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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현향토사

시대 명칭 내용
조선시대
(朝鮮時代)
사천현
(泗川縣)
태종 13년(1413) 10월에는 각도의 단부 고을을 도호부로 고치고 고려때 감무를 현감(종 6품)으로 고쳤다. 따라서 군.현의 이름 가운데 주(州)자를 띤 곳은 전부 산(山)자, 혹은 천(川)자로 고쳤다. 이때 사천은 내천(川)자를 취하여 사천이라 하고 별칭을 동성이라 했다.
사천진
(泗川鎭)
태종 15년(1415) 9월 21일에는 고려말부터 시작된 왜구의 침범을 막기 위하여 사천지역을 군사 전략기지로 설정하고 병마사가 판현사를 겸하는 사천진을 설치하였다. 세종 5년(1423)에는 병마첨절제사로 낮추고 얼마후 다시 현감으로 환원되었다. 동왕 27년(1445)에는 사천읍성의 축성으로 읍기를 지금의 정동면 고읍에서 사천읍성으로 옮겼다. 이로써 가야시대 이래 줄곧 있어온 고읍의 행정치소는 막을 내리고 새로운 사천읍성 시대를 맞게 되었다. 세조 12년(1466)에 이르러 종전의 병제를 오위도총부로 개편하였는데 그 산하인 용양위(좌우)의 지방조직으로 진주에 경상우부진관이 설치됨으로써 사천진은 동왕 14년(1468)에 혁파되고 다시 현감으로 고쳐졌다. 진관체제는 세조 3년(1458)에 군익도체제로 전국적으로 개편한 것인데 이때 사천의 중익진은 그 중요성에 비추어 그로부터 11년 뒤에 혁파되고 진주진관 소속의 제진이 되었다. 당시 사천지역은 왜구의 빈번한 침범으로 무관으로 하여금 현감을 겸하게 하였다. 태조 5년(1396) 8월에 우리면 통양포에 왜구가 쳐들어와서 병선을 약탈해 간 산건이 있었다. 한편 조선조 전기 때의 사천현 방리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개 방위에 따라 4개면으로 구분되어 있지 않았나 추측한다.
사천현
(泗川縣)
(중남면)
(中南面)
(하남면)
(下南面)
임진왜란 후 17세기에 이르러 전국적인 범위에서 면.리제의 발전을 보게 되었다. 숙종 1년(1675) 9월 오가통의 사목에 의하면 사천현은 상주내면, 동면, 근남면, 삼천리면, 하남면, 중남면, 상서면, 하서면, 북면의 9방면이였는데 우리면의 전신은 중남면과 하남면이였다. 하남면은 지금의 송지리 이남지역이였고, 중남면은 석계리 이북지역으로 추측된다.
사천군
(泗川郡)
(중남면)
(中南面)
(하남면)
(下南面)
고종 32년(1895) 5월 26일 전문 6조로 된 칙령 제98호에 의거 태종 13년(1413)이래 482년간 시행해오던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제로 시행하면서 종전의 5부, 20목, 75도호부, 77군, 148현을 군이란 이름으로 통일하여 336군으로 개편했다. 이에따라 사천현은 사천군으로 개칭되어 군수를 두었다. 이때 진주는 지금의 도격인 진주부가 설영되어 21군을 소관했고 21군 중에 사천군이 속해 있었다. 건양 1년(1896) 8월 4일에는 칙령 제35호로 23부제를 폐지하고 동일자 칙령 제36호로 전국을 다시 13도로 구분하여 도에 고나찰사를 두고 아래오는 1목, 9부, 329군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진주는 경상남도의 1부 29군을 소관하고 사천군은 9방면을 소관했는데 당시의 방면은 상주내면, 동면, 근남면, 중남면, 하남면, 상서면, 하서면, 삼천리면, 북면이였다. 이듬해인 고종 34년(1897) 8월 14일에는 연호를 광무를 건원하고 10월 3일에는 왕은 황제로, 10월 11일에는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했으며 행정의 말단 조직인 방면이 면으로 개칭되었다. 광무 10년(1906) 9월 24일에는 칙령 49호로 지방행정구역의 대폭적인 개편이 있었는데 진주군의 75면 중 문선면, 남양면을 고성군에, 삼천포면을 사천군에 이속했고 1907년 8월에는 연호를 융희(순종)로 고치고 통감부 경무부에 의하여 전국적으로 호구조사를 하고 9월에는 고성군의 남양, 문선면을 편입시켜 군내면(5), 상주내면(14), 동면(16), 근남면(14), 수남면(20), 하남면(15), 중남면(14), 상서면(9), 하서면(9), 북면(8), 문선면(2) 등 11면 126동리를 관할하게 되었고, 중남면은 석계, 세암, 관동, 신복, 평기, 온정, 용정, 신촌, 종포, 화촌, 조금, 통양, 화계, 연포 등 14개동리이며 면소는 신촌동 개머리에 잇었고 하남면은 신덕, 신평, 주물, 신청, 신금, 금호, 부곡, 봉곡, 개치, 용유, 금구, 마월, 평송, 신송, 장송 등 15개동리로 면소는 부곡에 있은 듯 하다. 1909년 12월에는 진주에서 사천을 통과하여 삼천포에 이르는 국도 3호선이 개통하였다. 진주~삼천포간의 도로 개통은 경상남도내에서는 최초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선진항이 개항되어 서부경남의 내륙을 통하는 관문의 역할을 하였다. 이무렵 조선조의 기운은 차츰 기울어지고 있었고 을사조약(1905)에 이어 서울에 통감부를 설치(1906)했던 일본 제국주의는 한일의정서를 강제 체결하므로 조선조는 결국 1910년 8월 22일에 한일합방이란 국치를 당하여 27대 역년 519년으로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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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2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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