壬辰亂) 때 백천골에 있던 백천사(白川寺)의 의선대사(義善大師)가 이끄는 승병(僧兵)들의 무기를 만들던 대장간이 금문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 문의한바 아는 사람이 없어 취재시에는 채록하지 못하였다.      <금문마을회관>   금문리 567-3번지에 위치하여 대지면적 189㎡에 철근콘크리트스라브 단층건물 198.35㎡를 1980년 건립하였다. 마을회관으로 132.23㎡, 경로당으로 66.12㎡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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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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