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용현향토사



용현향토사

6.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1914년 3월 1일부터 시행하게 된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하여 도의 관할구역과 부• 군의 명칭, 위치, 관할구역이 개편 통합되었다.   우리 사천군은 읍내(邑內), 읍동(邑東), 읍서(邑西), 읍남(邑南), 남양(南洋), 수남(洙南), 문선(文善), 축동(축洞), 곤양(昆陽), 곤명(昆明), 서포(西浦) 등의 11면(面) 117동(洞)으로 개편되고 우리면은 중남면(中南面)의 14개동리(個洞里)와 하남면(下南面)의 15개동리(個洞里), 남양면(南陽面)의 대선동(大禪洞) 일부를 병합하여 12개리(個里)로 개편하고 읍남면(邑南面)이라 하였으며 면소재지(面所在地)는 석계리 육고개에 있었다.   읍남면의 12개리는 다음과 같다.      • 선진리(船津里) : 중남면의 화계(花溪), 연포(練布), 통양리(通洋里)의 각 일부   • 통양리(通洋里) : 중남면의 조금(助禁), 통양(通洋), 신촌동(新村洞)의 각 일부   • 신촌리(新村洞) : 중남면의 종포(宗浦), 화촌(花村), 신촌동(新村洞)의 각 일부   • 신복리(新復里) : 중남면의 신복(新復), 관동(冠洞), 평기동(坪基洞)   • 온정리(溫井里) : 중남면의 온정(溫井), 용정동(龍井洞)의 각 일부   • 석계리(石溪里) : 중남면의 석계(石溪), 세암(洗岩), 용정동(龍井洞), 하남면(下南面)의 마월동(磨月洞) 일부   • 구월리(龜月里) : 하남면(下南面)의 금구(金龜), 마월동(磨月洞)의 각 일부   • 용치리(聳峙里) : 하남면(下南面)의 개치(介峙), 용유동(龍踰洞)의 일부   • 송지리(松旨里) : 하남면(下南面)의 장송(長松), 신송(新松), 평송동(坪松洞)   • 덕곡리(德谷里) : 하남면(下南面)의 봉곡(鳳谷), 부곡(釜谷), 신덕동(新德洞)의 각 일부   • 금문리(琴聞里) : 하남면(下南面)의 신금(新琴), 금호(琴湖), 신청(新淸), 부곡동(釜谷洞)의 각 일부   • 주문리(朱文里) : 하남면(下南面)의 주물(朱勿), 신평(新坪), 남양면(南陽面)의 대선동(大禪洞) 각 일부      1917년 6월 9일 총독부령 제1호에 의하여 면제(面制)가 공포되고 같은해 10월 1일부터 시행되었다. 이에 따라 1918년 5월 10일 사천군의 수남면과 문선면을 합하여 삼천포면(三千浦面)으로 개칭하였다. 또 1925년에는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의하여 읍내면(邑內面)을 사천면(泗川面)으로 고쳤으며 4월에는 진주에 소재한 경상남도(慶尙南道)의 도청이 부산부(釜山府)로 옮겨갔으며 6월에는 진주(晉州)~마산(馬山)의 경전선(慶全線) 철오가 개통되었다. 종래 선진 및 중선포항을 통해 운송하던 화물량이 줄어들어 선진항도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1913년 4월 1일 총독부령 제12호(1930. 12. 1 공포)의 시행에 따라 종래(從來)의 지정면을 읍(邑)으로 승격시켰다.(이 때의 지정면은 전국 41개면임) 지정면(指定面)이란 1917년 면제(面制)에 의한 면 가운데 인구(人口)가 비교적 많은 면을 지정한 곳인데 이는 1920년 면제(面制)의 개정으로 보통면과는 그 처우(處遇)를 달리하려는데서 비롯된 것이다. 그 후 1931년 11월 1일 삼천포면(三千浦面)을 읍(邑)으로 승격시켰고, 이에 앞서 같은해 8월에는 읍동면(邑東面)을 정동면(正東面)으로, 읍서면(邑西面)을 사남면(泗南面)으로, 읍남면(邑南面)을 용현면(龍見面)으로 각각 개칭했다.   1930년 12월 1일에는 각 면에 법인격을 부여하고 자문기관이던 면협의회(面協義會)를 의결기관(議決機關)으로 하는 지방행정제도(地方行政制度)의 개혁이 있었다. 이러한 개혁은 지방행정의 자치제(自治制) 실시에 따른 것인데 면(面)의 부과금(賦課金) 5원 이상의 납부자이어야 선거권(選擧權)과 피선거권(被選擧權)이 부여되었다. 그리하여 1931년 5월에 임기(任期) 4년의 명예직(名譽職)인 제1회 협의회(協義會)의 선거(選擧)가 있었고 1932년에는 읍(邑)의 행정단위를 정(町)으로 고쳤으나 사천읍이 명 개 정(町)인지 그 기록은 찾을 수 없다.   1935년 5월에는 제2회 선거가 있었고 1939년 5월에넌 제3회 선거가 있었다. 그러나 그 후에는 1943년과 1944년에 2회에 걸쳐 각 1년씩 그 임기(任期)를 연장(延長)했을 뿐 더 이상 선거가 없었다. 1943년 1월 27일의 카이로선언, 7월 16일의 최초의 원자탄 폭발실험, 7월 26일의 포츠담선언이 있었으며 8월 6일 일본 광도(廣度)에다 B-29 비행기로 원폭(原爆)을 투하(投下)했다. 이러한 대공세(大攻勢)에 몰린 일본 군국주의(軍國主義)는 8월 8일 포츠담선언의 조건부 수락의사를 연합군에 통보하고 8월 15일 정오를 기해 무조건 항복(無條件 降服)함으로써 우리나라는 일제(日帝) 36년간의 치옥(治獄)에서 해방(解放)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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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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