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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5. 사천군시대(泗川郡時代)   고종 31년(1894)에 갑오개혁(甲午改革)이 실시되었다. 갑오개혁은 정치제도(政治制度)의 개혁과정에서 중앙관제(中央官制) 개혁 및 인사제도의 개혁이 일단락(一段落)을 보게되자 지방제도(地方制度)의 근본적인 개혁에 착수(着手)하게 되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의 행정기구는 이 갑오개혁을 거쳐 근대화(近代化) 되었다.   고종 32년(1895) 5월 26일 전문(全文) 6조로 된 칙령(勅令) 제98호에 의거 태종 13년(1413) 이래 482년간 시행해 오던 8도제(道制)를 폐지(廢止)하고 전국을 23부(府)로 구분ㅁ하여 그 아래로는 종전의 5부(府), 20목(牧), 75도호부(都護府), 77군(郡), 148현(縣)을 통틀어 군(郡)이라는 명칭(名稱)으로 통일하여 336군으로 한 획기적(劃期的)인 개편(改編)을 단행(斷行)하였다. 그리하여 부(府)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군(郡)에는 군수(郡守)를 두었는데 이 때 진주(晉州)에는 지금의 도격(道格)인 진주부(晉州府)가 설영되어 21군(郡)을 소관했고 사천군은 진주부의 속군(屬郡)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23부제(府制)의 지방조직(地方組織)은 다음해인 건양 원년(1896) 8월 4일자 칙령 제35호로 이를 개편(改編)하여 각 도에는 관찰사(觀察使)를 두고 지방조직으로는 1목(牧), 9부(府), 329군(郡)으로 하였다.   경상도는 지금까지 좌, 우도가 잠시 복설(復設)되다가 이 때부터 정식으로 남(南), 북도(北道)로 나누어지게 되었고 북도(北道)의 도청은 대구(大邱)로 지금까지의 감영자리였으며 41군(郡)을 관할하고, 경상남도의 도청소재지는 진주로하여 2부(府) 29군(郡)을 관활하였으며 우리 사천군은 4등군수(4等 郡守)가 배치(配置)되었다.   광무 원년(1897) 8월 14일에는 연호(年號)를 광무(光武)로 건원(建元)하고 10월 3일에는 왕은 황제(皇帝)로, 10월 11일에는 자주국방(自主國防)을 표방(標榜)하여 국호(國號)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광무 9년(1905) 11월에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 체결(締結)되고 동 10년(1906) 9월 24일에는 칙령 제49호에 의하여 진주군의 75면(面) 중 25면(面) 1포(浦)가 산청군(山淸郡), 하동군(河東郡), 고성군(固珹郡), 사천군(泗川郡), 함안군(咸安郡), 진해군(鎭海郡), 남해군(南海郡)에 이속하였는데 우리 사천군에는 삼천포(三千浦)가 편입(編入)되었으며 10월 21일에는 신 지방관제를 실시하여 전국을 13도(道), 11부(府), 33군(郡)으로 개편하고 일인(日人) 참여관을 두어 행정을 감독(監督)케 하였다.   1907년 8월에는 연호를 융희(隆熙 ; )로 고치고 통감부(統監府)의 경무부(警務部)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호구조사(戶口調査)가 있었고 9월에 사천군(泗川郡)은 고성군(固珹郡)의 남양면지역(南陽面地域)과 진주군(晉州郡)의 문선면(文善面)을 편입시켜 11면(面) 126동리(洞里 ; 인구 26,837명, 男13,693, 女13,144)를 관할하게 되었다.   사천군(泗川郡)의 11면을 보면   군내면(郡內面;5), 상주내면(上州內面;14), 동면(東面;16), 근남면(近南面;14), 수남면(洙南面;20), 하남면(下南面;15), 중남면(中南面;14), 상서면(上西面;9), 하서면(下西面;9), 북면(北面;8), 문선면(文善面;2) 등이고 우리 용현면의 전신(前身)인 중남면(中南面)과 하남면(下南面)의 각 동리(洞里)는 다음과 같다.      ◎ 중남면(中南面 ; 14個洞里, 面所 所在地 : 新村洞 개머리)   석계(石溪), 세암(洗岩), 관동(冠洞), 신복(申伏), 평기(坪基), 용정(龍井), 온정(溫井), 신촌(新村), 종포(宗浦), 화촌(花村), 조금(助禁), 통양(通洋), 화계(花溪), 연포동(蓮浦洞)      ◎ 하남면(下南面;15個洞里, 面所 所在地) : 釜谷)   신덕(神德), 신평(新坪), 주물(走勿), 신청(新淸), 신금(新琴), 금호(琴湖), 부곡(釜谷), 봉곡(鳳谷), 개치(介峙), 용유(龍踰), 금구(金龜), 마월(磨月), 평송(坪松), 신송(新松), 장송동(長松洞)      1909년 12월에, 진주(晉州)에서 사천(泗川)을 통과하여 삼천포(三千浦)에 이르는 국도(國道) 3호선이 개통되었는데 이 진삼선의 개통은 경상남도내에서 최초의 도로 개통으로 알려져 있고 선진항이 개항되어 서부경남의 내륙을 통하는 관문(關門)의 역할을 하였다. 이 무렵 조선조의 기운은 차츰 기울어지고 있었는데 을사조약(乙巳條約;1905)에 이어 서울에 통감부(統監府)를 설치(1906)했던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는 그 뒤에 또 한일의정서(韓日議定書)를 체결하더니 조선조는 결국 1910년 8월 22일 이르러 한일합방(韓日合邦)이란 국치(國恥)로 인하여 27대 역년(歷年) 519년으로 종말을 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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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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