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용현향토사



용현향토사

7. 구월리(龜月里)   구월리는 면사무소에서 동북쪽으로 약 1㎞정도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석계리, 동으로는 용치리, 남으로는 송덕곡리, 서쪽으로는 송지리와 접하여 있다.   1675년(숙종 1년) 9월 오가통(五家統)의 사목(事目)에 의하면 사천현(泗川縣) 9방면(坊面)의 하나인 하남면(下南面)에 속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진주부(晉州府) 사천군(泗川郡) 하남면(下南面)이다가 1896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사천군 하남면에 속하였다.   1907년 지방행정 구획정리에 따라 하남면의 금구동(金龜洞), 마월동(磨月洞)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부령 제111호 군∙면폐치분합에 따라 금구동과 마월동을 합하여 읍남면(邑南面) 구월리(龜月里)라 하였으며, 1931년 4월 1일 부령 제12호에 의한 면제의 개정으로 이 해 8월에 압남면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고쳐 용현면 구월리(구월, 금구마을)로 되었고 1995년 5월 19일 법률 제4948호의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사천시(泗川市) 용현면 구월리로 되었다.   구월리는 마을이 산록에 아름답게 펼쳐져 있고 옛날부터 먹거리와 땔감이 풍부하므로 비교적 생활이 윤택하여 인심이 후하였던 곳이다. 선사유적(先史遺蹟)인 고인돌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 ; B.C10~8세기)부터 취락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 구월(龜月)      마드리라고도 부른다. 웃땀(골땀)과 건넛땀으로 형성되어 있고 산록변에 마을이 펼쳐져 있다. 합천이씨(陜川李氏)가 대성(大姓)을 이루고 있으며 함안조씨(咸安趙氏)등 몇 성받이가 거주하고 있다. 구월이라는 명칭은 1914년 4월 1일 군∙면폐치분합에 따른 행정조직 개편시 처음으로 구월이라는 지명이 나타나는데 이는 구정(龜井 ; 거북이는 장수를 의미함)의 거북구(龜)자와 마월의 달월(月)자를 합하여 구월이라 하였다고 한다.      <마드리>   달은 옛 훈민정음에 대개 ‘달’로 표기되었다. 산 이름들 중에 달(達)이나 월(月)자가 많이 들어간 것은 ‘산’의 옛말이 ‘달’이였기 때문이다.   ‘산’의 뜻을 갖는 이 말은 오늘날의 ‘양달’, ‘음달’과 같은 말을 이루게 했고 ‘빗긴(경사진)땅’이라 하여 ‘빗달’이라 불리던 말이 ‘비탈’이라는 말로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달’, ‘달’은 ‘들’, ‘둘’ 등으로 모음변화를 일으키기도 했다가 ‘드리’ ‘두리’로 연철되면서 ‘달山’과는 상당히 멀어진 또 다른 지명을 낳기도 하였다.   마드리는 ‘마+드리’로 ‘마’는 마쪽, 마파람등 남쪽의 옛말이고 ‘드리’는 산이므로 ‘남쪽 산동네’란 뜻이 나오고 마월(磨月)은 한자로 표기하면서 음,훈차(音訓借)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들’의 원말도 ‘달’이어서 ‘달’로 된 이름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월(月)자가 들어간 지명은 대개 토박이 땅이름의 달을 옮긴 것인데 월(月)이 산(山)의 뜻으로 붙여진 것인지 아니면 들(野)의 뜻으로 붙혀진 것인지 알기 어려운 것이 많다.   마+드리 → 마드리 = 남쪽산   마+드리 → 마더러 = 남쪽들      <가운데땀>   마드리 동네의 북쪽 가운데에 있는 땀이다.      <거이땀>   마드리의 본마을을 거이땀이라 한다.      <골땀>   마드리의 웃땀을 골땀이라 한다.      <안골>   마드리의 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골땀못>   골땀에 있는 못으로 1952년에 준공되었으며 웃땀못이라고도 한다. 수혜면적이 8.1㏊이고 제당높이 9.5m, 길이 49m, 저수량 2만4천1백톤, 유역면적은 40㏊, 만수면적 0.3㏊이다.      <구월저수지>   마드리못이라고도 하며 동네 남쪽에 있고 1945년에 준공되었다. 제당높이는 8m, 길이는 120m, 저수량은 3만7천톤, 유역면적은 8m, 만수면적은 0.8㏊이다.      <반월산>   마드리 웃땀과 세암 올라가는 길 사이에 있는 산으로 반월(半月 ; 반달)과 같이 생겼다고 하여 반월산이라 하는데 바늘설이라고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구월의 지명이 이 반월산과 많은 연관이 있다 한다.   마을사람들이 이야기하는 내용을 보면 마월(磨月)이라는 명칭은 달을 깎아서 반달로 만들었다거나 온달(가득찬 달, 보름달)이 아니고 반달이어서 어른 대접을 받지 못한다(1등 마을이 되지 못하고 다른 동네보다 후미 서열에 든다는 뜻임)는 등의 이야기는 달(月)에 대하여 너무 한문식 해석을 할려는 사고에 얽매이고 있는 탓에 이런 이야기가 나오는 성 싶다.      <참새미골>   웃땀 뒤에 있는 골짜기. 물 맛이 매우 좋으며 여름철에는 특히 이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겨울철에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곳으로 한문식 표기로 한천곡(寒泉谷)이라고 한다.   아무리 가물어도 참새미골의 물이 마른 예가 없었는데 근래에 와서 하부(下部) 지역에서 지하수 개발을 많이 하는 탓인지 물이 가끔 마르는 때가 있다고 한다.      <떡고개>   참새미골이 있는 산의 상봉을 떡고개라 하고 큰 떡고개, 작은 떡고개가 있다. 지명의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길지(吉地)라 하며 묘소가 많은데 여러 집안의 성묘나 시향(時享)때에 떡 얻어 먹을 일이 생기는 고개라고 하여 그렇게 명명되어졌으리라 여겨진다.      <상여바위, 애이바위>   웃땀 뒷산에 있는 바위로 큰 바위를 상여바위, 작은 바위를 애이(혼백을 모시는 영여를 일컫는 이 곳 사투리임)바위라 부른다. 상여와 애이가 행렬을 이루고 있는 모습을 닮았다.      <구른고랑, 고른골>   웃땀 뒷산에 있는 고랑과 골짜기를 구른고랑, 또는 고른골이라 한다.      <으름골, 어은골(於隱谷)>   웃땀 뒷산의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으름나무가 많이 있어 팔월 성묘시 이 곳을 지나치는 성묘객은 으름을 많이 딸 수 있다고 한다. 또 어은골이라는 연유는 이 골이 있는 산을 넘으면 개재다릿골로써 옛날 임진왜란 때 다릿골에 나주정씨들이 난을 피하여 몸을 숨기고 살았다고 하여 어은골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턱구>   다릿골 먼당에 있는 바위로 문턱과 같이 생겨 문턱을 넘나드는 기분으로 바위를 지나다녔다 한다.      <손구고랑>   다릿골 먼당 올라가는 골짜기에 있는 고랑이다.      <선바구, 탕건바구>   으름골에서 약간 동북쪽 상봉에 있으며 탕건과 같이 생겼다 하여 선바구 또는 탕건바구라 한다.      <가마바구>   선바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으며 가마의 형상을 하고 있다.      <매바구>   가마바구 조금 동쪽에 있고 매가 날개를 펴고 날다가 먹이를 낚아 챌려는 모습과 같다고 한다.      <매암굴터>   가마바구, 매바구가 있는 상봉 조금 아래 지점으로, 이 바위 위로 사람이 지나가면 꿍꿍거리는 소리가 나고 있어 그 속에는 무엇인가 매장이 되어 공간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소리가 날 것이라고 하여 매암굴(埋巖窟)터라 불린다.      <잡지고랑>   매암굴터가 있는 산의 중간에 있는 골에 큰 잡지고랑과 작은 잡지고랑이 있는데 경사가 너무 급하여 무엇을 잡지 않으면 왕래할 수 없다고 한다.

  <영감바구, 할매바구>   잡지고랑 하단에 있는 바위로 부부지간으로 보이는 영감과 할매를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성냥바구>   영감바구, 할매바구 부근에 있는 바위로 성냥개비를 바위에 마찰하면 불이 붙었다 하여 성냥바구라 한다.      <엉개비너드랑>   장군암 부근에 있는 너드랑에 엉개나무가 많다고 하여 엉개비너드랑이라고 한다.      <장군바구>   엉개비너드랑 부근에 있는 큰 바위를 장군바위라 하는데 합천이씨(陜川李氏) 입사천(入泗川) 시조(始祖)의 손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안국(李安國)의 묘소를 처한 후부터 이바위를 장군바구라 부른다.      <농바구, 농바구골>   여시밭골 아래에 있으며 옷을 넣는 장롱처럼 생긴 바위를 농바구라 하고 이 바위가 있는 골짜기를 농바구골이라 한다.      <여시밭골>   웃땀 위쪽에 있는 골짜기로 여우가 자주 나타났다고 하여 여시밭골이라 한다.      <통신바구, 통심바구>   고동골쪽의 상봉에 있는 큰 바위를 통신바구(발음을 쉽게 하기 위하여 통시바구라 하기도 한다) 또는 통심바구라 하는데 외침(畏鍼)이 있거나 동네에 이상이 있을 때 통신(通信)을 하던 바위라 하여 통신바위라 하고 또 구정내의 거북이가 물속에 있다가 숨을 내쉬는 형상이라 하여 통심(通心)바위라 한다.      <세밋골>   통신바구 아래에 있는 골짜기를 \'세밋골\'이라 한다.      <황소무릎팍>   은월재(隱月齋) 뒷산너머 통신바구가 있는 곳의 서쪽 능선. 황소의 무릎을 닮았다 하여 황소무릎팍이라 한다.      <길등>   장군바구와 농바구가 있는 중간의 산길을 길등이라 한다.      <배알나무뻔득>   장군바구 서쪽에 무과 급제(武科 及第)한 합천이씨(陜川李氏)의 묘소가 있는 주위에 배알나무(배롱나무)가 많이 서 있어 배알나무뻔득이라 한다.      <몰비탈, 몰구부리>   마드리에서 세암으로 가는 길 중간 세암폭포 아래를 몰비탈 또는 몰구부리라 하는데 비탈이 심한 小路로 옛날 이 곳을 말을 타고 지나가던 사람이 말과 함께 비탈에 미끄러져 죽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여시도랑,여시고랑>   웃땀에서 건넛땀으로 흐르는 고랑이 비가 조금 많이 오면 고랑물이 넘치고 비가 그치면 금방 물이 줄어들어 마치 여우처럼 변덕이 심한 고랑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저승바구>   마드리 동쪽에 있는 바위로서 바위 아래는 몇 길되는 절벽으로 되어있어 이 바위에서 떨어지면 모두 죽는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똘뙤이재>   마드리마을 동북쪽에서 석계로 넘어가는 고개이다.      <우두산, 와우산>   마드리 마을의 남서쪽에 고동골을 보고 길게 뻗은 조그마한 산으로 소머리처럼 생겼다고 하여 우두산(牛頭山)이라 하기도 하고 어떤이는 누워 있는 소의 형상이라서 와우산(臥牛山)이라 부르는게 옳다고도 한다. 송지쪽에서는 오계산(五鷄山)이라 한다.   최창조의 「한국의 자생풍수2」(1997. 6. 20 발행 (주)믿음사) 708쪽에는 \"와우산(臥牛山) : 마월 북쪽에 있는 산.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 함\"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솔집베기>   고동골에서 마드리로 올라오면서 거북등을 지나고 만나는 산 이름이다.      <헤미재, 외진재>   우두산 북쪽편. 지금의 마을 진입로가 나 있는 남쪽인데 옛날에는 매우 외진 곳으로 여우가 나타나 지나다니는 사람들에게 흙을 뿌리기도 하였다 한다. 웃땀에서 내려다 볼 때 강지바다가 보이면 동네가 망한다고 하여 바다를 가릴 수 있도록 나무를 심었는데 도로를 개설하면서 나무를 모두 베어버려 동네에 우환이 자주 생긴다는 이야기가 있다.      <청석재>     마드리못 제방이 있는 곳에서 석계로 넘어가는 고개를 청석재라 한다. 옛날 백천골 사람들이 읍내(泗川邑) 장에 갈 때에 개재 앞 특재를 넘어 댕밑과 고동골을 거쳐 이 청석재를 넘어 다녔다고 한다. 청석재라는 명칭은 이 고개가 청석(푸른 빛이 나는 재질이 단단한 암반으로 잘 깨뜨리지 않는다)으로 깔려 있기 때문이다. 지금의 마을 진입로 개설시 지금처럼 좋은 장비는 없고 전부 인력으로 공사를 하는데 청석 때문에 애를 먹기도 하였다 한다.      <마월원 ; 마월원磨月院>   \"원(院)이란 고려-조선시대에 지방으로 출장가는 관리들의 숙박소격인데 공무로 여행할 때 숙식을 제공해 주기 위해 요로(要路)나 인가가 드문 곳에 이 기관을 두었으며 그 유지비로서 고려 공민왕 때에 이미 원위전(院位田)을 지급했으나 활발한 정비는 조선 초부터 였다.   세종 27년(1445년)에는 부근의 주민 중에서 원주(院主)를 선발 관리케 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 의하면 그 유지비로 원주에게는 대로(大路)면 1결(結) 35부(付), 중로(中路)면 90부, 소로(小路)면 45부를 주었다고 하고 당시 마월원에 연결되는 대로는 없고 다만 소로로 중로에 연결되었다고 한다. 원은 조선초기에 크게 번영하였으나 그 사용자가 제한되어 후기에는 점차 쇠퇴한 채 명맥만 유지하였다.\"고 사천군지(1990. 8. 30일 발행) 898쪽에 기술되고 있고 \"사천군내에는 5개소의 원우가 있었다\"(사천군지 455쪽)고 기술되어 있다.   마월원에 대하여 읍지(邑誌)를 보면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없어졌다(昔有今無)\'고 기록되어 있다. 없어진 원우중 마월원(磨月院)은 현(縣)에서 남으로 25리(1리(里)는 약540m)라 하였으니 용현면 구월리에 있었다\"고 사천군지 900쪽에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위의 글중 읍지가 아니고 1699년에 간행된 사천현여지승람 기묘수정책임을 바로 잡으며 조선조 예종 1년(1469)에 발간된 경상도속천자라자 원우조에 \'현남하리보통원 마월리마월원 현동장천리소곡원(縣南下里普通院 磨月里磨月院 縣東獐川里可谷院)\'의 기록이 맨 처음으로 보이고 중종 26년(1531) 6월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 역원조 및 1935년 이후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사천환여지승람 고적조에도 \'마월원(磨月院) ; 현 남쪽 25리 지점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월마을회관>   구월리 80-2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대지면적 992㎡에 시멘트벽돌 브로스라브 단층건물 106㎡을 1993년에 건립하였으며 마을회관으로 55㎡, 경로당으로 51㎡활용하고 있다.

  • 금 구(金龜)      금구는 용치저수지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로 함안조씨(咸安趙氏), 인동장씨(仁洞張氏)가 대성을 이루고 있으며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제일 먼저 입향하였으나 그 후손은 현재 거주하지 않고 있다.   금구(金龜)라는 명칭은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제일 먼저 입향하여 살았다 하여 성김(金)자와 구정(龜井)냇고랑에 거북이가 많이 서식하였는데 거북이는 장수한다는 뜻에서 거북구(龜)자를 합쳐 금구(金龜)라고 명명하였다는 설과, 다른 한 설은 동쪽의 산줄기가 쇠금(金)자의 형국을 이루고 있다고 하여 거북구(龜)자와 합하여 금구로 명명되어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금구마을은 댕밑, 고동골, 음달의 세땀으로 형성되어져 있다.      <댕밑>   금구마을을 당밑이라고 하는데 \'댕밑\'이라 변음되어 불리고 있다. 당밑이란 이름에는 두 가지의 유래설이 전해지고 있는데 각선당의 당집 아래에 있는 동네라 하여 당밑이라는 설과, 또 하나는 마드리의 아래땀이다 하여 땀밑이 당밑으로 변음되어 불리어졌을 것이라는 설이 있다.   우리말은 대부분 폐음절에서 개음절로 변하였다. 따라서 산(山)의 뜻인 \'달\'은 \'닫\'이 그 뿌리일 수 있다. 이 \'닫\'이 그음 그대로 남은 것은 극히 드물고 연결 음절과의 관계나 다른 낱말의 유사성으로 인해 \'닷\',\'닥\',\'닭\'등으로 옮겨가고 \'닥\'\'등\'은 ㄴ,ㅁ을 초성으로 하는 음절의 말이 뒤에 따라올 경우에는 \'당\'으로 되어 \'산 밑\'이라는 뜻의 \'닫밑\'이 \'당밑\'으로 되고 경상도 방언 발음으로 댕밑이 되었다고 본다.      <고동골>   댕밑에서 마드리 쪽으로 산모퉁이를 돌아가면 산록에 형성되어 있는 동네인데 \'오래된 동네\'라는 뜻에서 \'고동(古洞)골\'이라는 설과 댕밑에서 고동골로 들어가는 길이 지형적으로 산모퉁이를 뱅글뱅글 돌아서 들어가므로 고동(소라, 우렁이 따위와 같이 생긴 복족류(鰒足類)를 통틀어 고둥이라 하는데 경상도에서 고동으로 발음함)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옛날에는 마드리와 댕밑, 고동골은 한마을이였으며 마을 공공건물인 동사(洞舍)도 이곳 고동골에 있었다고 한다.      <떡구먼당>   용치저수지 뚝이 시작되고 통수관 관리실이 있는 이 곳을 떡구먼당이라고 하고 여기에는 큰 소나무가 3그루 서 있고 민묘가 2기 있는데 옛날부터 명당자리로 알려져 세도(勢道)있고 살림살이가 넉넉한 집안의 묘소가 있으므로 떡 얻어 먹을 일이 자주 생겨 떡고개 먼당이라 부르게 된 것이 떡구먼당으로 변음되어 불리고 있다.   일설에는 그 후 다른 사람들이 더 이상 묘를 쓰지 못하도록 불을 뜬 곳이라 하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음달>   댕밑의 남쪽, 각선당먼당 아래 산록에 붙어 있는 동네로 옛날에는 8가구가 있었으나 현재는 3가구만 남아 있다.      <소년골>   음달 서쪽의 송지리와 경계에 있는 골짜기를 소년골이라 한다. 옛날 이 소년골 부근에 봉곡이라고 하는 동네가 있었다고 한다.      <똥맷등>   소년골 앞에 있는 외따로 떨어져 있는 조그마한 동산으로 봉황이 똥을 누어 쌓인 형국이라 한다.(송지리편에 소개됨)      <용치저수지>   1958. 12. 15일에 준공되었으며 유역면적은 455㏊, 만수면적은 11.2㏊, 몽리면적은 140㏊, 관개면적은 148.3㏊, 저수량은 669만2천톤, 제당의 높이는 16m, 길이는 257m이고 만수위는 13m이다. 당시 저수지를 축조한 사천농지개량조합장은 신용희씨(16대 54. 4. 28-58. 4. 27. 17대(58. 6. 16-59. 12. 1)씨였으며 공사를 할 때에 생전 처음보는 사마귀차(페이로더?)와 불도저가 있었고, 건너편 산을 깎아 흙을 운반하던 토운차(土運車) : 속칭 칙구루마라고 하였으며 현재는 탄광지대에서만 볼 수 있는 탄차와 같이 생겼다)를 타고 놀다가 혼이 난 적도 있었고 남포(도화선 장치를 하여 폭발할 수 있게 만든 폭발 화약)를 터트릴 때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돌 파편이 날라오지 않는 안전한 곳으로 피신을 하기도 하였다.   준공된 이듬해인가 사라호 태풍 래습시, 집중호우로 인하여 저수지의 물이 제방 1m정도를 남겨놓고 만수가 되었을 때 저수지 뚝이 터진다고 법석을 떨고, 온 동네사람들은 그 당시의 가장 큰 재산인 소를 몰고 못뚝이 터져도 피해를 입지 않을 높은 산으로 피신하였던 기억이 되살아나기도 한다.      <보안>   용치저수지가 생기기 전 용치에서 내려오는 하천에 보를 막아 기미들과 고동골들의 농업용수로 사용하였는데 현재 저수지 뚝이 선지점인 수문통 입구에서 동쪽으로 떡구먼당 아래까지 10여 호의 마을이 길게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곳을 보안이라 하였다.   지금은 전부 저수지에 수몰되었는데 보안이라는 지명은 보아래(보+아래)→보아내(경상도 사투리의 변음화)→보안에→보안으로 되지 않았나 추측한다.      <갯터>   떡구먼당이 있는 산줄기의 서쪽 끝자락 지점으로 동네 아낙들의 빨래터를 갯터라고 하는데 그 지명의 유래는 알 수 없다.      <기미들>   댕밑 앞들을 기미들이라 하는데 옛날 기미년의 혹독한 가뭄이 있을 때 이 들판은 가뭄을 타지 않고 가을에 황금물결을 이루었다고 하는데 기미년의 가뭄도 이겨냈다 하여 기미들이라 부른다.   용니미에서 발원된 수원이 아주 좋아 농경생활이 주된 생활수단이던 시절에는 댕밑앞 이 기미들이 가뭄을 타지 않는다 하여 최고의 문전옥답으로 각광을 받기도 하였다 한다.      <기미고랑>   기미들에 흐르던 고랑으로 사시사철 물이 끊어지지 않았다. 지금은 경지정리로 인하여 없어졌다.      <태새미>   용치저수지의 오른쪽 용문암이 있는 부근을 태새미라 한다. 이 곳은 옛날에 임금의 태를 묻었던 곳으로 태실지라 불리어졌다고 전해지는데 태새미라 변음되어 불리고 있고 어느 시대 어느 임금의 태실지인지는 확인 할 수 없다.      <통신 바구>   용문암 옆에 있는 큰 바위를 통신바구라 하고 발음이 어려워 대부분의 사람들이 통시바구라고 하는데 성먼당에서의 왜적 감시 상황에 대한 이상 유무의 통신을 하던 바위였다고 한다. 바위의 가운데가 1.5m정도 벌어져 있고 이 위에 사방 1m정도의 작은 바위 두 개가 포개져 있는데 금문에 사는 뺀질스런 한 젊은이가 밀어서 떨어뜨렸다고 한다.      <성지골>   태새미에서 동남쪽의 골짜기를 성지골이라 하는데 임금의 태실지가 있던 신성스러운 땅의 위쪽 골짜기라 하여 성지(聖地)골이라 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가 없다.      <칼바구>   태심이 동쪽에 있는 바위로 칼모양으로 생겼다.      <멧골>   저수지 둑에서 남쪽으로 송전철탑이 서 있는 골짜기를 멧골이라 하는데 먹골이라 주장하는 이도 있다. 이 골짜기에는 큰 돌배나무가 한 그루 서 있고 그 아래에 샘이 하나 있는데 이 샘물은 혹심한 가뭄에도 물이 마르는 일이 없으며 이 곳은 옛날 땅고개를 넘어 가매실로 가는 길목으로 오가는 길손들이 이 샘물로 목을 축이며 곰방대 한 대를 피워 물고 쉬어가는 곳으로써 어느 선비가 쉬고 있는 중에 한 촌노가 글귀를 청하므로 이 샘물을 떠서 먹을 갈아서는 일필휘지(一筆揮之:글씨를 단숨에 힘차게 시원하게 죽 써내림) 하였던 곳이라 하여 먹골이라 불렸다는 이야기가 전하여지고 있지만 멧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더 많다. 그러나 멧골은 \'맏골\'이 변음되어진 말로써 \'산 마을\'이라는 뜻이다. 모음 역행동화가 일어나면 \'아\'는 \'애\'로 잘 옮겨가므로 맏골→?골→멧골로 변화하였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땅고개>   멧골 돌배나무 밑을 지나서 가매실로 넘어가는 고개를 땅고개라 하는데 오른쪽 각선당 먼당에 당집이 있다고 하여 \'당집이 있는 고개\'가 \'당고개\'로, 다시 방언발음의 된소리인 \'땅고개\'로 변음되었다.

  <각선당 먼당>   댕밑마을 남쪽에 있는 반달같이 생긴 산정상을 각선당 먼당이라 하고 옛날 이곳에 젊은 여자 무당 한 사람이 당집을 지어 살았다고 하여 \'각시당 먼당\'이라 불려지던 것이 \'각선당 먼당\'이라고 변음되어 불리고 있다. 정유재란 때는 이 곳에 성을 쌓고 마을을 지키던 곳으로 알려져 있어 1999. 7. 11 현장을 답사하였으나 원시림처럼 나무가 들어서고 풀이 무성하게 자라 그 성터를 찾지 못하였다.      <성먼당>   저수지 오른쪽 용문암이 있는 태새미산의 맨 정상을 성먼당이라 하는데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임진란을 전후하여 왜적들의 침략이 잦을 때 왜구들이 쳐들어 오는지를 이 곳에서 감시하였다고 한다.   산 정상이 섬처럼 도도록하게 생겨 사방을 살피는데 안성마춤의 지형이고 지름이 30여m되는 성곽같은 돌담이 있어 이렇게 불려지고 있는데 \'성산(城山)먼당\' 또는 \'선먼당\', \'섬먼당\'으로 변음되어 불려지기도 한다.   한국지명총람에는 \'선몰랑 ; 개재 남쪽에 있는 산. 임진왜란때에 진을 치고 도굿대(절구대)활로서 적을 무찔렀다 함\'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태삼산성>   사천군지(사천군발행. 1990. 8. 30)에 덕곡산성이라고 소개되어 있는데 이는 태삼산의 정상에 있는 속칭 \'선먼당\'의 산성지(山城址)임을 바로 잡고자 사천군지의 내용을 옮겨 보면서 현장답사 내용으로 틀린 부분을 지적하고 싶다.   \"덕곡리 산성은 부곡마을에서 동쪽 700m지점에 위치한 부곡 소류지 바로 위에 있는 성(城)이다. ※여기에서 부곡소류지 바로 위라는 위치가 틀린다. 부곡소류지에서 성지(城址)까지는 약2㎞정도가 된다. 와룡산(798.6m)에서 뻗어온 지맥(支脈)으로 그리 높지 않은 야산(野山)인데 속칭(俗稱) \'성먼당\'이라고 한다. ※태삼산은 야산이 아니라 이 근방에서는 제일 높은 봉으로 해발 약450m되는 산이며 예부터 성먼당으로 불리어지고 있다.   소규모(小規模)의 산성(山城)이지만 야산을 이용하여 쌓았으므로 주위에 장애물이 없어 관측(觀測)이 용이한 곳이다. 산성(山城)은 테뫼식으로 석축(石築)하였고 그 길이는 90m에 불과하다. 지금은 석축이 대부분 붕괴되어 그 형적(形迹)을 식별하기가 어렵다 ※산성의 형태, 크기, 주위의 지형설명이 현지와 꼭 같다.   와룡산 기슭에 백운동천이 있고 거기에는 옛날 유명한 백천사가 있었다. 이 산성은 백운동(白雲洞)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위치하여 임진란(壬辰亂) 당시 절을 지키기 위하여 구축(構築)한 성이라 전해 오기도 한다. 삼우(三愚) 강인광의 와룡산기(臥龍山記)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기록(記錄)되어 있다. 즉 \"백운동(白雲洞)에 백천사(白泉寺)가 있었다. 임진왜란(壬辰倭亂)때 백천사 주지(住持) 의선대사(義善大師)가 의병장(疑兵將)이 되어 승병(僧兵) 200명을 이끌고 왜적을 맞아 싸워 이를 격퇴하였다. 이로 인해 이를 싸움터를 난곡(亂谷), 돌파지(突破地), 퇴병산(退兵山), 파병산(派兵山), 성문등(城門嶝)이라 뒷사람들이 일컬어 온다 한 것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지명은 배치마을 뒤편의 북바위를 거쳐 노루고개와 지산마을의 북편으로 뻗은 구릉으로 충무마을까지의 산등성이에 있는 지명이다.   위 기록에서 백운동에는 임진란때 백천사를 본사로 하는 수많은 암자가 있었다고도 전한다. 왜란이 일어나자 주지 의선대사는 스스로 승병장이 되어 이들 사찰을 보호하고 지켜야 할 책무를 느꼈으리라 믿어진다. 따라서 덕곡산성은 그 택지가 백천사로 들어가는 어귀인지라 관망되는 주위는 평야뿐 아니라 멀리 바다까지 조망되어 전략상 왜적의 동태와 준동을 쉽게 탐지할 수 있었고 또한 백천사로 침입하는 적을 사전에 방어하는 이점(利點)도 있었다. ※현장에 올라가 보면 남해바다의 사량도에서 지리산까지 사천만 일대는 물론 백천골짜기, 개재골짜기 및 멀리 남해까지 관망할 수 있는 조망이 아주 좋은 곳이다.   그러므로 이 산성은 와룡산기에 나오는 여러 싸움터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을 것 같다. 일설(一說)에는 산성과 가까운 금문리에 \'불매등\', \'창(倉)새미\' 따위의 지명이 전하는데 불매등이란 대장간이 있었던 곳으로 임진난시 의선대사가 이끄는 승병들의 무기를 이곳에서 만들어 공급했다고 하는 전설이 있다\". ※그러나 이백산 편저 「남양의 역사와 문화이야기」(1996. 5. 1발행) 152쪽에는 \"백천사의 승병 이야기에 의선대사라는 설이 있으나 역대 불조원류(僧侶族譜)에서나 기타 불전에서도 기록을 찾을 길이 없어 여기서 승병장의 법호는 밝힐 수가 없었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우리가 앞으로 더 연구하여야 할 과제인 것 같다.      <헤밋골>   성먼당에서 댕밑으로 내려다보면 방향의 오른쪽 골을 헤밋골이라 한다. 댕밑이나 개재마을에서 떨어진 위치이므로 \'헤미진 곳\'이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 곳은 늪같이 진흙땅으로 물빠짐이 좋지않은 곳인데 물총풀이 많아 옛날 초등학교 시절의 여름방학때 퇴비 생산 경진대회를 할 때마다 이 곳의 물총풀을 베어가곤 하였다. 물총풀은 잘 썩지 않아서 방학을 마치고 채점을 할 때까지 가라앉지 않고 거의 그대로 있어 이 풀을 선호하였는데 매년 댕밑마을 학생들의 풀벤 량이 우수하였음은 이 물총풀의 덕택이었다.      <책바위>   헤밋골에 있는 바위로 넓적하고 평평하게 생겼는데 어떤 선비가 이 바위에서 책을 읽었다고 하여 책바위라 부른다.      <책바위먼당>   헤밋골 먼당으로 섬먼당과 땅고개 중간의 지점이며 책먼당이라고 줄여서 불려지기도 하였다. 남쪽 아래쪽으로 가면 땅고개를 거쳐 가매실로 통한다.      <차씨메뿌랑>   저수지와 성먼당 중간 지점의 큰 소나무가 빙둘러 서 있는 곳에 연안차씨의 묘소가 있는 곳을 말한다. 인근 촌로들의 이야기로는 이 곳에 묘를 처할 때 시신을 거두지 못해 참나무로 인형을 깍아 매장하였는데 후손 중에 장군이 났다고 한다.      <산애새미>   용치저수지내에 수몰되어 지금은 저수지 물이 빠져야 그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절바구에서 용문암과의 중간지점 쯤에 있는 물이 아주 좋은 새미로 두레채로 밤낮으로 쉬지 않고 물을 퍼도 마르지 않아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모두 탐을 내던 새미이다. 그 아래의 고랑을 산애고랑이라 한다.      <고인돌 무덤>   「사천군지」(사천군발행. 1990. 8. 30) 865쪽의 기록을 보면 구월리 475의 2번지에 위치하고 길이 2.9m, 너비 2.2m, 높이 0.6m의 크기의 남방식 무덤. 4기나 들 가운데 흩어져 있다고 기술(記述)되어 있다. 구월리 475의 2번지는 옛날 장세홍씨의 음달 집터인데 경지정리후 어떻게 하였는지 알 수 없어 안타깝기만 하다.      <구정(龜井)내고랑>   마드리 웃담골에서 발원하여 고등골과 오계산(구월리 공동묘지가 있는 산)의 중간 들판을 지나 송지천과 합수되는 고랑을 구정냇고랑이라 하고 구정(龜井)은 거북이가 살던 새미를 말한다고 한다. 그러나 비가 많이 오면 마드리에서 황토물이 많이 내려오므로 맑지 못한물, 더러워진 물, 구정물이 내려온다고 하여 구정냇고랑이라고 하지 않았는지 의문을 가진다.

  <절바구>   댕밑에서 개재로 올라가다 보면 떡구먼당에서 약 4-500m쯤의 오른쪽 산 중턱에 2-300m정도의 높이로 연방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질듯한 바위가 하나 우뚝 서 있는데 이 곳 사람들은 이 바위를 \'절바구\' 또는 \'선바구\'라고 부르는데 \'절바구\'라 부르면 쉽게 알아 듣는다. 이 절바구에 대한 전설은 다음과 같다.   옛날 용너미마을(한자로는 龍踰라고 쓰고 있다) 왼쪽 골짜기인 적시골 절(절 이름이나 절이 건축된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빈대 때문에 이 절이 망하였다고 구전되고 있으며 현재는 수풀속에 절터로 추정되는 축대만 남아 있다)에 노승 한 분이 볼 일을 보러가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산위를 올려다 보니 웅장한 바위 하나가 하늘을 향해 버티고 서 있는데 과연 장관이었다.   옛날에는 개재(용치마을)를 거쳐 용너미로 가는 길이 산 아래에 있었는데 (지금의 용치저수지를 축조하면서 옛날 길은 물속에 잠기고 금구에서 용치 숲 앞까지는 새로 만든 길이다.)적시골 절에서 볼일을 다마치고 노스님이 내려오는데 아까 올라갈 때에 보았던 바위가 장관이던 것을 상기하고 다시 한번 더 볼려고 고개를 들고 쳐다보니 집채보다도 몇 배나 더 큰 바위가 두 개로 변하여 노스님이 걸음을 한발씩 옮길 때마다 연방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한 걸음 옮기면 굴러 내려오는 것 같아 멈추고, 또 한 걸음 옮기면 굴러 내려오는 것 같아 다시 멈추고….   이러다가 스님은 그 자리에 서서 바위를 향하여 경건하게 합장하고 \"나무관세음보살. 신령스러운 바위님, 지나가는 길손을 놀라게 하지 마시고 제 자리에 가만히 서 계십시오. 나무관세음보살!\"하고 한참동안 기도를 드리고 나서 바위를 쳐다보니 거짓말 같이 바위가 그 자리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고 한다. 아래 동네인 댕밑에 와서 스님은 이 바위 아래를 지나다니는 길손은 누구를 막론하고 바위를 향하여 지극정성으로 절을 하여야만 이 바위가 움직이지 않고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않는다고 동네 사람들에게 전함으로 모든 사람들이 스님이 시키는대로 바위 밑을 지날 때마다 절을 하였다고 한다. 절을 정성스레 함으로써 바위가 움직이지 않아 사람들이 놀라지 않는다고 전하고 있다. 이리하여 절을 해야 하는 바위라 하여 \'절바구\'라고 불리게 되었으며 이 절바구가 있는 산을 \'굴등산\'이라 하는데 절바구 주위에는 크고 작은 바위 사이로 작은동굴이 많이 있어 굴등산으로 불리고 있으며 이곳 굴 속에서 임진왜란 때 집안 사람들을 거느리고 와서 난을 피한 함안조씨 15대손 처사공 휘 응기(절도공파의 파조 위 수천의 아들)의 묘소가 이 산에 있다. 휘 응기의 손자로 한성부 좌윤 오위도총부 부총관으로 증직된 부윤공 휘 의탁(함안조씨 절도공후 부윤공파의 파조임)은 함안조씨 중 사천지역에 맨 처음 들어와 거주하게 되었다. 함안조씨 부윤 승의공파 세보에 보면 \'증부윤공의탁지묘술사설언\'중에 \"공의 묘 수십보 전에 큰 바위가 높이 솟아 있으니 그 높이가 수십발이라. 이름을 절바위라 하는데 풍수의 말에 의하면 후손에게 장군이 많이 나리라 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곳 절바구와 굴등산에 얽힌 이야기들은 함안조씨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절바구 맨 윗부분 바위 틈새에 400~500살 됨직한 분재처럼 잘 생긴 포구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80년대 중반 쯤 없어지고 말았다. 절바구 아래 산 중턱에는 지금은 소나무가 가득차 길을 찾기도 힘들지만 70년데까지만 하여도 나무가 별로 없고 풀밭으로 되어 있어 여름철이면 댕밑의 모든 아이들이 소를 몰고 와서 풀을 먹이던 곳이기도 하다. 소를 먹이러 이 곳에 모이면 소는 제 마음대로 풀을 뜯어 먹도록 내버려두고 아이들은 절바구에 올라가 놀거나 포구총을 만들어 절바구의 포구를 따서 전쟁놀이를 하기도 하고 절바구 주변에 많이 분포되어 있는 동굴 속을 뒤져 박쥐를 잡기도 하고 숨박꼭질을 하여 굴 속에서 나오는 길을 찾지 못한 어린 아이들을 울리기도 하였다.   특히 큰 굴에는 나이든 아이들이 들어가곤 하였는데 6.25사변때 공비들이 사용하던 물건들을 종종 찾아 들고 나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절바구 주변의 어느 굴엔가 살고 있는 큰짐승(이무기)이 일년에 한번씩 건너편의 남쪽 태삼산으로 갔다온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7월 백중부터 8월 추석전 무렵에 산애들(산애새미가 있었던 주위의 들판)의 논을 자세히 보면 나락(벼) 포기가 양쪽으로 눕혀져 있었다 한다.      <큰굴>   절바구에서 10여m 가량 북서쪽으로 가서 자세히 살피면 바위가 서로 엉켜져서 생긴 자연동굴이 하나 있는데 이 곳을 \'큰굴\'이라 하고 옛날부터 이 큰 굴에서 불을 지피면 진주 남강백사장에서 연기가 난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이 동굴의 내부 구조나 깊이를 알아보려고 많은 사람들이 탐사를 시도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휴전 직후에 와룡산에 잔류하던 공비들이 이 동굴에 숨어 살면서 활동하였다는데 60년대까지도 굴 주위에 국군 전투기의 폭격 흔적이 역력하였으나 지금은 나무가 무성하여 그 흔적을 찾기 힘들다.   함안조씨 부윤 승의공파 세보에 보면 처사공응기묘술사설언에 의하면 \"(전략) 석굴이 어둡고 홍몽하야 깊이가 수십리라. 굴안에 들어서면 사람들이 두려움을 느껴 끝까지 들어가지 못한다. 혹시 굴안에 어떤 영물이 있는지도 모르며 근래 경인년의 동란시에는 란을 피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니라.\"라고 기술되어 있다.      <참새미골>   절바구에서 동편 등성이로 넘으면 작은 골짜기를 만나는데 이 곳을 참새미골이라하고 산록변에 참새미(물이 마르지 않고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나는 새미를 참새미라 부른다)가 있어 여름철 풀베러 가거나 소먹이러 가서 참새미의 물을 많이 마셨다.      <거북등>   고동골 마을 뒤에 두 능선이 이루는 골짜기 사이에 거북 등처럼 볼록하게 생긴 지형을 볼 수 있는데 이곳을 거북등이라 부르고 있다. 금귀상천형(金龜上天形)으로 금거북이가 길게 목을 빼어 길게 숨을 들어 쉬고는 승천하려는 형상이라는 풍수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육고자의 전설이 있는 곳이다. 구전되어지는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궁중의 궁녀들을 관리하는 내시들 중에 육씨(陸氏) 고자대감이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지 궁녀들의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여 왕과 신하들이 모두 대경실색 하여 그 원인을 찾을려고 백방으로 수소문 하였다. 내시들은 모두 다 임신을 시킬 수 없는 고자가 틀림없었고 그 당시 의학으로는 도저히 원인을 밝힐 수가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풍수지리설을 활용함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내시들의 선영을 조사하기 위하여 국풍수를 전국에 파견하였는데 이곳까지 천리길을 내려와 요상하게 생긴 거북등을 멀리서 바라보고는 이상하게 생각하고 그 주위의 묘소를 샅샅히 조사한 후 상경하여 이 묘소의 후손인 육대감을 자세히 조사하여 보니 고자가 아니였으며 궁녀와 놀아난 것을 실토하니 육고자대감은 죽음을 면치 못하였고 선영의 묘소는 파헤쳐짐은 물론, 육씨가 살고 있던 동네에는 못을 만들어 동네를 없애버렸다고 한다. 국풍수의 조사 내용인즉 육고자대감의 선영이 거북이 목에 해당하는 지형에 처하여져 있어 그런지 육고자의 생식기가 거북이 목과 같이 들이고 빼고하여 고자처럼 보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현재 신복 가내지 소류지가 있는 곳이 육씨가 살았던 동네라고 전하고 있다.   한편 최창조씨의 「한국의 자생풍수2」(1997. 6. 20 발행 (주)믿음사)의 708쪽의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거북등(金龜嶝) : 금구 남동쪽에 있는 등성이 거북처럼 생겼음. 전에 사천사람으로 고자대감 육씨(陸氏)가 있었는데 그의 기능이 회복되어 많은 궁녀를 임신시키니 나라에서 괴이히 여겨 전국에 국풍수(國風水 : 나라에서 임명한 풍수지관)를 파견하여 조사하던 중 금구에 이르러 지세를 살펴보니 양쪽에 등성이가 있고 그 가운데 등성이의 모양이 남근처럼 생긴 곳에 묘가 있어 파헤치니 묘 속에서 장군이 말을 타고 나오므로 이는 육고자 대감이 반역하려는 징조라 하여 육고자 대감과 그 일족을 죽였다 함. 산위에 큰 바위가 내려다 보고 있는데 나를 범하려는 형상이라 하여 그 후 사천사람에게는 벼슬을 시키지 않았다 함.\"      <칠성(七星)바위>   구월리 앞 들을 지나 송지의 띠앗등을 타고 내려오면서 듬성듬성 놓여진 일곱 개의 바위를 북두칠성과 같이 일곱 개라 하여 붙혀진 이름이며 다른 곳으로 옮기려다가 큰 변을 당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여지는데 문화재관리국에서 답사한 결과 구석기시대의 지석묘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경지정리를 하면서 일부는 매몰되어졌다고 한다.      <벼락바위>   오계산 앞 들판 가운데 있던 바위로 천상의 법을 어기고 옥황상제에게 쫓겨난 이무기가 바위 속에 숨어서 흉측한 묘락을 꾀하는 것을 옥황상제께서 알고는 그 이무기를 죽일려고 벼락을 쳤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해오고 있는데 벼락을 진짜 맞았는지 바위가 갈라져 있었다. 이 벼락바위는 칠성바위 중의 하나이다.      <경지정리>   용치지구 경지정리는 1987. 10. 14에 구월리, 송지리, 금문리 일원의 135.74㏊의 면적으로 시행인가를 받아 1987. 11. 21에 공사를 착공하여 1988. 6. 30에 135.74의 면적으로 준공되었다.      <금구마을회관>   구월리 554-2번지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지 69㎡에 철근콘크리트스라브 2층건물 118.98㎡을 1996년 7월 30일 건립하였으며 사업비는 총 6천만원으로 보조가 3천만원, 마을 자체부담이 3천만원이 소요되었고 마을회관으로 53.56㎡, 경로당으로 65.42㎡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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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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