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용현향토사



용현향토사

9. 송지리(松旨里)   송지리는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용현초등학교, 농협, 예비군면대 등 행정기관의 소재지로서 북으로는 석계리와 온정리, 동으로는 구월리, 남으로는 덕곡리와 금문리에 접하여 있다.   1675년(숙종 1년) 오가통(五家統)의 사목(事目)에 의하면 사천현(泗川縣) 9개 방면(坊面) 중의 하나인 하남면(下南面)에 속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에 의거 진주부(晉州府) 사천군(泗川郡)의 하남면이다가 1896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사천군 하남면에 속하였다.   1907년 지방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하남면의 평송동(坪松洞), 신송동(新松洞), 장송동(長松洞)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군∙면폐치분합에 의거 읍남면 송지리(松旨里;신송, 평송, 장송동)로 되었으며, 1931년 4월 1일 부령 제12호에 의한 면제 개정으로 이 해 8월 읍남면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고쳐 용현면 송지리로 되었다.   1995년 5월 10일 법률 제4948호의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사천시(泗川市) 용현면 송지리로 되었다.   \'송지(松旨)\'라는 지명은 \'작은 산이 있는 마을\' 즉 \'솔마루\'의 훈차(訓借)이다. \'솔\'은 가늘고 뾰족하다. 작다. 좁다(경상도 방언으로 \'솔다\'라고 한다)의 뜻인 우리말이며 \'마루\'는 산을 뜻한다. 그러므로 송지의 솔송(松)자는 \'솔\'을 소나무로 보아 솔송(松)자를 빌었고, 산을 뜻하는 마루지(旨)자를 빌어 송지라고 하였는데 소나무는 현재의 지명과 상관없고 오계산에서 장송까지 작고 긴 산이 있는 지형으로 보아 \'솔마루\'가 맞음을 밝혀두는 바이다.   송지에는 고인돌 1기와 가야시대의 고분인 돌널무덤군(13기)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B.C.3~2세기경에 사람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 신송(新松)   면사무소, 파출소, 우체국, 초등학교, 예비군면대, 농협 등 용현면의 중추적인 행정기관이 집중하여 소재하고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오동지\'라고도 불렀고 장시, 띠앗몰, 새땀으로 형성되어 있다.   1909년 12월 개통된 국도 3호선이 1971년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1974년에 포장이 마무리 되고 1979년부터 소도읍가꾸기를 하여 8m의 도로가 12m로 넓혀졌으며 주택도 개량하여 도로변에는 대부분 2층 상가를 배치하므로서 면소재지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신송마을 서쪽에 있던 철도를 걷어내고 자동차도로로 만들어 국도로 지정하여 기존의 국도는 1998년부터 군도로 격하되어졌다. <오동지>   현재의 송지천 방천은 일제시대에 막은 것으로 이 방천이 생기기 전에는 지금의 마을회관 앞에 오동나무 숲이 있어 \'오동지\'라고 했다. 방천을 막기전 홍수가 나면 송지천의 물길이 이리저리 바뀌어지곤 하였는데 당시에는 누에를 많이 기르는 때라 하천 가운데 있던 뽕밭을 서로 차지할려고 신송, 평송 두 동네간에 다툼도 상당히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밭도 없어지고 누에도 치지 않아 사라진 이야기가 되었다. 오동지를 한자식으로 \'오동정(梧桐亭)\'이라고 표기하는 이도 있어 땅이름의 한자식 표기에 대하여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으로 안다. <장시>   현재 농협이 위치해 있는 부근으로 진삼국도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약간 높은 구릉지대로서 육고개에서 넘어오는 고개마루였는데 이곳에 장승이 서 있어 \'장승거리\'라고 불리던 것이 변음되어 지금은 \'장시\'로 불리고 있다. 또한 이곳에는 토산물을 거래하던 장이 섰다고 하는데 후에 부곡으로 장터가 옮겨갔다고 한다. (부곡으로 장이 옮긴 것은 한글학회가 만든 한국지명총람에서는 조선조 철종시대(1849년 6월~1863년 12월)였다고 하고 있고, 순조 32년(1832)에 간행된 사천현읍지의 장시조에 \'하남장 ; 하남면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1832년 이전에 이미 장이 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지금부터 약 170여 년 전의 일이다.   여기에 있었던 장승에 대하여 고증이 되는대로 옛모습 그대로의 장승을 다시 세우는 것이 용현조기회에서 하여야 할 또 하나의 과제일 것이다. <새땀>   일제시대 송지천 방천을 막아 물길을 바로 잡음에 따라 띠앗몰 앞의 낮은 지대에도 인가가 들어서기 시작하여 동네를 형성하였는데 옛날부터 사람들이 살던 장시, 띠앗몰에 비하여 늦게 생긴 땀이라 하여 \'새땀\'으로 불리어졌다. <띠앗등>   오계산(구월리 공동묘지가 있는 산)에서 현재 용현초등학교 쪽으로의 예전 지형이 구릉(언덕)지대로써 논으로 일구어지기 전에는 떼(잔디)밭으로 되어 있었는데 연유하여 \'떼밭등\'이라 불려졌는데 \'떼밭등\'이 변음되어 \'띠앗등\'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함안조씨의 재실인 \'모전재(茅田齋)\'라는 편액도 떼밭등에 연유(緣由)하여 명명되어진 것이다. <띠앗몰>   띠앗몰 앞의 동네로 현재의 용현초등학교 앞에서 동남 방향으로 길게 형성되어진 동네 이름이다. <띠앗몰고랑>   띠앗몰 앞의 고랑으로 물이 맑고 그 양도 많았다. 지금부터 30여년 전만 하여도 흘러내리는 물을 그대로 식수로 사용할 만큼 깨끗하였으며 겨울에도 얼음이 얼지 않아 빨래하기에 좋은 곳이였다. 30~40여 년전 용현초등학교 학생들이 용의검사를 하는 날이면 학급 전체가 이 고랑에 가서 세수도 하고 손등의 때도 벗기던 곳이다. <산소등>   오계산에서 띠앗등 옆으로, 마드리 올라가는 길쪽으로 뻗은 산줄기에 묘가 많이 들어가 있다고 하여 \'산소등\'이라 한다. <오계산>   구월리 공동묘지가 있는 산이다. 풍수설에 따르면 남쪽에서 보면 다섯 마리의 닭 형상과 같다고 하고, 마드리쪽에서 볼 때는 소가 누워 있는 형상으로 와우산(臥牛山), 또는 소의 머리형상이다 하여 우두산(牛頭山)이라고 부른다. <디앗등못>   오계산 앞에 있던 못으로 1958년 용치저수지가 축조되고 송지로 가는 용수로가 이 못으로 통과하므로서 폐쇄되고 말았다. 1935년 이후에 간행(刊行)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조선시대사천환여지승람(朝鮮時代泗川寰輿地勝覽)에 보면 \'저수지재군남용현면송지리 심십육척면적칠만삼천평 몽리면적백이십오만평. (貯水池 在郡南 龍見面 松旨里 深十六尺 面積七萬三千坪 蒙利面積百二十五萬坪) 저수지; 군 남쪽 용현면 송지리에 있고 깊이는 16척(4.9m), 면적은 7만3천평, 몽리면적은 125만평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이터>   궁개미와 장시 사이를 사이터라 한다. <섬땀>   지금의 송지천 교량이 있는 부근으로 방천이 생기기 전 띠앗몰 앞과 대밭담(평송마을)앞 양쪽으로 하천이 흐르고 있어 가운데 삼각지처럼 섬이 된 위치에 있었던 동네를 \'섬땀\'이라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새땀과 한 동네가 되어 구분하기가 어렵도록 연이어져 있다. <박석거리>   국도가 생기기 전에는 학교앞 띠앗몰 고랑에서부터 대밭담 입구까지가 지대가 낮은 하천으로써 이 하천을 건널 수 있도록 박석(薄石:넓고 얇게 뜬 돌)을 깔아 사람과 우마차가 다니도록 만들어져 있어 \'박삭거리\'라 하였다. <송지다리>   신송과 평송사이의 송지천에 있는 다리이다. 다리 주위를 \'다리거리\'라 하기도 한다. 사천시생활정보지도(1997. 10. 사천시장 발행)에는 용현1교라고 되어 있고 국도의 다리는 용현2교라고 되어 있는데 이런 이름은 어디서 나온 전거인지 알 수 없다. <송지천>   용니미에서 발원하여 개재, 댕밑, 오동지앞을 거쳐 강지바다로 흘러들어 가는 하천이다. <수청거리>   박석거리와 같은 지역의 地名으로 송지천에 흐르는 물이 하도 맑아 \'수청(水淸)거리\'라고도 불렀다. 송지천은 물이 맑을 뿐만 아니라 수량(水量)도 풍부하여 삼(대마)을 삶는 삼솥이 많이 걸려 있었다고 한다. <궁개미>   신송에서 육고개로 가기 전, 현재의 육구암 맞은편 국도 서쪽편의 야트막한 산을 \'궁개미산\'이라 하는데 한자로는 \'궁장산(弓藏山)\'이라고 표기하고 있다. 일설에는 옛날 이 곳에는 활을 보관하던 거가(巨家)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인할 수 있는 길은 없고 한자표기나 현재 불리는 이름으로 보아 활과 관련있는 지명이 아닌가 추측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궁가뫼\'가 \'궁개미\'로 변음되지 않았나 추측도 해본다. 궁가뫼는 풍수지리적으로 궁가(宮家) 즉, 궁실이나 아니면 소지역의 치소(治所)가 있을만한 지형이라서 이런 땅이름이 붙혀지지 않았나 추측한다. <칠성바위>   함안조씨의 재실 모전재(茅田齋) 뒤편 묘지 벌안의 바위와 지금은 치워지고 없지만 그 옆 길가 논에 있었던 바위, 그리고 고동골(금구마을의 일부로 구월쪽으로 산아래에 있는 동네임)로 가는 길의 중간, 벼락터거리에 있는 바위(이 곳 바위는 경지정리를 하면서 치워져 한쪽에 묻혀 있음)들이 띠앗등을 타고 올라 오면서 어떤 선상(線上)을 그리며 위치하고 있는데 이 바위들을 \'칠성바위\'라고 하고 이 바위중 현재는 두 곳의 바위가 당초 있던 자리에서 다른 장소로 옮겨져 있는데 이를 옮긴 사람의 집안에는 재앙을 입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일설에는 이 칠성바위는 용머리의 이장군이 봉대산과 와룡산을 오가면서 팔매질을 하던 바위라는 이야기도 있으나 지석묘군(支石墓群)일 것으로 판단되어 진다.

<신축하기전의 면청사>

<면사무소>   우리면의 전신(前身)인 중남면의 면소(面所)는 개머리(신촌리의 김이수댁 부근), 하남면은 부곡에 있은 듯하며 중남면과 하남면을 합한 읍남면의 면소(面所)는 육고개(현 조석조씨 산소부근)에 있었다.

<현재의 면청사>

  오늘날 용현면사무소는 송지리 228-1, 227-6, 227-7, 227-8, 201-9, 201-6번지의 6필지에 위치하고 있다.   1937년 공사비 1,234원(圓)으로 목조와가 39평을 건축하여 면사무실로 사용하다가 1966. 8. 청사 신축을 하기 위하여 구건물을 매도, 멸실시키고 새건물을 평가건 시멘트블럭조 스레트즙 1동 65평으로 신축하였으며 현재의 건물은 1988. 8월에 구청사를 헐고 214평 규모의 2층 철근콘크리트스라브 건물을 신축하여 1989. 4. 1 준공식을 갖고 집무(執務)를 시작했다. 역대 용현면장은 1대 신 건(1914.~1940. 2) 2대 신병의(1940.~1949. 3) 3대 최호경)1949.~1950. 12) 4대 박봉진(1950.~1952. 3) 5대 오성근(1952.~1955. 8) 6대 최호경(1955.~1959. 9) 7대 이싱우(1959.~1960. 11) 8대 박봉인(1960.~1961. 6) 9대 강영관(1961.~1969. 1) 10대 조용현(1969.~1978. 5) 11대 신환식(1978.~1979. 4) 12대 조장성(1979.~1984. 6) 13대 신환식(1984. 1985. 9) 14대 박계진(1985.~1995. 6) 15대 남위현(1995.~1996. 6) 16대 박한욱(1996.~1998. 9) 17대 김영의(1998.~현재)

<용현초등학교>   송지리 186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교지(校地)는 총 14391㎡, 운동장 11207㎡, 교재원 1205㎡, 교실은 21실이며 학생수는 1999년도 현재 남자 75명, 여자 45명으로 120명이고 유치원에는 남자 8명, 여자 7명으로 15명이며 교직원수는 교사 11명, 일반직 6명으로 17명이다. 1926. 10. 5 읍남보통학교로 개교하여 1931. 6. 4 용현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을 개칭하고 1938. 4. 1 수업연한 6년의 용현공립심상소학교로 개칭, 1941년 4. 1 용현국민학교로 개칭하고 1981. 1. 31 병설유치원을 개원하였으며 1996. 3. 1 용현초등학교로 개칭하여 1999. 2. 20 제73회 졸업식을 가졌으며 총 6,61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게 되었다. 역대 교장은 1대 伊地知傳助 (1926. 8. 31~1928. 4. 24) 2대 村山仲助 (1928. 5. 6~1934. 3. 31) 3대 中岡信雄 (1934. 3. 31~1939. 2. 10) 4대 岡野基式 (1939. 2. 10~1942. 4. 1) 5대 日下理三 (1942. 4. 1~1944. 5. 15) 6대 富松忠重 (1944. 5. 15~1945. 8. 15) 7대 유도선 (1945. 11. 30~1950. 6. 5) 8대 박인홍 (1950. 6. 5~1957. 8. 10) 9대 정학용 (1957. 8. 10~1959. 10. 28) 10대 임성택 (1959. 10. 28~1960. 9. 28) 11대 하한철 (1960. 9. 28~1962. 3. 3) 12대 최주경 (1962. 3. 3~1966. 10. 15) 13대 손병두 (1967. 1. 21~1970. 4. 1) 14대 주종철 (1970. 4. 1~1971. 9. 1) 15대 정학용 (1971. 9. 1~1977. 8. 31) 16대 하영청 (1977. 9. 1~1982. 9. 1) 17대 신정희 (1982. 9. 1~1987. 8. 31) 18대 강경왕 (1987. 9. 1~1992. 2. 29) 19대 양재열 (1992. 3. 1~1995. 9. 1) 20대 김은수 (1995. 9. 1~1999. 8. 31) 21대 최창민 (1999. 9. 1~현재)

<파출소>   송지리 231-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20년대 읍남면을 용현면으로 개칭됨에 사천경찰서 용현지서로 있다가 1945. 8. 15. 사천경찰서가 삼천포경찰서로 개명됨으로 삼천포경찰서 용현지서로 개명되었다. 1981. 6. 19 대지 149평에 연건평 203평(지하1층)으로 시멘트벽돌 스라브조로 신축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고, 1995. 1. 27 용현지서에서 용현파출소로 개명되었고 동년 7. 13 삼천포경찰서가 사천경찰서로 개명됨에 사천경찰서 용현파출소로 개명되었다. 역대 파출소장은 1대 김형찬 (1975. 11. 27~1978. 3. 2) 2대 장우현 (1978. 3. 2~1979. 9. 18) 3대 정인식 (1979. 9. 18~1982. 7. 7) 4대 임종근 (1982. 7. 7~1983. 7. 16) 5대 진기철 (1983. 7. 16~1983. 8. 2) 6대 김문태 (1983. 8. 2~1985. 7. 6) 7대 류지철 (1985. 7. 23~1987. 4. 22) 8대 임용규 (1987. 4. 22~1989. 12. 7) 9대 강임수 (1989. 12. 7~1992. 2. 13) 10대 손진생 (1992. 2. 13~1994. 3. 12) 11대 심재관 (1994. 3. 14~1995. 8. 30) 12대 김문태 (1995. 8. 30~1997. 3. 4) 13대 지호덕 (1997. 3. 5~1998. 4. 24) 14대 안도일 (1998. 4. 24~1999. 9. 27) 15대 천창환 (1999. 9. 27~현재)

<우체국>   송지리 200-3번지에 위치하고 있고 1967. 6. 28 사천우체국 용현분국으로 개국하여 1968. 10. 1 용현우체국으로 개칭되었다. 역대 우체국장은 1대 송동준, 2대 강개석, 3대 유재권, 4대 마길현, 5대 박한금, 6대 김천호, 7대 강상덕, 8대 공문주이다.

<보건지소>   송지리 201-6번지외 3필지에 위치하고 있고 1963. 1. 1자로 설치되었으며 사업비 4천5백만원으로 남한건설이 사업을 맡아 1986. 6. 26. 착공하여 9. 23에 완공하여 11. 15 준공식을 가졌다. 건평 74평(1층 45평, 2층 29평)의 철근콘크리트스라브 건물을 신축하여 1층은 보건지소, 2층은 농촌지도소 용현지소로 사용하였다.   내과, 소아과, 치과 등을 진료하며 의사는 군복무 수련의로서 대행케하고 있고 진료원 3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역대 지소장은 1대 이윤구(1984. 5~1987. 4) 2대 노순기(1987. 5~1990. 4) 3대 모현철(1990. 5~1992. 4) 4대 황 호(1992. 5~1995. 4) 5대 송용환(1995. 5~1997. 4) 6대 김승우(1997. 5~1999. 4) 7대 정 현(1999. 5~현재) <농민상담소>   송지리 228-1번지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1974년 사천군농촌지도소 용현지소로 개소하여 1986년 9월 철근콘크리트스라브 2층 건물을 지어 1층은 보건지소, 2층은 용현지소로 활용, 1991년 4월 사천군농촌지도소 용현면농민상담소로 개칭하였는데 1998년 정부의 행정기구 구조조정으로 농민상담소를 폐쇄하였다.

<용현농협>   송지리 201-1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관할구역은 12개 법정리동에 22개 영농회로 조직되어 있고, 임직원은 조합장 1명, 이사 6명, 감사 2명으로 임원 9명과 상무를 비롯한 직원 26명, 조합원수는 1,415명, 준조합원수 1,130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농협 운영지표는 조합원 실익증대에 역점을 두고 보다 더 풍요로운 농촌을 만들기 위해 열과 성을 다하고 있다. 1. 역대 조합장 1~2대 조합장 조성갑(1969. 8. 11~1974. 10. 27) 이사 : 이신우, 전갑석, 이종길, 이재수 감사 : 이도식, 유기열

  • 1969. 8. 11 선진리외 11개 리동조합 합병하여 용현단위농협으로 발족
  • 1970. 8. 10 농협연쇄점 개점
  • 1970. 11. 1 도정공장 설치 및 가공사업 실시
  • 1971. 8. 23 송지창고(100평) 건립
  • 1972. 11. 1 군조합으로부터 비료 및 영농자금 업무 인수
  • 1972. 12. 30 선진, 송지 양곡창고(100평)건립)
2. 3~4대 조합장 김윤석(1974. 10. 28~1980. 7. 31) 이사 : 이신우, 이도식, 조성모, 오필근, 문호경, 조성갑, 이종길 감사 : 전갑석, 정영봉, 김이수
  • 1976. 3. 8 평기 양곡창고(100평 건립)
  • 1980. 6. 23 선진 비료창고(50평) 건립), 농약창고(8평), 유류취급소(10평) 건립
  • 1980. 7. 31 금문, 부곡 맥주창고(100평) 건립 농기구센타(20평) 건립
3. 5대 조합장 이종길(1980. 8. 1~1984. 4. 30) 이사 : 박동원, 오필근, 조성갑, 신연갑, 문호경 감사 : 정영봉, 이명호
  • 1983. 4. 25 도정공장 폐쇄
  • 1984. 2. 20 종합청사(113평) 건립)
4. 6~7대 조합장 신중균(1984. 5. 1~1990. 2. 11) 이사 : 김용일, 이석환, 박중철, 강백호, 신영갑, 문병태, 문옥표, 조영세, 김일문 감사 : 이명호, 강기상, 최노협, 신재희
  • 1987. 8. 26 유류취급소 신축 및 증축
  • 1989. 8. 26 온라인업무 개시
5. 8~10대 조합장 문창열(1990. 2. 12~현재) 이사 : 신원길, 조찰규, 이석환, 문옥표, 강영호, 박명수, 조영부, 강백호, 송무성, 박병진, 조명제, 신무용 감사 : 박학진, 이춘영, 강기상, 강복안
  • 1990. 2. 11 초대 민선조합장선거 실시
  • 1990. 11 농협최초 일반벼 자체수매
  • 1991. 9. 14 농기계서비스센타 개점(직영, 무상수리)
  • 1991. 11. 6 선진 창고(50평) 건립
  • 1992. 4. 1 농촌형 백화점식연쇄점 개장(농민회관 인수 114평)
  • 1993. 3. 27 새농민대회 개최
  • 1994. 9. 파이프정형기 제작 홍보
  • 1995. 5. 25 공동퇴비제조장 준공(부지 1,530평, 건물 475평)
  • 1996. 2. 15 종합시설 2층 증축(113평)
  • 1996. 7. 20 하나로주부합창단 창단
  • 1996. 10. 2 전국지도사업개혁 조합장상 선정
  • 1997. 8. 12 한국형 공정육묘장 준공(와이드스판형 철골 유리온실 1,500평)
  • 1997. 10. 23 제1회 아이디어박람회 우수발명왕 수상(파이프정형기)
  • 1997. 10. 28 식물 조직배양실 운영(화걍 액아 조직배양)
  • 1999. 5. 25 대산 농촌문화재단 농촌봉사상 수상
  • 1999. 11. 22 토양진단센타 운영

<예비군면대>   송지리 199-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8. 4. 1 향토예비군 용현면 중대가 창설되어 1972. 7. 30 지역주민 및 예비군 기탁금으로 우체국옆에 13평의 중대본부를 신축하였으며 1982. 4. 1 향토예비군 용현면대로 개칭, 1991, 12, 28 구청사가 노후되어 정부지원 및 주민기탁금으로 현 위치에 30평 규모의 철근콘크리트스라브 청사를 신축하였다.   역대 예비군 지휘관은 초대 신원길(1968. 4. 1~1977. 11. 13), 2대 조중근(1977. 11. 14~1985. 8. 31), 3대 배병재(1986. 9. 1~1991. 7. 16), 4대 최상근(1991. 7. 16~현재)이다. <농민회관>   1979년에 건립한 건평 1백평의 농민회관은 당시의 경남도지사였던 조병규(금문 출신)씨의 배려로 지어졌는데 주민교육, 회의장으로 사용됨은 물론 연간 30쌍 정도의 결혼식이 베풀어지는 다용도 건물이되어 대단한 자랑거리였으나 관리 문제로 92. 4. 1부터 용현농협에서 임차하여 현재는 생필품 판매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금문역>   옛날 철도가 개설되어 기차가 다닐 때 승객만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간이역이였다. 지금의 국도에서 신송마을로 진입하는 길 부근이다. 역 소재지는 신송인데, 역 이름은 금문역으로 된 까닭은 아마도 힘의 논리에 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신송마을회관>   송지리 279번지의 대지면적 1299㎡에 브럭스라브 2층건물로 회관 109.09㎡, 경로당 80㎡ 합계 189.09㎡로 1980년에 세워졌다.

• 장 송(長松)   오계산에서 서쪽으로 뻗어내린 구릉 남쪽으로 길게 동네가 형성되어져서 \'진송지\' 또는 그냥 \'송지\'라고도 불리고 있으며 지금의 마을회관을 경계로 하여 웃땀, 아랫땀으로 구분되어진다.   장송은 사천만의 풍부한 해산물(굴, 바지락, 꼬막 등)과 농경지가 넉넉하여 일찍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음을 마을 뒤편 구릉에서 발견된 지석묘와 돌널무덤(석관묘 : 石棺墓)의 유적으로 알 수 있다.   장송에는 충주지씨, 냠양홍씨, 남평문씨, 평산신씨 순으로 입향(入鄕)하였다고 하나 지금은 충주지씨는 거주 하지 않는다. 약 십여 년전부터 청년들이 주축이 되어 토마토 영농법인을 설립하여 용현명품 토마토를 생산하고 있으며 장송 앞들은 완전히 비닐하우스 집단지로 바뀌어져 있다. 마을 뒤편에는 대나무가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을 뒤편 언덕이 낮아 겨울에 매서운 북풍이 불어오므로 이를 막기 위한 방풍림으로 심은 대나무가 많이 있다. <통새미>   동네 뒤편 철길 아래에 있는 샘을 말하는데 샘가의 흙이 허물어지지 않도록 나무통을 묻어 만들었다 하여 \'통새미\'라 부르고 있다. 이 샘은 큰 비가 와도 그렇고 아무리 가물어도 물의 양(水量)이 변함이 없으며 마을내 개인 우물이 생기기 전에는 웃담의 중요한 식수원이였고 또한 물이 풍부하여 농업용수로도 아주 유용한 샘이었다. <앞들>   동네 앞 남쪽에 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이다. <언안골>   동네 뒤편의 구릉 북쪽 통새미가 위치해 있는 골짜기를 \'언안골\'이라 부르며 양쪽의 구릉이 방죽처럼 되어 있어 \'언(堰)안골\'이라고 한다. <짐승재>   언안골 동쪽 철길 위의 골짜기를 \'짐승재\'라고 불리우는데 주변의 오계산(다섯 마리의 닭이 있는 형상)과 육구산(어미개가 여섯 마리의 강아지를 품고 있는 형상)의 이름 때문이 아닌가 생각되어진다. <고래이들>   앞들을 건너 금문마을 쪽으로 송지천 주위의 들판을 말한다. 내천가의 들이라 하여 \'냇고랑가의\' \'고랑가들\'이 변음되어 \'고래이들\'이라 하는지는 확인할 수 없다. 물빠짐이 좋지 않아 늘 물이 고여 있었다고 한다. <용새미>   앞들에 있는 샘으로 둘레가 약 30m 정도되고 깊이가 3~4m 되었으며 옛날 두레채 2개를 차려 24시간 물을 퍼도 줄지 않아 농업용수로 절대적 가치를 발휘하였던 곳이나, 경지정리를 함으로써 용치저수지의 수로가 잘 정비되어 관개함으로 지금은 조그맣게 축소되어 그 흔적만 남아 있다. 여름철에는 송지리 3개 마을 뿐 아니라 인근 마을에 사는 하동(夏童)들의 멱을 감는 곳으로 유명했으며 발가벗고 멱을 감던 어린날의 추억을 되새기게 하는 곳이다. 옛날에 이 새미에 살던 용이 등천(登天)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도래새미>   용새미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경지정리시 매립하여 지금은 그 흔적도 없다. 새미의 물이 북쪽으로 난 고랑으로 흘러 돌아나갔다고 하여 \'도래새미\'라고 부른다. <갯새미>   장송마을 제일 끝에 있는 김상길씨 집 앞 종개방천이 시작되는 지점의 빨래터에서 아래쪽으로 바다 가운데 있는 샘인데 바닷물이 나면 이 샘에서 솟아나는 민물을 식수로 이용하였다고 한다. 지금은 흔적도 찾을 수 없지만 그 당시 개인 우물을 파기 전에는 아랫땀의 중요 식수원이기도 하였다 한다. <흙굼티>   장송마을 뒤편의 구릉이 끝나는 위치인 김상길씨 집 뒤편을 \'흙굼티\'라 하는데 일제시대 종개방천을 막을 때 여기의 흙을 파서 공사를 하였다 하여 흙굼티라 하고 서택이란 일본인이 방천을 막아 간척지의 논을 소작농에게 분배하여 거둬들인 소작료를 김경태씨 집 뒤편에 있던 50여 평의 창고에 보관하다가 바닷물이 한사리(매달 음력 보름날과 그믐날에 조수가 가장 높이 올라 오는 때. 조금의 반대. 우리 지방에서는 \'한시\'라고도 한다)가 되면 범선이 들어와 곡물을 싣고 일본으로 수송하였다 한다. <송지방천>   송지에서 종개까지의 일본인 서택이 축조한 방천이다. 1935년에 축조하기 시작하여 1945년에 완공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사천환여지승람(朝鮮時代泗川寰與地勝覽) 산천조에 \'방파제 재용현면 송지리 고이십육척 장육백이십간 防波堤 在龍見面 松旨里 高二十六尺長六百二十間)\'으로 높이가 7.9m(1척=0.303m), 길이는 1127.16m(1간=1.818m)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택이농장>   송지방천을 막음으로 조성된 간척지를 \'서택이농장\'이라고도 하고 \'갯논\'이라고 하는데 용정쪽에서는 \'간사지들\'이라고도 한다. <북해도>   장송마을 구릉 뒤편에 옛날 문정봉씨라는 분이 살고 있는 집이 한 채 있었는데 집이 북향으로 앉아 있어 겨울철이 되면 북풍을 정면으로 맞으므로 엄청나게 추워서 \'북해도\'라 불렀다. <송지뒷등>   장송 북쪽에 있는 등성이를 다른동네 사람들은 \'송지뒷등\'이라 하고, 송지사람들은 그냥 \'뒷등\'이라고 한다. <건너등>   통새미 북쪽의 작은 등성이를 건너등이라 하고 아주 옛날에 동네가 이곳에 형성되어 있었는지 지금도 기와조각, 생활토기조각 등이 나오기도 한다. <궁개미꼬레이>   장송 북쪽, 용정마을 쪽에 있는 곳으로 간척하여 논이 되었다. <염전터>   종개방천을 막기 전에는 바닷물이 통새미 부근까지 올라왔다고 한다. 흙굼티를 돌아가면 현재의 논보다 약간 높은 둑이 있는데 이 곳이 염전이였고 소금 굽는 가마도 걸려 있었다고 한다. <언안골 물고랑>   영모재 앞으로 흐르는 송지고랑에서 시인 정동주씨 집으로 들어가는 길 바로 아래의 조그마한 고랑인데 언안골의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동네 사람들이 동원되어 고랑을 파고 있을 때 어떻게 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으나 피 빛깔의 물이 쏟아져 나왔다고 한다. 이 일이 있은 후부터 큰 인물이 나지 않고 동네의 운세가 쇠퇴하였다고 하는 이야기가 전하고 있다. <장송마을회관>   송지리 369번지에 위치하고 부지면적은 320㎡이며 철근콘크리트 단층건물로 1993년에 회관 119.22㎡, 경로당 16.2㎡ 합계 135.42㎡로 지었다.

• 평송(坪松)   송지천 남쪽에 동서로 길게 형성된 마을로 옛날에 대밭이 많아 「대밭땀」이라고 부르고 있다.   앞땀, 뒷땀의 2개 땀으로 있었으나 지금은 거의 구분되어지지 않고 연이어져 있다. 앞땀에 먼저 인가가 들어서 취락이 형성되었다가 송지천의 방천 축조로 홍수를 막을 수 있게 되자 한 집 두집 인가가 늘어나 송지천 쪽으로 가옥이 들어섰는데 이쪽을 뒷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금구 앞산의 각선당먼당에서 내려다 보면 평송마을의 지형이 돛을 단 배가 강지바다를 보고 내려가는 형국이였다고 하는데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철도에 막혀 멈춰 서 버렸다고 한다. 그래서 그 후로 마을에 우환이 많이 생겼고 인재(人才)도 나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대밭땀>   지금은 대나무 한 그루도 찾아볼 수 없으나 약 100여 년 전만 해도 대밭이 많이 있어 \'대밭땀\'이라는 이름이 불러졌다고 한다. <앞땀>   평송마을의 앞쪽, 즉 남쪽에 형성되어진 마을이다. 지금은 평송마을 전체가 한 마을처럼 붙어 있지만 앞땀이 먼저 형성되고 뒷땀이 나중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불건디>   대밭땀 입구에서 남쪽으로 가다보면 부곡마을과 중간 지점으로 국도변의 산모퉁이가 있는 곳을 \'불건디\'라고 부르는데, 대밭땀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부시몰(浮屍마을 : 시체가 뜨는 형상의 지형인 마을)이 부시멸→불건디로 변음되어졌다고 하며 이 동네 이름 때문인지 남쪽으로 공동묘지가 있음은 우연이 아닌 것 같다고 한다. 그러나 \'불건디\'라는 말은 흙 빛이 붉은 버덩(높고 편편하고 나무가 없이 풀만 난 땅)인 \'붉은디기\'라는 순우리말 고어가 변천하였음을 알아야 할 것이다.(배우리의 「우리땅 이름의 뿌리를 찾아서 1권」 1994. 5. 23. 토담. 267쪽 참조) <소년골>   불건디에서 언덕을 따라 금구마을 쪽으로 조금 올라가는 곳에 있는 골짜기를 말한다. 옛날 봉곡(鳳谷)이라는 마을이 있었던 곳이다. <오미등>   \'독뫼등\' 또는 \'똥맷등\'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대밭땀 마을 앞의 조그마한 산 같이 생긴 봉우리를 말하는데 \'오미등(烏尾嶝)\'이란 이름은 까마귀의 꼬리와 같이 생겼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까마귀가 꼬리를 들고 불건디의 떠오르는 시체를 보고 있는 형국의 지형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이야기 하고 있다. <오미들>   오미등 앞 남쪽으로, 부곡마을과의 중간 들판을 말한다. <평송다리>   평송 남쪽에 있는 다리로 길이 5m, 폭5m, 높이 1.5m이며 1971년 6월 8일 준공되었다. <수통고랑>   평송마을 앞 들판에 있었던 고랑인데 경지정리를 함에 따라 없어져 버렸다. <뒷땀>   평송마을 뒤편 즉 송지천쪽으로 형성된 마을이다. <뒷땀고랑>   마을 뒤편, 송지천을 따라 있었던 고랑이다. <벼악목새미>   오미들에 있었던 샘으로 물이 아주 좋아 오미들의 농업용수원이였다. 장송 앞들의 용새미와 견줄만한 좋은 새미였으나 경지정리를 함으로써 지금은 우물처럼 흔적만 남아 있다. 오미들에는 벼악목새미 외에 \'꽃바구새미\', \'소꾸리새미\'등 유명한 샘이 3개나 있었으나 이 두 곳은 흔적도 없고 용치저수지의 물이 오미들까지 오기에는 다소 부족한 편이여서 다시 샘을 파자는 이야기도 있다고 한다. <용현극장>   정기나무거리에서 불건디쪽으로 가는 길의 국도변에 있었다. 지금은 그 건물을 정미소로 사용하고 있다. 1960년대 후반에 시작하여 1970년대 후반까지 우리면의 유일한 문화공간으로 성시를 이루던 곳이다.

<정기나무거리>   국도에서 대밭담으로 들어오는 마을 입구에 큰 정기(정자)나무가 있었는데 이곳을 \'정기나무거리\'라 하고, 이 곳에 있던 정자나무는 약 30~40년전 태풍의 피해로 없어지고 현재 국도변의 정자나무는 20여 년전에 다시 심은 나무이다. <평송마을회관>   송지리 407-4번지에 위치하고 113㎡의 부지에 철근콘크리트 2층 건물로 88㎡가 지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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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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