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용현향토사



용현향토사

8. 용치리(龍峙里)   용치리는 면사무소 소재지에서 동쪽으로 약 2㎞정도 떨어져 있으며 북, 동, 남쪽에 와룡산(臥龍山)의 지맥(支脈)이 흘러 북으로는 석계리, 동으로는 사남면, 남으로는 남양동과 경계를 이루며, 서쪽으로는 금구마을과 연접하고 있다.   1675년(숙종 1년) 9월 오가통(五家統)의 사목(事目)에 의하면 사천현(泗川縣) 9개 방면(坊面)중의 하나인 하남면(下南面)에 속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 제98호에 이거 진주부(晉州府)의 속군인 사천군(泗川郡)의 하남면이다가 1896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사천군 하남면에 속하여 있었다.   1907년 지방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하남면의 15개 동리 중의 개치동(介峙洞), 용유동(龍踰洞)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 의한 면제의 개정으로 이 해 8월에 읍남면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고쳐 용현면 용치리(龍峙里)로 하였으며, 1995년 5월 10일 법률 제4948호의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사천시(泗川市) 용현면 용치리로 되었고, 1996년 11월 26일 사천시 통반구역 조정 공고 제96-423호로 용치1,2리를 통합하여 용치2리의 행정리를 없애고 용치리의 1개반으로 조정(調整)되었다.   용치리는 북, 동, 남쪽 3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서쪽만이 트여있어 사천만이 훤히 내려다 보이고 우리면에서 표고가 제일 높은 마을이며 서쪽의 훤히 트인 지형을 보완하기 위하여 풍수상으로 마을 앞에 숲을 조성했는지도 모르겠다. 들어오는 목은 좁고, 좁은 목을 들어서면 널다랗게 펼쳐지는 호리병 모양의 지형은 옛날 선인(仙人)들이 찾던 청학동(靑鶴洞)과 유사한 지형으로 고인돌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사람이 거주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 용치(龍峙)      용치는 용치저수지 바로 위에 있는 동네로 진주강씨(晋州姜氏) 집성촌이나 제일 먼저 입향한 성씨는 압해정씨(押海丁氏)였다고 한다. 용치라는 명칭은 1914년 4월 1일 지방조직 개편때에 개치(介峙)와 용유(龍踰)를 통합하여 처음으로 용치(龍峙)라 명명되어졌다.      <개재>   용치마을을 개재라고 부르고 있는데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로는 개재라는 지명에 대하여 두 가지의 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 중 하나는 임진왜란 때 어떤 가족이 굴등산의 절바위 부근 동굴에 피난을 가면서 집에 키우던 개도 함께 데리고 갔었는데 이 개가 왜놈을 보고 짖어대는 바람에 숨어 있던 사실이 발각되어 온 가족이 변을 당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로 마을내에서 개를 기르면 마을이 망한다 하여 기르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동네에 들어온 개를 보면 모두 잡아버렸다고 하여 \'개잡는골\'이→\'개작골\'로 변천되었다고 하며, 또 하나는 동네 북쪽의 뒷산 형상이 클 개(介)자와 닮았다 하여 이 \'개(介)\'자와 산동네라서 외부로 드나들 때는 고개를 넘어 다니므로 \'재\'자와 합쳐 \'개재\'라 하였다는 설이 있어 동네의 공용물품에는 클개(介)자를 써서 다른 마을 물품과 구분을 하였다 한다. 그러나 \'가잿골\'이 \'개재골\'로 변음되어 불리고 있는 듯 하다.   \'가재\'는 가장자리의 사투리인 \'가새\'를 뜻하는 것일 가능성이 많다. \'가장자리\'란 뜻의 옛말은 원래 \'ㄳ( ㄱ)\'이였고 \' \'은 \'가사\', \'가자\', \'가재\'등으로 전음(轉音)되어 \'골(마을)\'이란 말과 합쳐져 \'가잿골\'로 되었을 것이다. \'가잿골\'이란 \'가장자리에 있는 마을\'\'갓마을\'\'변두리마을\'이란 뜻으로 \'가잿골\'이 경상도 발음으로 \'개잿골\'로 변천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개잿골\'은 그냥 \'개재\'라고 부르기도 한다.)      <농바구골>   개재마을 뒤편인 북쪽에 제일 깊은 골짜기로 다릿골 동쪽의 골짜기이다.      <농바구>   농바구골에 있으며 옷을 넣는 장롱을 닮았다 한다. 한자로 농암(籠巖)이라고도 표기하기도 한다.      <농바구골고랑>   농바구골에서 흘러 내려와 개재마을 중앙을 통과하여 정기나무거리를 거쳐 남서쪽 냇고랑으로 흐르는 고랑이다.      <까막바구>   농바구골의 동쪽 능선에 있는 바위이다. 마을 사람들 이야기로는 까마귀가 먹이를 집으려고 주둥이를 하늘로 향하여 치켜들고 나는 형상이라고도 하고 또 다른 이야기로는 천지개벽때 까마귀 한 마리가 앉을 만한 자리만 남기고 물에 잠겼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이야기로는 와룡산의 새섬바위가 천지개벽시 새 한 마리 앉을 자리만 남겨놓고 물에 잠겼을 때 이 까막바구도 같이 잠겼다고 한다. 와룡산 높이의 절반 정도에 불과한 이곳을 와룡산과 같이 견주었던 우리 선조들의 허풍이 웃음을 자아나게 한다.      <서씨집터>   까막바위 아래에 달성서씨 한 집이 옛날에 닭을 키우면서 살고 있었는데 약 50여 년전에 폐가가 되었다고 한다. 집 지을 나무가 귀하던 6.25 사변 직후에 이 폐가를 뜯어보니까 써까래가 대나무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 곳 주위에 절터의 흔적도 있다.      <병풍바구>   농바구골 등에 있는 바위로 병풍처럼 생긴 바위이다.      <송씨묘등>   까막바구 아래에 은진송씨(농협 옆에 비석이 서있는 송지수의 선대) 묘소가 있는데 지형이 닭벼슬의 형국이라고 한다.      <사자바구>   농바구골 동쪽의 등성이에 있는 바위로 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현재 개재돈에서 제일 크게 보이는 바위이다.      <뚜꺼비바구와 너불대가부>   마을 북동쪽에 있는 바위로 뚜꺼비와 너불대(뱀의 일종)가 독을 뿜어대며 싸움을 하고 있는데 천상의 옥황상제가 서로 싸우는 것을 벌 주려고 뚜꺼비와 너불대를 바위로 굳어버리게 하여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형제바구(형제너드랑)>   개재에서 용너미의 적시골을 넘어가기 전의 등성이에 있는 너드랑에 두 개의 바위가 나란히 서있는 바위를 형제바위라 하고 형제바위가 있는 곳의 너드랑을 형제너드랑이라 하고 사람이 다니기에는 매우 위험하다고 한다. 현재 보기에는 키가 큰 바위가 동생바위이고 키가 작은 바위가 형바위인데 형바위는 중간이 무너져 내려 키가 작아 보인다고 한다. 이 바위는 자연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옛날 나무하러 다니던 젊은이들의 심심풀이로 큰 바위 두개를 나란히 세웠다고 한다. 동생바위의 높이가 2m가 넘는다고 하니 그 당시의 젊은이들의 힘을 가히 짐작할까 의심한다. 이 형제바위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한다.   옛날에 사이좋은 형제가 뒷산에 나무하러 갔다가 험한 이 너드랑을 오르내리면서 다음과 같이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의 안전을 걱정하여 다정한 형제애를 보여 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아리콩 아리 아리콩 너드랑 밭에 빠질라.   성님아 살큼 살큼 건너라   동숭아 나는 괜찮다. 너나 살큼 살큼 건너라   아리콩 아리 아리 아리콩\"      <하늘먼당>   개재에서 용너미 입구의 적시골까지의 능선 중 가장 높은 산먼당을 \'하늘먼당\'이라 하고 \'하늘너매\'라고도 하는데 하늘에 닿을만치 높다고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봉대산에서 와룡산으로 가는 등산로 안내도에는 적시골 위의 특재(세암쪽에서는 무지터라 함)를 하늘먼당이라 표기하고 있는데 고쳐져야 할 것으로 알고 있다.      <불당산>   개재마을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인데\'뿔땅산\'이라고도 한다. 이 골에 절이 있었다고 한다.      <다릿골>   당산탑이 있는 곳에서 북쪽편 골짜기를\'다릿골\'이라 하는데 다릿골은 산의 옛말인 \'달(山)의 고을\'이란 말로써 \'달의골\'이 \'다리골\'→\'다릿골\'로 변천되어 \'산속 마을\'이란 뜻을 나타낸다. 임진왜란때 이 곳에 살던 어떤 집안이 이 곳에서 피란하였다는 구전(口傳)이 있는 것을 보면 산속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듬설바구, 등가들바구>   다릿골에 있는 바위로 초가지붕의 처마밑처럼 생겼으며 임진왜란 때에 이 바위밑에서 나주정씨 집안에서 이곳으로 피난을 하여 무사하였다고 하며 집안의 무사했음을 기리기 위하여 매년 섣달 그믐날 밤에 촛불을 밝히고 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장자바구>   다릿골에 있는 바위이다. 바위가 크고 높아 혼자서는 올라가기가 힘들다고 한다.      <약물고랑, 약물골>   개재마을 앞에서 약간 남서쪽에 있는 골짜기로서 약물이 나는 샘이 있어 \'약물고랑\'이라 하고 여기의 골짜기를 \'약물골\'이라 한다. 옛날에는 이 약물고랑을 지나서 특재를 넘어 백천골로 왕래하는 길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솟는 약물을 마시면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효과가 있었으며, 특히 배앓이나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는 소문이 나서 문둥변환자들이 몰려와서 이 샘물을 점거하므로 동네사람들이 폐쇄시켜 버렸다고 한다. 속설에는 부정한 사람이 이 물을 마시면 오히려 병이 악화되었다는 말도 전해진다.   물이 너무 차가와서 삼복더위에도 맨몸으로 물을 맞기는 2,3분을 견디기 어렵다고 한다. 그 아래에 있는 논에는 찬물 피해가 있어 다른곳의 논보다 수확량이 훨씬 떨어진다고 한다.      <특재>   약물골이 있는 산먼당의 질매처럼 생긴 재를 \'특재\'라고 하고 옛날 개재에서 백천골로 다니던 산길이다.   임진왜란때 댕밑 태삼산의 정상인 선먼당에서 이 곳 특재의 능선에서 강지바다 및 백천골로 침입하는 왜병들에게 도굿활을 쏘았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중앉은바구>   특재에서 동쪽으로 두 번째 봉우리의 중간에 있는 큰 바위를 \'중앉은바구\'라 부르는데 개재에서 용너미까지 적시함, 안시암, 도시암, 하안암(암자의 명칭은 구전되어지는 것을 적어 놓았으므로 사실 여부는 확인할 수 없음)등 9개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9개의 암자가 빈대 때문에 망하고 스님들이 암자를 떠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앉았던 바위로써, 바위 위에는 스님들이 앉았던 흔적(홈)이 패여져 있다.      <진등>   개재마을앞 남쪽에 있는 제일 높은 봉우리, 즉 특재에서 동쪽으로 세 번째 있는 등성이가 제일 길어 진등이라고 한다.   옛날에는 이 골짜기의 새미물이 인근에서 제일 좋은 수질이였다고 하며 이 곳에도 절터가 있다고 한다.      <사이등먼당>   진등 봉우리와 중앉은바위가 있는 봉우리의 중간 안부를 󰡐사이등먼당󰡑이라 한다.      <선바구>   진등 옆에 위치하고 있는 커다란 바위로 이 바위 밑에는 4-5명이 기거할 수 있는 공간이 있는데 6.25사변 때에 피난을 하였다고 한다.      <선밧너드랑>   선바구가 있는 너드랑을 선밧너드랑이라 한다.      <고동바구>개재마을 동남쪽에 있는 바위로 옛날 이 바위에서 산고동의 울음소리가 났었다고 한다.      <당산너드랑>   개재마을에서 동남쪽으로 펼쳐져 있는 앞산의 제일 넓은 너드랑이다. 고동바구가 있는 곳이다.      <큰용니미고랑>   당산너드랑의 동쪽에 있는 골짜기의 고랑이다.      <작은용니미고랑>   큰용니미고랑의 동쪽, 시리봉 서쪽의 고랑으로 큰용니미고랑보다 조금 작다.

  <탑거리>   개재마을 입구에 당산탑인 큰 돌탑이 2개 있는데 지금의 길이 나기전 이 돌탑 사이로 길이 나 있었다. 오가는 사람들이 이 곳을 지날 때마다 돌 세 개씩을 올려 놓고 지나 다녔다고 하며 이 곳에서 동제(洞祭)를 지내고 있다. 탑의 밑둘레는 약15m 정도이고 높이는 약 3m정도 되며 이 탑을 세운지는 약 500여 년이 되었다고 한다.      <탕건바위>   탑거리 바로 아래 길가에 있는 바위를 탕건바위라 한다. 갓 아래에 받쳐 쓰는 탕건과 같이 생겼다.      <하짓대거리>   탑거리 조금 위 지점으로서 김해김씨 문중의 한 젊은이가 벼슬길에 오르게 되어 문중에서는 물론 온동네 사람들이 환영하기 위하여 하짓대를 세웠다고 하여 하짓대거리라 한다.      <마을동제(洞祭)>   개재마을 동제는 마을 뒤에서 천륭제를 시작으로해서 당산탑에서 거리제(길제라고도 한다)를 지낸 다음 지신밟기로 이어진다   동제의 우사는 매년 정월 초이튿날 집안에 부정한 일이 없는 깨끗한 장정으로 정하고 동제일까지 목욕재계함은 물론이며 부정한 행위를 하는 것과 부정한 것을 보는 것마저도 꺼려야하는 수신(修身)이 필요하다. 동제일은 길일을 택하여 결정하고 동제일 전에 출산할 산모가 있으면 친정으로 보내는 등 금기사항이 한 두가지가 아니다.   천륭제는 유사 혼자서만 지내고 당산탑으로 내려올 때는 풍악을 울리면 동네사람들이 하나 둘씩 나와서 당산탑으로 향하는데 당산탑에 모두 도착하면 거리제를 지낸다. 거리제의 음식은 가가호호에서 정성껏 마련한 제수로 제를 지내며 제(祭)가 끝나면 당산탑에 있는 밥구덩이에 밥을 넣고 황토로 덮는다. 제향행사가 끝나면 온 마을사람들이 매구패를 앞세우고 동네를 한바퀴 돌며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한다.   이런 의식은 전 마을사람들이 일심동체로 마을의 구성원임을 인식하고 마을의 대동단결을 꾀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산업사회의 발달로 젊은이들이 외지로 나가고 남아있는 젊은이들마저 이런 행사를 귀찮아하므로 수년전부터 동제를 지내는 풍습이 사라지고 말았다. 동제사람들의 이야기로는 동제를 지내지 않으므로 마을내에 크고 작은 재앙과 우환이 종종 생긴다고 말하고 있다.

  <개재숲>   개재마을 탑거리에 도착하기 전 오른쪽의 용치저수지의 만수위시 끝부분에 개재숲이 있다. 약 1,000여 평의 면적에 느티나무(기목나무), 팽나무, 느릅나무, 소나무, 아카시아 등 여러 수종으로 이루어진 숲이다. 숲 중앙에 물이 아주 좋은 새미(둠벙)가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메워지고 흔적만 약간 남아 있다. 생각건대 개재 동네가 동, 남, 북 3면이 산으로 싸여져 있고 오직 서쪽만 트여있는데 이 지형을 보완하기 위하여 풍수지리설의 비보(裨補)차원에서 숲을 조성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우리 선조들이 남긴 여러 가지 유산 중 애써 가꾼 이런 숲은 후세를 사는 우리들이 더욱 보살피고 가꾸어 후대에 물려주어야 할 것이며 현행법령상 보안림에 편입시켜 관리토록 하고 벌채금지 및 사익(私益)의 이영 제한으로 숲 보호에 마을사람 뿐만 아니라 우리 전부가 힘을 보태야 할 것이다.

  <정기나무거리>   동네 앞에 큰 정자가나무가 두 그루 서 있는데 이곳을 정기나무거리라 하고 육안으로 보기에 큰 나무는 느티나무(기목나무라고 한다)로 1940년경 이 동네르이 \'강민진\'씨가 청년시절 옮겨 심은 나무이며 작은 나무는 해나무로 지금 생존하고 계시는 노인들이 어린시절이나 지금이나 나무의 크기가 별 차이 없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수령이 이백년 이상이 되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느티나무는 흉고둘레가 약 6m 정도이고 높이는 30여m가 되며 수관의 넓이는 직경 40여m가 된다. 밑둥치에서는 두나무가 한데 어우러져 약2m 높이에서 6개의 큰 가지로 벌어져 있어 나무의 장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옆의 해나무는 수령이 더 오래되었으나 느티나무에 치여 왜소하게 느껴지는데 흉고둘레가 약2m 정도이고 높이는 30여m로 수관넓이는 별로 넓지 않다.   마을에서는 정자나무를 \'감찰목\'이라는 별호로 부르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이 나무를 직접 심은 강민진씨가 마을의 좌장(座長 ; 여럿이 모인 자리에서의 으뜸되는 어른)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여름철이면 남녀노소가 모두 이 나무 그늘에서 더위를 식히곤 하는데 이 나무 밑에서 서 보면 시원하기가 그지없어 여름철 피서지로는 여기보다 나은 곳이 또 어디 있으랴 싶을 것이다.      <용치마을회관>   용치리 359-1번지에 위치하고 있고 대지면적 205㎡에 시멘블럭스레트 단층건물 82㎡를 1974년에 건립하여 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용너미>   용너미는 우리 면내에서 표고(標高)가 제일 높은 산골마을로 알려져 있다. 조선조 말엽만하여도 40여 호의 큰 마을로써 사남면의 가천, 우천 사람들이 삼천포나 남해, 하동방면으로 갈 때는 반드시 이 마을을 통과하였다고 한다.   용너미라는 지명은 용유(龍踰)로 음-훈차하여 표기하고 있는데 \'용이 넘어 온다\'라는 뜻의 \'용+넘이\'는 \'용넘이\'→\'용너미\'로 변하여 경상도 사투리로 \'용니미\'로 변음되었다고 본다.   서울 도봉구 수유리(水踰里)를 무너미라 하는데 이는 물이 넘어서 그런 이름으로 불러진다고 하며, 또 넘는다는 뜻의 유(踰)자는 지명에서 고개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수유(水踰), 차유(車踰)는 각각 무너미(무네미), 수레너미로 뫼(山)넘이, 수리(山)넘이의 차음(借音), 차자(借字)된 말과 같이 용유(龍踰)가 용너미로 된 것은 이와 같은 유형이다.   명기재에서 언등과 용니미숲의 지형을 자세히 살펴보면 용이 넘어오는 지형이라고 한다. 명기재가 꼬리부분이고 언등이 몸통부분이며 앞발은 감춰졌다가 용너미숲이 용의 머리부분으로 고개를 넘어오다 아래 동네를 살피는 형국이라고 하며, 용치저수지가 만들어지므로써 용이 놀 수 있는 곳이 생겨 이 용은 앞으로 활기차게 활동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는데 1998년 개재에서 용너미까지의 길을 확∙포장하면서 용너미숲을 완전히 망가뜨려버렸다. 옛날에 용너미에 살다 객지로 나간 사람들이 동네를 찾아오면 용의 머리부분을 없애버려 굉장히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      <안땀>   용너미의 동남쪽, 백천골 넘어가는 안골에 있는 땀이다.      <적시골>   용너미숲에서 북쪽으로 길게 뻗은 골짜기를 적시골이라 하고 옛날에는 이 골에 절(암자 포함)이 여러개 있었으나 빈대 때문에 절이 다 망하였다고 구전되고 있다. 지금도 절터가 있었던 곳에 축대가 남아 있는 것을 눈으로 쉽게 볼 수 있다. 한국지명총람에서는 적성사가 있어 \'적성골\'이라고도 하기도 한다고 쓰여있다.   중종 26년(1531) 6월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불우조에 \'적선사(積善寺), 흥보사(興寶寺) ; 모두 와룡산에 있다\'라고 되어 있으며 사천현여지승람기묘수정책(강희 38년 ; 숙종 25 1699. 11월 발간)의 불우조(佛宇條)에 의하면 \'적선사 석유금무(積善寺 昔有今無) 즉 적선사가 옛날에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라는 글을 볼 수 있다. 거리나 위치나 명시되지 않아 확실한 것은 말할 수 없지만 위에 말한 것이 구전되면서 적성사, 적선사, 적시골 등으로 변천되어 위 기록상의 적성사와 적선사가 같은 절이 아닌지 의구심을 가져본다.      <적시고랑>   적시골에 있는 계곡 고랑으로, 등은 새까맣고 배가 빨간 약개구리(암개구리라고도 한다)가 많이 서식하고 있는 곳이다.      <적시땀>   마을의 동북쪽 적시골 입구에 있는 땀이다.      <언(은?)등>   적시골 안의 두 개의 골짜기 사이에 약간 도토롬하게 높은 등을 언등이라 부르고 길지(吉地)라 하여 여러 성씨의 묘소가 연이어 쭉 늘어 서 있으며 은(언?)등이라 하여 은(銀)이 난다는 소문이 있어서 한 때 은 채광을 하기 위한 굴착한 흔적도 남아 있다.      <소쿠리굼텅>   적시골 절터 오른쪽에 소쿠리처럼 오목하게 잘 생긴 지형이 있는데 이곳을 소쿠리굼텅이라고 한다.      <집석바구>   적시골 서쪽편 8부능선 쯤에 위치하고 있으며 초가집 처마처럼 생겨 󰡐집석바구󰡑라 하고 장정 40-50여명이 비를 피할 수 있다고 한다. 이 집석바구 아래에는 아주 옛날에 절이 하나 있었고 집석바구의 물구멍에서 평시에는 물이 나오다가 밥때가 되면 쌀이 나와 스님 한분이 수도생활을 하면서 거주하였는데 절은 빈대 때문에 폐사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조수샘>   집석바구에서 100여m 위로 약간 서쪽편에 위치하고 있으며 바다의 물이 들고 남에 따라 물이 고였다 빠졌다 하므로 \'조수샘\'이라고 부른다.   옛날 어느 나뭇꾼이 나무를 하다가 이 샘물을 떠서 마시고 잠시 옆에 앉아 쉬고 있는 사이에 가득차 있던 물이 서서히 줄어 바닥이 드러나 있는 것을 기이하게 생각하고 한참 지난 후 다시 가보니 물이 본래대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고 한다.   용현조기회에서는 1999년 6월 27일 현장발굴을 위하여 답사를 하였는데 용니미에 살던 김일만씨의 도움으로 이 조수샘을 찾을 수 있었다. 앞으로 관리에 만전을 기하여 신비스러운 이 샘물을 여러 사람들이 즐길 수 있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명기재>   적시골 위 우측에 있는 고개를 \'명기재\'라고 하고 이 재를 넘어서 왼쪽으로 향하면 세암으로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 향하면 사남면 우천마을로 갈 수 있다. 현재는 군사용 비상 헬기장이 설치되어 있다.      <특재>   적시골 절터 곧 바로 올라가는 고개를 특재라고 하고 이 특재를 넘으면 사남면 가천마을로 연결된다.      <도래미>   적시골의 소쿠리굼텅 위의 남산미쪽에 있는 짤록한 봉우리를 도래미라 하고 도래미양달, 도래미음달로 구분한다.   \'도래미\'라는 이름은 \'돌아드는(回) 산\'이란 뜻으로 \'돌아+뫼\'가 \'돌아뫼\'→\'도라매\'→\'도래미\'로 변천되었다고 본다.      <저승바위>   적시골 절터 위에 있는데 20여m의 낭떠러지로 되어 있어 이 바위위에서 떨어지면 죽음을 면치 못한다고 하여 \'저승바위\'라 부른다. 낭떠러지 전면의 중간에 조그마한 굴이 하나 있고 그 굴속에 수리(독수리과의 새)가 집을 짓고 살고 있다.      <남산미>   가천으로 넘어가는 재의 중간의 밭둑들 양달에 있는 산을 󰡐남산미󰡑라고 한다. 편편한 지형이 명당이라는 설이 있어 묘지가 많이 들어서 있다.      <수리바구>   남산미에서 제일 높은 곳에 바위가 하나 있는데 이 바위에 수리가 많이 날아와 앉아 있다 하여 \'수리바구\'라 한다.      <밭둑들>   용너미에서 사남 가천으로 넘는 고개(재)의 중간에 지형이 평평하여 밭을 일구어 놓은 지대가 있는데 이 곳을 \'밭둑들\'이라 한다.      <솔봉재 ; 일명 각구내재>   용너미에서 가천으로 넘어 가는 고개를 말한다. 각구내는 가천마을을 옛날부터 부르던 토박이 땅이름이다.      <무등>   솔봉재의 오른쪽 등성이를 무등이라 한다.      <진등>   무등 오른쪽 등성이를 \'진등\'이라 부르고 등성이가 길게 뻗어 내렸으므로 산등성이가 길다고 하여 \'진등\'이란 이름이 붙었다.      <아홉등고개>   사남면 가천, 종천 방면의 사람들이 백천골을 경유하여 팔장기장(삼천포 팔토에 섰던 장)에 다닐 때 각구내재에서 시리봉까지의 길에 아홉 개의 산등성이를 \'아홉등고개\'라 하는데 시장에 다니는 사람들의 물건을 노려 도둑이 많아 혼자서는 넘기 어려운 고개였다고 한다. 그리고 아홉 살이 든 나이의 사람들이 그 고개를 넘으면 변을 당한다는 속설이 있어 아홉수의 사람들은 이 길을 피하고 먼 길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얼음골>   진등 오른쪽 골짜기로 계곡의 물이 유난히 맑고 얼음같이 차가우며 겨울에 얼음이 얼면 음력 3월 이후가 되어야 풀린다고 한다. 자식이 귀한 집안의 부녀자들이 치성을 드리는 곳이기도 하다.      <금등바구>   얼음골 먼당(산봉우리 높은 곳의 사투리)에 있는 바위로, 이 바위 위에는 묘가 하나 안장되어 있다. 이 묘는 옛날 세도(勢道)깨나 부리며 살던 좌룡의 김씨집안에서 지관을 데리고 배를 타고 가면서 명당을 찾던 중 이 금등바구에 묘를 쓰면 자손만대 복록이 많고 번창하리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묘를 썼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천륭매비>   옛날 용니미마을이 40여 호였을 때 천륭제를 지내던 논배미를 󰡐천륭배미󰡑라고 하고 현재 박영부집 옆 논이다.      <콩마당>   진등 중간에 있는 10여 평의 마당같이 생긴 공지(空地)가 있다. 나뭇꾼들이 지게를 받치고 쉬어가는 보탄(지게에 짐을 지고가다 쉬는 곳, 바탕이라는 뜻의 사투리)으로써 쉬는 틈을 타서 콩서리를 하여 콩깍지를 구워먹던 곳이라 하여 \'콩마당\'이란 이름이 생겼다.      <시리봉>   용니미 웃땀에서 백천골로 넘어가는 고개의 서쪽에 있는 봉우리를 \'시리봉\'이라 하고 혹자는 \'필봉\'이라고도 한다.   시리봉에 묘를 쓰고 나서는 결혼이나 환갑잔치가 있어 떡먹을 일이 자주 생겼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진등고랑>   현재의 용니미못에 유입되는 계곡 중 진등 북쪽편의 고랑을 \'진등고랑\'이라고 한다.      <재밑고랑>   시리봉쪽에서 용니미못으로 유입되는 고랑을 \'재밑고랑\'이라 한다.      <재밑들>   현 용니미못 위쪽으로부터 시리봉까지의 논이 있는 곳을 \'재밑들\'이라 한다.      <용니미못>   진등고랑과 재밑고랑의 물이 유입되고 있는데 1979년 축조되었고 수혜면적이 9㏊이다. 제당의 높이는 10m, 길이는 135m, 저수량은 2만4천1백톤이고 유역면적은 80㏊, 만수면적은 0.5㏊이다.      <적시앞>   현 용니미못 아래에서 용니미숲까지의 논이 있는 지대를 \'적시앞\'이라 한다.

  <용니미 숲>   젓시골 아래에 약 100여 평의 소나무와 잡목으로 된 숲이 조성되어 있었는데 1998년 이 곳에 도로 확장공사를 하면서 이 숲 중간으로 길을 통과시켜 숲의 형상은 완전히 망가져 버렸다.   이 숲이 용머리에 해당하는 형국이라고 알고 있는데 용머리를 파헤쳐 지형을 망가뜨려 놓았다고 용니미에서 옛날부터 살았던 사람들은 무척 안타까워 하고 있다. 이곳에 고인돌로 여겨지는 바위 하나가 있다. 앞으로의 전문기관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리라 본다.      <가매바구>   용니미숲 아래 서쪽편의 산중에 있는 바위로 가마와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통시모티이>   용너미와 개재 중간지점으로 옛날에 나뭇꾼들이 쉬면서 대소변을 볼 수 있도록 개재마을 김준태씨 부친이 조그마한 화장실을 만들어 놓았던 곳을 \'통시모티이(화장실이 있는 모퉁이의 사투리)\'라고 한다. 비료가 귀하던 시절 거름을 마련하기 위하여 화장실을 지어 일제강점기까지 있었다고 한다. 통시모니티에 있는 고랑을 \'통시고랑\'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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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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