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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1. 고려시대(高麗時代)   고려(高麗) 태조 23년(940) 3월에는 전국 주(州), 군(郡), 현(縣) 지명 중 그 일부를 개명(改名)하였는데 이 때 강주(康州)를 진주(晋州)로 개칭(改稱)하였다.   성종 2년(983) 2월에는 앞서 신라의 신문왕이 9주(州)를 설치한 이래 298년동안 습용(襲用)해 오던 주제(州制)를 목(牧)으로 개혁(改革)했다. 그리하여 이 지역은 전국 12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晉州牧) 관할로 되었다. 성종 14년(995) 5월에는 12개의 목(牧)을 12주의 절도사(節度使)로 고쳐 주군(主君)을 두었다. 그리하여 진주목(晉州牧)은 진주정해군절도사(晉州定海軍節度使)라고 불렀다. 그리고 9월에는 처음으로 전국에 10도(道)를 두었는데 이 때 진주(晉州)에는 산남도(山南道:현 慶南 中西部 地域)가 설영(設營)되어 10주 37현을 소관했고 그리하여 사수현(泗水懸)은 신라 이래로 고성군의 영현에서 비로소 진주진(晉州鎭)에 이속(移屬)하게 되었다.   현종 3년(1012)에는 절도사를 폐하고 안무사(按撫使)를 두었으며 사수현은 동 6년(1015) 윤6월에 사주(泗州)로 개칭되었는데 현종이 등극(登極)하기 전 어릴적에 우리고장 와룡산에 유배(流配)되어 있던 아버지 욱(郁)을 찾아와서 수년간 지냈기 때문에 그 때의 기억에 대한 보상(報償)의 의미가 다분히 있었던 것이다. 동 9년(1018) 2월에는 앞서 두었던 도제(道制)를 폐지하고 전국을 4도호(道護), 8목(牧), 56지주군사(知州郡事), 28진장(鎭將), 20현령(縣令)으로 나누었고, 진주는 전국 8목(牧) 중의 하나인 진주목이 되고 진주목은 1영군(領郡) 3속현, 2속군(屬郡) 7속현으로 호(號)를 진양(晋陽)이라 불렀으며 이곳 사주(泗州)는 진주목 속현(屬縣)이었다.   예종 1년(1106)에 진주목은 앞서 성종 14년(995)에 두었던 적이 있는 영남도(嶺南道 : 尙州 所管), 영동도(嶺東道 : 慶州 所管), 산남도(山南道 : 晉州 所管)등의 3도(道)를 통합하여 경상진주도(慶尙晉州道 : 監營은 慶州)라 하고 예종 8년(1113년)에는 다시 도부서(都府署)를 안무사(按撫使)로 바꾸었다.   명종 원년(元年 : 1172)에는 경상진주도를 경상주도(慶尙州道 : 감영은 상주)와 진협주도(晉陜州道 ; 감영은 진주)로 나누었으며 이듬해인 왕 2년(1172) 6월 전국 56현에 지방관(地方官)인 감무(監務)를 설치하였는데 이 때부터 우리 고을 사주(泗州)에 비로소 감무(監務)가 설치되었다. 이로써 사주(泗州)는 주(州)로 승격(昇格)된지 156년동안 재지(在地) 세력인 향리(鄕吏)에 의해 다스려져 오다가 이 때 비로소 지방관이 배치(配置)됨으로써 진주목(晉州牧) 속현에서 벗어났으며(진주목은 1군(郡) 6현(縣)으로 축소됨) 읍호(邑號)도 그대로 사주(泗州)라 하였다.   그 후 동 16년(1186)에는 앞서 양분(兩分)되었던 경상주도(慶尙州道)와 진협주도(晉陜州道)가 통합된 경상주도(慶尙州道 ; 감영은 尙州)에 속해졌고, 신종 7년(1204)에는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시키는 동시에 경상주도를 고치어 상진안동도(尙晉安東道)로 또 다시 개칭하여 안렴사(按㾾使)를 두었다.   이와 같이 도(道)의 명칭이 여러번 바뀌어 오다가 충숙왕(忠肅王) 원년(元年 ; 1314)에 비로소 경상도(慶尙道 ; 감영은 상주)로 고정(固定)되었고 안렴사를 순무사(巡撫使)로 고쳤다. 이 때 경상도의 속영은 1경(京), 2목(牧), 30군(郡), 92현(縣)이였으며 진주목 관할에는 4군 26현이 있었는데 우리 사천은 직속(直屬) 군현 2군 7현중의 1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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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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