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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 선진리(船津里)   선진리는 면사무소에서 북서쪽으로 약 5㎞정도 떨어져 있으며 북으로는 사남면, 동으로는 신복리, 남으로는 통양리, 서쪽으로는 사천만과 연접해 있다.   1675년(숙종 1년) 오가통(五家統)의 사목(事目)에 의하면 사천현(泗川縣) 9방면(坊面)중의 하나인 중남면(中南面)에 속해 있었고, 1895년(고종 32년) 5월 26일 칙령 제98호에 의거 진주부(晉州府) 사천군(泗川郡) 중남면(中南面)이다가 1896년 경상남도(慶尙南道) 사천군 중남면에 속하였다.   1907년 지방 행정구역 정리에 따라 중남면의 화계동(花溪洞), 연포동(蓮浦洞)으로 되어 있다가 1914년 4월 1일 칙령 제111호 군∙면 폐치 분합에 따라 화계, 연포, 통양동(通陽洞)의 일부를 합하여 읍남면(邑南面) 선진리(船津里)라 하였다.   1931년 4월 1일 부령 제12호에 의한 면제의 개정으로 이 해 8월에 읍남면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고쳐 용현면 선진리(선진, 연호, 신기마을)로 되었으며, 1995년 5월 10일 법률 제4948호의 도농복합형태의시설치등에 관한법률에 의거 사천시(泗川市) 용현면 선진리로 되었다.   선진리에는 일찍이 고려시대의 12조창 중의 하나인 통양창(通陽倉)이 설치되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건조하여 실전(實戰)에 맨처음으로 투입했던 곳으로 임진왜란, 정유재란의 흔적이 있는 곳이고 1997년부터 개최하고 있는 선진리성 벚꽃 축제로 상춘객이 붐비고 있으며 평시에는 수산물이 풍부하여 횟집을 찾는 외지 사람들의 왕래가 많은 곳으로 유명해졌다.

  • 선 진(船津)   <선조실록>에 의하면 선진의 지명이 여럿 나타나는데 이를 살펴보면 이순신장군의 사천해전 때에는 선창(船滄), 정유재란 때에난 법질도(法叱島), 신채(新寨), 동양(東洋), 동양창(東洋倉) 따위로 기록하고 있고 조선 후기에는 이 곳에 삼천진보(三千鎭堡)가 설치되어 선진(船鎭) 또는 선소(船所)라 했으며, 구한말 때는 화계(花溪)라 고쳐 불렀는데 지금은 선진(船津)이라고 부르고 있다.   사천현여지승람(泗川縣輿地勝覽) 기묘(己卯) 수정책(修正冊) <강희(康熙) 38년, 숙종 25년, 1699 刊> 고적조(古跡條)에 살펴보면      통양창성재현남십칠리토축주3,086척즉집수세지지   (通洋倉城在縣南十七里土築周三千八十六尺卽集收稅之地)      \"통양창성은 현 남쪽 17리(약 9,19km)에 있고 흙으로 축성되었으며 그 둘레는 3086자(약 935m)인데 세금을 받아서 보관하던 곳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증전선소(新增戰船所)조에   \"재현남17리통양창성중(在縣南十七里通洋倉城中) ; 새로보탬. 전선소는 현 남쪽 17리에 있고 통양창성 안에 있다.\"      라는 기록을 찾을 수 있다.   선진은 1913년 日人들에 의하여 開港되었으며 1989년 앞 바다를 매립하여 선진관광휴양마을을 조성, 집단 횟집을 유치하므로서 사천만의 싱싱하고 풍부한 어자원을 이용한 횟집촌이 번창하고 있다. 그런데 선진(船津)이라는 지명은 1914년 군∙면폐치분합시 일본인들이 억지로 지어 붙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선진관광휴양마을 조성 내역(사업비 ; 5억여원)   환경정비사업; 가로등, 파고라설치와 소공원, 주차장시설, 식당6동, 숙박시설 1동, 벚꽃나무 2.5km식재   기반조성사업; 공유수면매립 6500㎡, 해안도로포장 700m, 계단20m, 상하수도 시설 1식, 진입로 포장 200m      <곶개>   1832년(순조 32년)의 경상도읍지(慶尙道邑誌)의 사천현읍지(泗川縣邑誌) 중 사천현 지도를 보면 \'선소(船所)\'라는 지명으로 나오고 1907년 지방행정구역정리시의 기록에는 화계동(花溪洞)이란 지명이 나오는데 이는 \'곶개\'가 \'화계\'로 음∙훈차(音∙訓借)되었다고 본다. \'돌출\'의 뜻을 가진 \'곧\'은 땅이름에서는 차츰\'곶\'으로 정착되었다. 이 \'곶\'은 대개 어떤 돌출된 지역을 나타내는 뜻으로 씌어 반도의 끝부분인 곳에 \'장신곶\', \'장기곶\'같은 곶 지명이 생기게 되었으며 곶은 대개 \'곶串\'이라는 한자를 빌어 적었고 더러는 \'꽃\'으로 변해 한자의 \'화(化)\'자를 쓰기도 하였는데 \'곶\'은 \'꽃\'의 옛말이기도해서 한자의 꽃화(化)자로 취해진 것이다. 선진리성의 옛날 지형을 설명한 글을 보면 남, 서, 북 삼면이 바다에 접해 있고 동쪽만이 육지와 연결되어 전략상 요충지였다는 설명이 있는데 이를 유추해 보면 곶(돌출한 땅, 땅의 한 끝부분이 어느 한편으로 불쑥 벋어 나간곳)+개(물가)와 상통하지 않은가. 곶은 꽃화(化)자로 훈차(訓借)되고 개는 시내계(溪)자로 음차(音借)되어 화계(花溪)라 불렀으며 원이름은 곧개→곶개가 화계로 한문식 표기를 하였으리라 본다.   선진마을 강영국옹의 증언에 의하면 화계라 불리던 동네는 현재의 선진마을과 통양마을의 중간쯤, 조명군총 아래에 있었던 동네라고 한다.      <동밖>   선진성 앞의 현재 주차장에서 조명군총쪽으로 약간 고개진 곳밖을 동밖이라 한다.      <방아실골짜기>   선진과 통양마을 사이의 골짜기, 방앗간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위치적으로 유추해 보면 화계마을이 있었던 곳과 일치하는성 싶다. 앞의 들을 󰡐방아들󰡑이라 한다.      <대창문>   공원 위에서 남쪽으로 보면 민묘가 있는 곳에 약간 움푹 파인 곳으로 옛날 전선소가 있을 때 무기고가 있었다고 전한다. 한글학회에서 펴낸 한국지명총람 9권 경남편에는 󰡐대청(터)󰡑 ; 선진성 밑에 있는 터. 관청의 자리였음. 이라고 되어 있다.      <별당(밭)>   선진성 밑에 있는 밭에 옛날 관청의 청사가 있던 자리라 한다.      <뒷갱문>   바다를 매립하여 지금은 흔적이 없어졌다. 횟집 단지가 있는 곳이다.      <굴항>   현재의 까치노래방 앞에서부터 공원횟집 부근으로 매립되어 흔적이 없어졌지만 광복후에도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옛날 전선(戰船)을 계류할 수 있도록 조성되어진 곳으로 바다쪽에서는 배가 보이지 않도록 만들어진 곳이 였다고 한다. 󰡐군개󰡑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대방의 굴항과 비슷한 모형이였다고 전한다.      <죽방염>   보통 \'발\'이라고 하는데 선진 앞바다에는 1969년 남강댐방류 직전까지는 17채가 있었는데 지금은 8채만 남아있다. 그것도 옛날처럼 순전히 대나무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고 V자?테두리만 대를 사용하고 고기가 드는 곳에는 정치망이라 하여 그물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 죽방염은 임진란 이전부터 우리 선조들이 해오던 어로방식으로 추측할 수 있는데 임진란 때 왜군들이 죽방염이 설치된 것을 보고 육지인줄 알고 멀리 도망을 갔었다는 이야기가 구전되고 있다.      <물새미>   현재의 진주장여관이 앉혀진 곳에 물이 좋은 새미가 하나 있었는데 이 샘물을 마시는 사람들의 성격이 아주 포악하였다. 어떤 역술가가 이야기 하기를 \"이 샘물은 물살이 세어서 마시는 물로는 적당하지 않다. 이 물을 마시는 사람들은 성격이 거칠고 사나우니 이 새미를 폐쇄하여야 한다\"고 하여 이 새미를 막아버렸다고 한다. 그 뒤 이 터에 일본사람 앵길이가 소작료를 받아두는 창고를 지었다고 하며 앵길이라는 사람은 선진근방의 논을 전부 사들여 소작을 주었는데 자기에게 불리한 이야기는 못들은체 하고 유리한 이야기는 잘 알아 듣는 가는귀가 먹은 사람처럼 했다고 한다. 이 창고터에서 80여년 전까지만 하여도 불탄 쌀이 나왔다고 한다.      <오물등>   바닷물이 많이 빠지면 바다 가운데 오도록하게 산같은 등이 나타나는데 7,80년전 이 곳에서 목책(木柵)을 볼 수 있었다고 전한다.   1997년 2월에 진해시 제덕동 제포의 매립공사를 하는 동중에 조선시대 수군진이였던 이 곳에서 군사 방어용으로 쓰였던 목책인 나무 말뚝이 솟아나서 사학계(史學系)의 관심을 가진바 있는데 오물등에서 나온 목책도 이런 유형이 아닐는지 조사가 필요하리라 본다.   오수등이라고도 부른다.      <대섬골짜기>   대섬 앞에 있는 깊은 수로(水路)로 물이 많이 빠지는 영동시에도 수심이 깊어 큰배가 왕래할 수 있는 유일한 수로라고 한다.      <굴강(掘堈), 구강>   선진리성 뒤편(북쪽)을 굴강 또는 구강으로 변음되어 불리고 있다. 굴강이란 말은 땅을 파서 둑을 쌓은 것을 의미하는데 땅을 파내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이 곳에 10여호 되는 조그마한 동네가 있었는데 염전과 죽방염을 소유하고 있어 대단한 경제력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 때 간척을 함으로서 동네가 소멸되었다.      <옥터>   선진리성 아래에 옛날 전선소(戰船所)가 있을 때 군인들이 사용하던 감옥(監獄)이 있었다고 전한다.   현재의 위치는 마을회관 왼쪽편의 움푹 꺼진 곳이다.      <옥터 새미>   옥터에 있던 새미이다.      <대섬>   오시환씨 농장 바로 앞에 섬이다. 한문표기로 죽도(竹島)라는 이름도 있으나 대섬으로 더많이 불린다. 지금도 조그만한 대가 많이 서있고 옛날에는 지네가 많았다고 한다. 50-60대의 사람들이 어릴적에 집동만한 지네를 보았다고 하는데 그렇게 큰 지네가 있었는지 그리고 지네가 그렇게 클 수 있는지 의문을 가진다.

  <대섬널>   공원에서 남쪽으로, 지금의 동네가 있는 곳을 통과하여 바다까지 길게 뻗어나간 구릉을 대섬널이라 한다. 이 대섬널 앞에는 대섬이라 불리는 조그마한 섬이 있는데 쭉 뻗은 대섬널과 앞에 놓여있는 대섬이 풍수지리적으로 보면 구렁이의 힘을 저지시킬려고 목부위를 짜르면 그 기를 죽인다고 여겨, 목부위 쯤 되는 부근에 깊이 3m, 폭 5m 정고를 판 흔적을 지금도 볼 수 있다.      <장터>   선진에서 굴강(구강)을 건너가서 현재 연호마을의 서편에 사창<社倉 ; 조선시대 각 고을에 社라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는 민간에서 자치적으로 곡식(나락, 보리, 밀 등)을 저장해 주고 춘궁기(春窮期)에 대여하는 가을에 받아들이는 구휼(救恤)을 위한 곡물 창고인데 1451년(문종1년)에 실시되어 1470년(성종1년) 이후 여러 가지 폐단이 생겨 없어졌다>이 있어 이 곳에 장(市場)이 섰다고 한다.   인근 사람들이 부르는 토속 땅이름은 세를 받아서 보관하던 곳이라하여 \'세지\'라고 하고 소전(우시장)도 있었다고 하며 초전쪽으로의 들을 \'세지들\'이라 한다.   순조 32년(1832년)에 간행된 사천읍지 창고조에 \'향창 재현남이십리(餉倉在縣南二十里 ; 향창이 현기에서 남쪽으로 이십리 지점에 있다)\'이라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향창(餉倉)이란 군량미 창고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철종 13년(1862)부터 고종 3년(1866)까지 집필된 대동지지 창고조에 \'병창(兵倉) ; 중남면(中南面)에 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인근 선진(船鎭)에 진보(鎭堡)와 수군군기고(水軍軍器庫)가 있었으며 거리상으로 보아 구전되고 있는 창고터가 이 향창 및 병창과 관련있는 것이 아닌지 의문스럽다.      <장골>   장터가 있던 곳의 마을. 장터골이라고 한다.      <가매바구>   장터에서 사남면 초전 앞들로 쪽으로 가는 곳에 있는데 가마같이 생긴 바위이다.      <가매바구 새미>   가매바구 옆에 있는 새미이다.   <선진마을회관>   선진리 1010-1번지 136㎡의 대지에 브럭스레트 단층 건물이 96.96㎡ 건평으로 1974년 건립되었다. 회관으로 71.96㎡, 경로당으로 2.5㎡를 활용하고 있다.

  • 연호(蓮湖)      1914년경의 기록에는 연포(蓮浦)라는 지명으로 되어 있고 흔히 연개라고 부른다. 일부 사람들에 의하면 굴강(구강)에 염전이 있어 염포(소금을 만들고 실어 나르는 갯가)라고 하기도 하고 염전이 있던 곳이 연밭(蓮田)으로 변하여 오늘의 연호라는 이름이 생겼다고하나 정확한 연원은 알 수가 없다.      <연호마을회관>   선진리 445-2번지에 위치하고 294㎡의 대지에 철근콘크리트 2층건물이 159.06㎡의 건평으로 보조 6천4백만원, 마을자체부담 1천3백만원 합계 7천7백만원으로 1998년 10월 17일 준공되었다. 회관으로 66㎡, 경로당으로 93.06㎡를 활용하고 있다.      <큰땀>   현재 연호마을의 중앙을 큰땀이라 한다.      <궤복>   궤복재에서 작은땀으로 오기전의 오른쪽 마을을 궤복이라 한다.      <연개못>   궤복앞에 있는 못으로 1945년에 준공되었고 수혜면적은 3ha이며 제당높이 4m, 길이 95m, 저수량은 1만1천톤, 유역면적은 8ha, 저수지 만수면적은 0.6ha이다.      <작은땀>   궤복재에서 큰땀으로 들어오기 전의 부근을 작은땀이라 한다.      <참나바키>   큰땀 뒤편의 동네를 참나바키라 한다.      <구움터>   마을 아래쪽의 전씨선산이 있는 부근이다.      <강거제이>   강씨 선산이 있는 곳을 강거제이라 부른다.      <새땀>   연호 본마을의 서쪽에 있는 마을로 구강 동쪽이다.      <통새미>   마을입구에 있었는데 식수로는 사용하지 않고 주로 빨래를 하던 새미이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아 없어지고 말았다.      <잔골>   지금의 신종열씨집 근방을 잔골이라 한다.      <서지>   동네 뒤편의 구릉을 서지라 한다.      <어엄골>   구강땀이 있는 주변을 어엄골이라 한다.      <잉어산>   연호동네에서 서쪽으로 쭉뻗어 있는 산을 잉어의 등줄기와 같이 생겼다 하여 잉어산이라 한다.      <큰연개>   연호마을 뒷들을 큰연개라 하고 이곳을 지나서 청골로 갈 수 있다.

  <축산기술연구소 사천지소>   선진리 산 180-2번지에 소재하고 있는 축산기술연구소 사천지소는 속칭 종축장으로 부르고 있다.   국립종축원은 우량종축의 생산, 보급, 가축사양관리, 자급사료생산 및 초지개량에 관한 조사연고와 목장경영방법의 시범과 훈련에 관한일 등을 맡아보는 농림부 산하기관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성환읍의 본원과 대전, 사천, 대관령, 남원의 4개 지원으로 조직되어 있다. 본원은 원래 일본인 아카기(적성철마)가 세운 성환목장으로 1915년 종마(種馬) 생산을 위해 설립하였다. 1947년 국립으로 이관되어 농사개량원 성환축산시험장으로 바꿔었으며 1958년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으로 개편, 축산연구와 조사기관으로서 20여 년간 운영되어 오다 1969년 농림부 직속의 국립종축장으로 개편, 84년 국립종축원으로 개칭되었다. 현재는 품종이 우수한 젖소, 종돈(種豚), 종계(種鷄), 종토(種兎)를 생산하여 양축농가에 보급하고 있다. 대전지원은 원원종계, 사천지원은 원종돈을 보유하고 있고 대관령지원은 육우의 생산사업, 남원지원은 면양 및 한우 개량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지역의 지소는 1956년 농림부 중앙축산기술원 사천지원으로 창설되어 1958년 농사원 축산시험장사천지장으로 개칭되고, 1962년 농촌진흥청 축산시험장으로 다시 개칭되었으며 1969년 국립총축원사천지장으로 개칭되었으며 1984년 국립종축장 사천지원으로 개칭되었다가 1994년 축산기술연구소 사천지소로 개편되었다. 1999년 정부 주조조정의 일환으로 사천지소의 기능을 축산기술연구소 중소가축과로 통합하여 개원 43년만에 문을 닫게되었다.   역대 장장 및 지원장, 지소장은   1대 박태진(1968. 12 ~ 1975. 7)   2대 정승규(1975. 7 ~ 1978. 8)   3대 오대균(1978. 8 ~ 1980. 12)   4대 강만석(1980. 12 ~ 1984. 2)   5대 박상문(1984. 2 ~ 1988. 9)   6대 김길수(1988. 9 ~ 1994 )   7대 유재선(94 ~ 95)   8대 김원영(95 ~ 97. 9)   9대 탁태영(97. 9 ~ 98. 4)   10대 최진성(98. 4 ~ 99. 6. 30)이며 장내(場內) 총면적 49,500평중 시험축사가 13,500평, 목야지가 15,000평, 기타부지가 21,000평이며 이중 농촌진흥청 소유가 37,800평, 도유지가 11,700평으로 되어 있으며 주요시설로는 사무실 1동 126평, 회의실 1동 196평, 시험축사 15동 1,505평, 폐수처리장 1동 99평, 유기질비료공장 1동 208평, 부속건물 15동 330평이 있다.   주요업무로는 돼지의 품종보존 및 능력검정, 우량종돈의 생산보급, 종돈사양관리에 관한 조사연구, 돼지사양관리의 시범교육과 훈련 등의 업무를 관장하다가 정부의 구조조정으로 2000년 6월까지 운영하다 폐쇄키로 되었다.      <청골 ; 靑谷>   연호마을 북쪽 야산 계곡에 있는 마을로 마을 앞 죽천천에는 정유재란때 명나라 군사가 선진성 싸움에서 패하여 후퇴하면서 지형을 몰라 죽천천의 소(沼)에 빠져서 전사하였다고 전하여져 오는 당병소(唐兵沼)가 있다.      <앞골>   연호마을의 앞쪽인 남서쪽에 있는 구릉의 골짜기      <잡지골 ; 雜地谷>   청골 들어가는 길과 두곡 중간의 북쪽편, 사남면 죽천마을의 공동묘지가 있는 골짜기를 잡지골이라 부르는데 곡식이 자라지 않고 쓸모없는 박토라 하여 이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한다.      <두곡 ; 斗谷>   용남중∙고등학교 서쪽, 해주오씨(海州吳氏) 재실(齋室)이 있는 곳으로써 예부터 이 곳은 땅이 비옥하므로 곡식이 잘 자라므로 살림살이가 넉넉하여 기와집이 많이 들어선 마을이 있었다고 전하며 지금도 땅을 파 보면 기와조각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새청들 ; 새치들>   석거리, 평기, 개머리, 청용마을의 가운데 있는 들을 새청들 또는 새치들이라 한다. 점토질(粘土質)이 많은 지구와 간사지 지구가 있어 수리시설이 좋지 않던 일제강점기 이전(서택저수지 축조 전)에는 가뭄이 들면 염분이 올라와 벼가 자라지 못하였으며 새가 땅에 앉아서 벼를 파먹는다 하여 새청들 또는 새치들이라 한다.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 있고 사남 구룡저수지의 농업용수(農業用水)가 오므로 수리 안전답으로 변하여 옥토가 되었다.      <새치들 경지정리>   신복지구 경지정리는 통양리, 온정리, 선진리내의 농지를 1981. 10. 31 시행인가를 받아 시행면적 114.48ha에 1981. 11. 20에 착공하여 1982. 4. 30 준공하였는데 그 면적은 114.45ha이다.

연호 출신 尹翼成씨가 기증하여 1976년 4월 11일 건립한 이충무공 동상

  • 신 기(新基)      석거리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1965년에 개통하여 1980년 10월 1일 적자운행으로 폐지되기까지 진삼선(晉三線) 철도의 선진역(船津驛)이 있었던 마을이며(개양에서 사천읍간의 철도는 1953년에 개통하였음) 1963SUSD[는 용남공설시장이 섰던 곳으로 유흥업소도 많았고 경제활동이 활발하였던 곳이다. 그리고 1952년 5월 1일 개교한 용남중학교와 1967년 10월 5일 개교한 용남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이기도하다.   석거리는 섬거리가 변음되었다고도 하는 설이 있는데 그 내용은 덕석골에서 나는 곡식을 섬에 넣어 쌓아 두던 거리라 하여 섬거리란 이름이 생겼다는 이야기가 있으나 확실한 이야기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1945년 광복때에는 20여 가구에 불과하였으나 용남중학교 개교와 용남공설시장이 개설됨에 따라 원근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거하여 200여 세대에 이르는 큰 마을로 발전하면서 농촌지역이지만 소도시의 면모를 갖추고 있다. 토박이의 주민보다는 각지에서 성씨가 다른 사람들이 모였으므로 한때는 인심이 야박하다는 비난도 있었지만 1970년도에 화합과 단결을 꾀하기 위하여 신기마을조기회를 조직함과 아울러 1990년대에는 마을회를 조직하여 노소(老少)가 함께 어울려 마을의 화합을 도모하고 동네의 대소사를 공동 협의함으로써 모범적인 마을로 변모하고 있다.      <신기마을회관>   선진리 116-4번지의 대지 99㎡에 철근콘크리트 2층건물이 114㎡의 건평으로 1992년 11월 14일 준공되었다. 회관과 경로당으로 각각 57㎡씩을 이용하고 있다.      <한빼재기배미>   석거리 남쪽에 있는 논. 1927년 기사년 흉년때 나락 한 보자기와 논을 바꾸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용남중학교>   선진리 6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9년 현재 학생수는 260명이고 교원수는 18명이며 일반직이 4명이며 1952. 5. 1 개교하여 1953. 4. 30 학교법인 용남학원으로 인가를 받았으며 1999. 2. 12 제46회 졸업식을 가졌으며 총 9,445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역대 교장은   1대 최동수(1952. 5. 1 ~ 1980. 2. 28)   2대 최태문(1980. 3. 1 ~ 1987. 9. 30)   3대 안진태(1987. 10. 1~ 현재)이다.

  <용남고등학교>   선진리 6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9년 현재 학생수는 589명이고 교원은 32명이며 일반직이 5명이고 1953. 4. 30 학교법인 용남학원으로 설립인가를 받았으며 1967. 10. 5 용남실업고등학교로 개교하여 1973. 9. 4 용남고등학교로 교명을 개명하여 1999. 2. 12 제29회 졸업식을 가졌으며 총 5,751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역대 교장은   1대 최동수(1968. 3. 1 ~ 1989. 2. 28)   2대 최대림(1989. 3. 1 ~ 현재)이다.      <석거리 장>   석거리 마을의 중앙 북편에 있다. 1963년 공설지장이 개설되었다가 1980년대초에 철시되었다.      <선진역>   석거리 마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5년부터 1980년 10월 1일까지 약 15년간 운영되었으나 지금은 건물은 그대로 있으나 일반주택으로 사용하고 있다. 철로가 걷어지고 사천~삼천포간 27㎞의 국도 확∙포장공사는 366억원의 사업비로 1987. 12.부터 90. 12. 30까지 건설부 부산지방국토관리청에서 시행하였다.

  <선진우체국>   설립년도는 확실하게 알 수 없으나 일제시대부터 설치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사천우체국, 곤양우체국과 같이 설치 되었다고 한다. 사천우체국 개설시 최동수 용남중학교 교장선생님, 오성근씨 등이 힘을 모아 용현, 사남의 중간지점인 이 곳에 유치하였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선진항의 일본인들이 주로 활용하고 광복후 폐국론이 대두되었으나 인근의 인사들이 합심하여 존치토록 하였다. 용남중학교, 종축장 등이 우체국을 이용하는 주요 기관이였고 정부의 구조조정대책의 일환으로 1면 1우체국 시책에 의하여 1999년 월 1일 폐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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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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