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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6. 석계리(石溪里)   석계리는 면사무소에서 북쪽으로 약 1.5㎞정도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신복리, 동으로는 사남면, 남으로는 구월리, 서쪽으로는 온정리와 접하여져 있다.   1675년(숙종 1년) 9월 오가통(五家統)의 사목(事目)에 의하면 사천현(泗川縣) 9방면(坊面)중의 하나인 중남면(中南面)이다가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진주부(晉州府) 사천군(泗川郡) 중남면이다가 1896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사천군 중남면에 속하였다.   1907년 지방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중남면의 석계동(石溪洞), 세암동(洗岩洞)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clr령 제111호 군∙면폐치분합에 따라 석계동과 세암동, 용정동(龍井洞), 하남면의 마월동(磨月洞) 일부가 합하여져 읍남면(邑南面)석계리(石溪里)로 되었다.   1931년 4월 1일 부령 제 12호에 의한 면제의 개정으로 이 해 8월에 읍남면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고쳐 용현면 석계리(石溪, 洗巖마을)로 되었고 1995년 5월 10일 법률 제4948호의 도농복합형태의 시설치등에 관한 법률에 의거 사천시(泗川市) 용현면 석계리가 되었다.   석계는 기원후 663년 신라의 지배에 들어간 포상팔국(浦上八國)중의 하나인 사물국(史勿國)이 사물현(史勿縣)으로 강등하여 현의 치소(治所)가 석계리에 있었다고 한다.

  • 석계(石溪)      석계마을은 본동네, 육구개, 사랑미, 못골 등 4담으로 이루어져 있고 은진송씨(恩津宋氏) 집성촌이다. 통일신라시대 진흥왕 이후부터 아니면 그보다 훨씬 앞선 사물국시대부터 현기(縣基)가 정동면 고읍리(古邑里)로 옮긴 757년까지 치소(治所)가 있었으므로 땅이름의 유래에 대하여 많은 기대를 하였으나 의외로 구전(口傳)되어지는 이야기를 찾을 수 없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석계(石溪)는 돌개(물이 돌아 흐르는 개울가의 마을이라는 뜻임)라는 지명(地名)의 음∙훈차 (音∙訓借)라고 본다. 돌개에서의 돌은 돌다(回)의 뜻이고 개(浦)는 물가의 뜻으로 돌이 돌석(石)자로 훈차(訓借:뜻빌림)되고 개는 계(溪)로 음차(音借:음빌림) 되었을 것으로 본다. 세암골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계곡을 따라 이리저리 돌아 흐르는 지형에서 유추할 수 있다. 경북 경주군 외동면 석계리도 돌아 흐르는 물가의 마을이라는 지형에 따라 원래 지명이 돌개인데 석계리로 표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우리면 석계리도 이와 같은 유형이 아닐까 하고 생각 되어진다.      <웃땀>   석계마을 동쪽에 있는 마을      <아랫땀>   석계마을 아래쪽 국도변에 있는 마을이다.      <야달마지기 둠벙>   석계마을 서쪽에 있는 농사용 둠벙으로 이 둠벙을 이용하여 여덟마지기의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육구개>   면소재지에서 석계마을로 가는 중간의 궁개미산이 있는 곳을 육구고개 또는 육구개, 육구라고 하는데 풍수지리상으로는 어미개가 여섯 마리의 새끼를 품고 있는 형상이라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914년 4월 1일 이후 중남면의 면사무소 청사가 육구개에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조석조씨 선대 묘소 부근이라고 한다)   최창조의 「한국의 자생풍수2」(1997년 6월 20일 발생 (주)믿음사) 708쪽에는 󰡒육구산(육구산 : 궁갬이, 궁장) : 신송 북쪽에 있는 산. 음양설에 따라 개가 젖먹는 형국이라고 하고 또는 활을 감춘 형국이라고 함󰡓이라고 되어 있다.      <사랑미>   석계못 북쪽에 있는 조그마한 동네를 사랑미 또는 사랑맹이라 한다. 함안군 군북면 사촌리에는 󰡐사랑󰡑 또는 󰡐사랑목󰡑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골짜기 안쪽의 마을인 점으로 보아 원래 󰡐살안󰡑이란 이름으로 불렸던 곳이 아닌가 한다. 우리말 샅은 사이, 두 물건 사이의 틈을 뜻하는데 우리말 중에는 ㄷ,ㅌ이 ㄹ로 개음절화(開音節化)된 경우가 많은데 그 예를 들면 모단(牡丹)>모란, 낟+악=낟악→나닥>나락, 구지담>구지람(꾸지람), 대통>대롱, 모퉁이>모롱이, 흐터>흐러 등이 있다. 샅안(사이의 안쪽)+미(산 : 제주도에서는 뫼를 미라 한다)→샅안미>살안미→   사랑미 등을 미루어 보아 사랑미는 산 사이의 골짜기 안쪽 마을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랑이못>   사랑미 동네에 있는 못(소류지)이다. 1945년에 축조되고 제당높이는 8m, 길이는 281m, 저수량은 10만5천2백톤이고 유역면적은 16㏊, 만수면적은 0.9㏊이다.      <못골>   별베기와 사랑미 사이에 있는 동네를 못골이라 한다. 옛날에 이곳에 못이 있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 흔적을 찾을 길 없다.   못골 앞등이 뱀형국의 지형이라는 풍수설이 있다. 그런데 생각하기로는 못이 있었다기보다는 별베기에서 온정마을로 들어가는 곳을 목뒤라 하는데 목뒤 부근에 있는 동네라 하여 목골이라고 부르지 않았나 하고 생각한다.      <멧골>   석계마을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다.      <별베기>   석계마을의 북쪽편에 신복리와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과 그 근방을 말하는데 일명 별박산이라고 한다. 세암골 뒷산인 된먼당에서 내려다 보면 별이 박혀 있는 형상이라는 설이 있어 별베기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옥밭>   옥골에 있는 밭이다. 옛날 현기가 석계리에 있던 시절의 감옥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기왓장이 출토된다고 한다.      <옥골>   석계마을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를 옥골이라 한다.      <청석골>   마을 동쪽에 있는 작은 산으로 돌이 많다.   <장지골>   옹기굴 가마터가 있었다고 하며 이 곳에 한때 도굴꾼들이 몰려와 그 주변과 무덤들을 여러차례 파헤쳐 유물들을 도굴해 갔다고 한다.      <수채뚬벙>   석계 남쪽에 있는 웅덩이. 지하를 통해서 농사에 물을 이용한다고 한다.      <석계천>   세암골에서 발원하여 석계동네 앞을 거쳐 서쪽 강지바다로 흐르는 하천이다.      <세암>   봉대산과 하늘먼당 뒤편 사이의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옛날에는 암자가 많이 있어 절골이라고도 하고 절산이라고도 하였으며 마을 이름을 세암(洗岩) ; 작은 암자가 많이 있었다는 뜻임)이라고 있었다고 한다. 지금의 세암(洗巖)이라는 글자는 약 80여 년 전인 일제강점기 때부터 쓰기 시작하였다고 마을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는데 아마 1914년 군면폐치분합시 지명의 표기가 바뀌지 않았나 생각된다.   세암(洗巖)이라는 뜻은 계곡의 바닥이 암반으로 깔려 있고 그 위로 맑은 물이 흐르므로 바위를 씻는다는 그럴듯한 해석을 하기도 하지만 일본인들이 지명을 바꾸었다고 생각하면 어떤지 씁쓰레한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다. 석계리에 속한 한 자연마을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은 마드리를 통하고 있다. 그리고 1999년 4월부터 시작하고 있는 저수지 추측 조공사로 인하여 동네가 이주(移住)되고 수몰(水沒)될 위기에 처해졌으며, 현기(縣基) 및 많은 사찰지(寺刹址)에 대하여 지표조사(地表調査)를 해 볼 가치가 있는데 안타깝기만 하다.

  <세암골>   마드리를 지나 세암폭포가 있는 곳부터 동네가 있는 골안 전체를 세암골이라 한다.      <세암다리>   세암동네로 들어가기 전, 세암폭포 바로 위의 다리로 길이 10m, 높이 7m, 폭 5m로 1971년 6월 10일 준공하였는데 저수지 공사로 수몰될 위기에 처해 있다.      <성지골>   세암동네의 동쪽 하늘먼당 뒤편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마을 원님이 살고 있는 골짜기라 하여 성지골로 불려진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는데 신라시대 진흥왕 이후 사물국이 사물현으로 강등되어 현기가 석계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과 이 곳 성지골의 구전되는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경덕왕 16년(757) 현기가 정동면 고읍에 이전하기까지 세암 어디쯤에 현기가 있지 않았을까 의구심을 가지고 조사해 볼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보운골>   성지골에 있는 골짜기이다.      <옥골고랑>   세암에서 명기재를 향하여 넘어가는 계곡      <세암음달>   세암동네 앞의 남쪽 산비탈. 하늘먼당의 북쪽 사면을 말한다.      <홈소>   성지골 위쪽에 있는데 계곡에서 내려오는 물기이 오목하고 길게 패여진 홈과 같이 생겼다 하여 불리는 이름이다.      <동우소>   홈소 아래에 있고 독(운두가 높고 중배가 약간 부르며 전이 달린 큰 오지그릇이나 질그릇을 경상도 방언으로 동우, 도오라 한다)과 같이 생긴 소(沼)의 이름이다.      <행기소>   동우소 아래에 있고 오월 단오와 칠월 칠석날이면 행기소의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하면 병에 걸리지 않는다고 믿어 이날이 되면 동네 아낙네들이 즐겨 찾는 곳이였다고 한다.      <원지소>   지금의 세암동네로 들어가는 길의 세암다리 아래에 있는 소(沼)로써 옛날 원님이 자기 딸과 함께 폭포 위로 말을 타고 건너가다 말이 미끄러져 넘어지는 바람에 같이 타고 있던 딸리 폭포에 빠졌는데 그때 깊은 폭포속에 살고 있던 이무기가 원님의 딸을 잡아먹고 용이되어 하늘로 승천하였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으며 그 때부터 원지소라 불려졌다고 한다.   이 원지소에 명주실꾸리를 풀어 놓으면 청골 앞 단박소(당병소)에서 실 끝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 현재 당병소는 자갈로 거의 메워져 있는 상태이다.

  <세암폭포>   원지소가 있는 곳에 높이 약 5m의 폭포가 있다.   1999년 5월에 저수지 축조공사가 시작되었는데 이 폭포가 저수지제당의 중앙지점으로써 영원히 볼 수 없는 지점이 되어진다. 폭포에 \"洗巖瀑布\"라고 각자(刻字)된 바위가 하나 있는데 용현조기회에서는 1999년 6월 일 용현면장과 사천농지개량조합장 앞으로 이 바위를 매몰시키지 말고 안전한 곳으로 이동, 보관하였다가 저수지 완공 후 후세의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다시 설치할 수 있도록 협조를 요청한 바 있다.

세암폭포 글자가 새겨진 바위

  <세암못>   세암폭포 아래에 똘떼이재 아래에 있는 못으로 1949년에 축조되고 수혜면적은 8.5㏊이고 제당의 높이는 7m, 길이는 35m, 저수량은 4만5천톤, 유역면적은 216㏊, 만수면적은 0.7㏊이며 콘크리트제당 댐이다.

토끼가 놀았다는 묘락정

  <묘락정>   세암에서 무제터를 오르기 전에 순우대가 우거진 곳에 샘이 있는데, 연대를 알 수 없는 절(빈대 때문에 없어진 절)터를 답사하던 중수량이 풍부한 샘을 발견하여 민주산악회와 본회에서 주변을 정비하고 샘을 석빙고처럼 설치하여 그 이름을 묘락정이라 명명했다.   지금은 봉대산을 찾는 등산객들의 휴식과 식수를 제공하는 유일한 샘으로 각광받고 있다      <무제터>   세암동네 동쪽의 높은 봉우리로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1960년대까지만 하여도 가뭄이 들면 석계 이남의 전 동네사람들이 보릿대, 생솔가지 등을 한짐씩 지고 올라가 기우제를 지내고 불을 놓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된먼당>   세암동네 북쪽의 제일 높은 봉우리로 온정 이북 동네사람들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석계마을회관>   석계리 262-4번지에 위치하며 대지면적 161㎡에 브럭스라브의 132.20㎡ 이층건물로 1974년에 건립되었다. 마을회관으로 66.10㎡, 경로당으로 66.10㎡으로 활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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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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