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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4. 조선시대(朝鮮時代)   조선조에 이르러 태조(太祖) 1년(2392)에 진주(晉州)를 진양(晉陽)이라 하고 현비(賢妃 ; 康妃)의 내향(內鄕)이라 하여 진양대도호부(晉陽大都護府)를 삼고 진양대도호부사(晉陽大都護府使)를 두었다.   태종대(太宗代)에 들어와서 지방제도를 획기적(劃期的)으로 개혁(改革)하였는데 원년(元年 ; 1401)에 각 도(道)의 장관(長官)인 안렴도관찰출척사(按廉都觀察黜陟使)를 안렴사(按㾾使)로 개칭하였으며 동 2년(1402)에 다시 진주라 하고 진양대호부를 진주목(晉州牧)으로 내려 고쳤다.   그리고 동 13년(1413)에 종래의 6도(道) 2면(面)을 8도(道)로 정비하였는데 이때의 경상도 감영은 옛대로 상주(尙州)에 있었으며 각 도(道), 군(郡), 현(縣)의 명칭이 개편됨에 따라 종전의 사주(泗州)를 사천(泗川)이라 개칭하였으며 당시 지방관의 명칭이 안렴사(按㾾使),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士), 혹은 관찰사(觀察使)이던 것을 관찰사(觀察使)로 고쳤다.   전국의 지방행정조직은 1유도부(留道府), 6부(府), 5대도호부(大都護府), 20목(牧), 74도호부(都護府), 73군(郡), 154현(縣) 등 333개 행정구역으로 구분하고 그 수령(守令)으로는 부윤(府尹 ; 從2品), 대도호부사(大都護府使 ; 정3품), 목사(牧使 ; 정3품), 도호부사(都護府使 ; 종3품), 군수(郡守 ; 종4품), 현령(縣令 ; 종5품), 현감(縣監 ; 종6품)으로 보임(補任)하였다.   동왕 15년(1415) 10월에는 군익도(軍翼道)의 중익진(中翼鎭)을 설치하여 병마사(兵馬使)로 하여금 수령(守令)을 겸직(兼職)케 하였다.   1454년 간행(刊行)된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한 진주목(晉州牧)은 1목(牧), 2도호부(都護府), 2군(郡), 12현(縣)으로 되어 있으며 12속현(屬縣) 중에 사천현(泗川縣)이 포함(包含)되어 있었다.   세조 12년(1466)에는 종래(從來)의 병제(兵制)를 오위도호부(五衛都護部)로 개편(改編)하여 그 산하(傘下)인 용양위(龍驤衛 ; 左衛)의 지방조직으로 진주(晉州)에 경상우부 진주진관 (慶尙右部 晉州鎭管)을 두고 진주병마첨절제사(晉州兵馬僉節制使)는 5군(郡) 8현(縣)을 소관했으며 군(郡)에는 병마동첨절제사(兵馬同僉節制使), 우리 사천을 포함한 현(縣)에는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가 있었다. 진주진관이 설치됨으로써 동 14년(1468) 사천진(泗川鎭)이 설치 11년만에 혁파되고 다시 현감(縣監)으로 고쳐졌으며 진주진관의 13개 제진(諸鎭)의 하나로 속하게 되었다.   1486년에 간행된 <동국여지승람(東國與地勝覽)>에 의하면 진주진은 1목(牧), 4군(郡), 9현(縣)을 관할하였고 (居昌郡이 縣으로됨) 사천현(泗川縣)은 진주진(晉州鎭)에 속해 있다.   중종 14년(1519)에 경상도가 낙동강(洛東江)을 경계(境界)로 동쪽은 좌도(左道), 서쪽은 우도(右道)로 분도(分度)하였으나 이 해에 도로 합하여 하나로 하였다.   선조(先朝) 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도로(道路) 등이 막혀 좌, 우도로 다시 나누었다. 이 때 좌영(左營)은 경주(慶州)에, 우영(右營)은 상주(尙州)에 설치하였다. 동 26년인 계사년(癸巳年)에는 다시 한 도(道)로 합하고 감영(監營)은 성주(星州)에 설치하였으며 동 28년 을미(乙未年)이 되자 다시 분도(分度) 문제가 거론(擧論)되어 좌, 우도로 나누지만 그것도 1년만인 동 29년 병신년(丙申年)에 도로 합치게 되고 감영(監營)은 달성에 개설(開設)하게 되었으나 선조 30년 정유년(丁酉年)의 병화(兵火)로 인해 파(罷)하고 말았다.   선조 32년(1599) 기해년이 되자 안동부(安東府)에 감영이 잠시 머물기도 했다. 그러나 선조 34년(1601) 신축년이 되자 감영은 대구(大邱)로 옮겨졌고 관찰사는 대구부사를 겸하게 되었다. 이 때 관할은 영부(領府)1, 대도호부(大都護府)2, 목(牧)3, 도호부(都護府)14, 군(郡)13, 현령(縣令)5, 현감(縣監)33이었다.   이 후 숙종(肅宗) 2년(1676)에 또 갈라진 바 있으나 숙종 10년(1684)에 다시 합하여졌고, 영조(英朝) 27년(1751)에도 갈라졌다가 7년 만인 영조34년(1758)에 다시 합쳐진 기록도 나타내고 있다.   조선후기 당시의 사천현(泗川縣) 면(面), 리제(里制)의 조직과 행정체계는 구체적(具體的)인 자료(資料)의 부족으로 잘 알 수 없으나 순조 32년(1832)에 발간된 읍지(邑誌)에 나타난 면(面), 리제(里制)를 보면 다음과 같다.

縣名 面名 面數 備考
泗 川 上州內面, 東面, 近南面, 三川里面
下南面, 中南面, 上西面, 下西面,
北面
戶口
元戶 3,133戶
人口 14,620名
(男女 합계)
  ※ 비고(備考)의 호구(戶口)는 1832년에 발간된 사천현읍지의 통계인데 사천현여지승람 기묘수정책(己卯修正冊 ; 1699)에 호수는 3,125호, 남 6,007명, 여 7,097명, 계 13,104명으로 1699년부터 1832년까지 133년동안 호수는 188호, 인구는 불과 1,516명 밖에 증가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세종 7년(1425)에 발간된 경상도지리지에는 호수가 370, 인구가 3,386명(남자 1,817, 여자 1,569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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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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