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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10. 소곡리(所谷里)

  정동면(正東面)의 동남쪽 맨 끝자락의 산간 지역, 사천읍으로부터 국도따라 약 12km쯤 떨어진 곳.   창공(蒼空)을 향하여 우람하게 솟은 두 개의 산(興霧山과 鳳臺山)이 하나는 남서쪽에 하나는 동북쪽에 자리잡아 서로 산 파도를 이루며 서북으로 뻗어 나갔다. 그 어떤 힘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태고(太古)적 신비(神秘)를 간직한 채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여러 갈래로 중첩돼 이어지고 서쪽으로 북으로 그리고 남으로 가지가 난 산줄기들 사이의 협곡(峽谷)에는 넓고 좁은 들판과 크고 작은 냇고랑을 빚어 놓았다.   소곡리는 이들 산줄기 중 안개(霧)가 자주 인다는 이름의 흥무산을 중심으로 서북으로 뻗어 나간 주능선(主稜線)의 동북향(東北向) 비탈과 봉대산의 줄기로 마치 시루형국을 한 시루봉(甑峯)의 남서향 밑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들로 이루어진 이른바 10개리중 마지막 법정이동(法定里洞)이다.   사방이 병풍처럼 둘러 있는 산을 배경으로 아늑한 골짜기에 입지(立地)한 소곡리는, 역시 고성에서 발원한 큰냇고랑(사천강)이 흐르고 또 33호선의 국도가 지난다. 동으로는 울창한 송림에 감싸인 시루봉의 산능선과 흥무산의 동쪽 비탈 계곡을 경계로 고성군 상리면(上里面)과 접하고, 남으로는 역시 흥무산의 주능선을 경계로 사남면 사촌리(沙村里)와 종천리(宗川里)가 이웃하며, 서쪽으로는 산등성이 너머 학촌리, 북으로는 감곡리와 마주하고 있다.   소곡리도 면내 여타 이동(里洞)과 마찬가지로 본래 사천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옛날부터 쇠(금)를 많이 캐냈으므로 쇠실(金谷) 또는 쎄실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소곡동(所谷洞), 가곡동(柯谷洞), 객방동(客坊洞) 그리고 고성군 상리면의 가슬리(歌瑟里) 일부를 병합하여 소곡리(所谷里)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소곡리란 이명(里名)은 앞서 말한 철의 산출로서 야소(冶所)가 있었을 뿐 아니라 질그릇, 오지그릇, 사기그릇 등을 굽어낸 자기소(磁器所)가 있었던 까닭에 所자와 골의 谷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소곡리를 구성하는 행정이동(行政里洞)은 소위 큰 냇고랑과 국도를 중심으로 동북쪽 석보(石洑)들 가장자리에 자리잡은 객방부락, 신월교(新月橋)를 건너 남서쪽의 안개들을 감싸안은 소곡부락, 그리고 소곡 너머 남쪽으로 깊숙하게 난 산길(山道)따라 사남면 종천리로 넘어가는 산자락을 깔고 앉은 가곡의 3개 부락이 저마다의 아늑한 곳에 취락을 이루고 있다. 이중의 소곡부락이 중심 마을이다.   소곡리 역시 면내 수청리, 장산리와 함께 선사(先史)시대의 유적(遺跡)이 많이 발견되는 고장이다. 그것은 남방식(南方式)의 고인돌(支石墓)과 1969년 8월 단국대학교(檀國大學校) 박물관에서 발굴 조사한 바 있는 12기의 돌널식(石箱式) 무덤방이 그것이다. 이들 유적은 일찍이 선사인(先史人)들이 이 곳에 들어와 살았다는 흔적(痕迹)으로서, 학계(學界)에 따르면 모두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묘제(墓制)라는 것이다. 이로서 볼 때 소곡리 땅은 수청리, 장산리와 함께 정동면에서 가장 먼저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1) 소곡(所谷) 부락   정동면(正東面)의 주봉(主峰)인 흥무산에서 뻗어 내린 산자락 끝을 살짝 깔고 앉은 집들은 아늑한 산골 마을답게 퍽 인상적이다.   안개가 끼는 날이면 짙은 안개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산자락을 휘감는다. 몸집 작은 산새들이 경쾌(輕快)한 울음 소리가 안개 속 어디에선가 방울을 굴리듯 들려 온다. 산으로 둘러싸인 안개들을 바라보며 주위가 아늑하고 평화로우며 그윽한 산골의 정취(情趣)를 느끼게 한다.   쇠를 캐내고 사기그릇을 굽어 내던 옛날에는 무척 붐비고 북적거렸을 것이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쇠실(金谷)이라 하지 않았던가. 지금도 마을 뒷산에는 어떤 업체가 채광(採鑛)하고 있으며, 주민들은 미맥(米麥)을 중심으로 연초 재배, 단감 과원을 조성하여 농가 소득을 올리고 있다.      • 부락의 지명 유래   어느 고을 어느 마을을 막론하고 인간이 살고 있는 곳에는 그곳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땅이름과 유래가 있슴을 알게 된다. 지명을 올바로 찾는다는 것은 어쩌면 향토의 전통을 찾는데 뺄 수 없는 중요성을 가지고 있다 하겠다.   소곡리의 <所谷>이란 지명도 면내의 침곡(針谷), 운곡(雲谷), 대곡(大谷), 감곡(甘谷), 고자곡(古自谷) 등과 마찬가지로 골(골짜기)을 나타내는 한자 ‘谷’자가 붙어서 된 이름이다. 그런데 소곡 이전에는 쇠(금)를 캐낸 까닭에 ‘쇠실’, ‘쎄실’ 또는 ‘금곡(金谷)’이라 일컬었으니 지금도 흔히 그렇게 불러온다.   ‘골’은 한자의 谷과 洞으로 대개 맞옮겨져 왔다는 것인데, 谷의 의미를 갖는 것은 본래의 <고을>의 준말이라 한다. 이를테면 <~洞>, <~올>, <~실>, <~일>이 모두 谷에 대응한다는 것이며, 이중에 <~올>은 <골>의 ㄱ이 약화하여 탈락한 형태이고, <일>은 <실>의 ㅅ이 약화 탈락한 형태임을 알 수 있다.   ‘골’이 면내 뿐 아니라 전국에서 많은 분포를 보이는데 반해 ‘실’은 주로 내륙 산간 지역에 분포되어 있다는 데서 붙여진 지명이다. 그러므로 ‘골’과 ‘실’은 같은 의미를 갖는다 하겠으며, 침곡(針谷)을 바느실로, 운곡(雲谷)을 구름(굼)실, 대곡(大谷)을 한실, 감곡(甘谷)을 감실이라 부르는 것과 같다.   그런데 쇠가 나는 까닭에 쇠실 또는 금곡(金谷)이라던 것이 어떤 연유로 해서 오늘날의 所谷으로 불리우게 되었던 것일까? 지명에는 오랜 세월을 거치는 동안 강한 보수성(保守性)과 구어성(口語性)의 특성을 지니는 법인데, 여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지 않나 추정된다.   먼저 한자로 표현한 所자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 중에 하나가 곳소(處也)임을 알 수 있다. 장소를 나타내는 ‘곳소’는 생산적인 측면에서 무엇을 캐내는 곳, 또는 어떤 물건을 만들어 내는 곳이라 풀이 된다.   이런 과정에서 소곡 부락은 옛날부터 쇠만 파낸 곳이 아니라 사기그룻을 굽어 낸 도요(陶窯.도기를 굽는 가마)가 있었슴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부락 언저리에 약 300평 남짓 되는 곳(390번지)에 일부는 밭으로 되어 있고, 그 주위에는 분청사기(粉靑沙器)의 조각들이 무수히 흩어져 있음을 보게 된다. 이로써 알 수 있듯이 소곡에는 대개 15, 6세기경 사기그릇을 굽던 자기소(磁器所)가 설치돼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옛날에는 <所>라고 칭하는 특수 지역이 있어서 생산하는 종류에 따라 각각 金所, 銅所, 紙所, 瓦所, 炭所, 鹽所, 瓷器所, 魚染所 등으로 구별되어 각기 그 물건을 만들게 하였다. 이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위와 같은 종류의 물건을 만들기 위하여 두었던 특수 기관으로서 전국에 널리 분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상으로 살폈듯이 소곡 부락에는 조선 초기부터 얼마동안 쇠를 캐낸 철장(鐵場 : 철의 산출지에 설치한 제련장)이 있었던 까락에 처음에는 쇠실 또는 金谷이라 하였다가 그 후 사기그룻를 굽어 낸 자기소가 설치되므로 해서 所자가 谷자를 따서 붙인 오늘날의 所谷이 된 것이다.      • 부락의 연원淵源   동리 연원을 고찰해 보건대, 이곳에 사람이 들어와 살았다는 것은 앞서 말한 선사유적의 존재를 차치(且置)하더라도 쇠를 캐내고 또 사기그릇을 굽은데서 일찍이 마을이 열린 것은 분명한데, 어떤 성씨들이 먼저 들어와 살았는지에 대해 알 길이 막막하기만 하다.   그러나 여러 가지를 근거로 하여 추정(推定)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590년전 아니면 그 보다 훨씬 전에 박씨(朴氏, 密陽) 성(姓)을 가진 사람들이 맨 먼저 들어와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았슴이 분명하나 대(代)를 이어 살지 못하고 중도에 다른 곳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그 근거로 마을 주위에는 박씨네의 선조묘(先祖墓)가 수없이 흩어져 있으며 해마다 그 후손들이 성묘(省墓)하러 온다는 것이다.   그 후 삭녕최씨(朔寧崔氏), 안동권씨(安東權氏)가 입향(入鄕) 정착하여 부락을 형성해 나갔는데, 양 성씨 중 어느 성씨가 먼저 입향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같은 시기의 입향조(入鄕祖)일 가능성이 크다. 현대 행정구역상 신월(新月) 마을을 포함한 소곡부락에는 김(金)씨 4파를 비롯하여 구(具)씨, 강(姜)씨, 백(白)씨, 문(文)씨, 박(朴)씨, 류(柳)씨, 이(李)씨, 장(張)씨, 전(全)씨, 최(崔)씨, 한(韓)씨, 황(黃)씨 등 56호가 서로 의좋게 오순도순 살고 있으며, 여러 성씨 중 최씨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다.

  • 신월(新月)마을   소곡 부락에 딸린 자연 부락.   이 마을 앞에서 큰 냇고장(사천강)이 흐르고 마을로 들어 가려면 반드시 다리를 건너야 한다. 예전에 이 다리가 처음 가설되었을 때는 새다리라 했는데 어느새 새다리가 새달(新月)로 전음(轉音)되어 지명 또한 신월이라 불려온다.   다리(橋)가 놓인 곳에는 한자로 달(月)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은데 예로서 상월리(上月里), 하월리(下月里), 내월리(內月里), 상월곡동(上月谷洞), 하월곡동(下月谷洞) 따위의 이명(里名)이 그것이다. 이는 각각 ‘웃다리골’, ‘아랫다리실’, ‘안다리실’로 불리며 谷자가 붙은 두 이름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두 다리를 달로 표기한 사례들이다.   신월마을에는 얼마 전까지 신월국민학교(新月國民學校)와 부설 유치원이 있던 곳이다. 1947년 4월에 개교하여 46년동안 운영해 오다가 세월의 변천 탓에 취학 아동 수가 차츰 줄어들어 1992년에는 정동국민학교의 분교(分校)로 전락하더니 1994년에는 정동국민학교와 통합하여 마침내 문을 닫고 말았다.   학구는 객방(客坊), 가곡(柯谷), 소곡(所谷), 학촌(鶴村), 만마(萬馬)의 5개 마을이 있으며 설립당시 부지(敷地) 1,000여 평은 소곡 최성환(崔性煥)씨가 가곡 박화진(朴花桭)씨는 현관(교실의 반칸상당)을 기증한 것이다.      • 쇠바위굼터와 사천의 철장(鐵場)   소곡 부락을 올라가면 서남간에 ‘큰골’이 나타나는데 그 골짜기 산 중턱에 이르면 옛날부터 쇠(금)를 팔던 광산(鑛山)이 있다. 지금도 성보광산(대표 윤준규)이란 업체가 1,202m2에 달하는 광산을 허가내어 현재 금, 은, 동 등을 채굴(採掘)하고 있는데, 정확히는 소곡리산 105-1번지로서 흥무산의 산줄기이다.   이 산등(山嶝)에는 소위 ‘쇠바움굼터’라는 이름의 폐광지(廢鑛址)가 여러 곳 널려 있으며 그 중의 한 폐광에 내려가 보면 여러 갈래의 갱도(坑道)가 이러저리 나 있슴을 보게 된다. 어느 시대부터 쇠를 캐내었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 곳에서 철이 산출됨으로 해서 쇠실(쎄실) 또는 금곡이라 일컫는 지명이 생겨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이곳 폐광 터는 채굴수법(採掘手法)으로 보아 5~6세기경 가야시대(伽倻時代)부터 채광(採鑛)했을 것이라는 설(說)이 있으나 이를 입증(立證)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도 아니다. 아무튼 고대(古代)부터 이곳에서 쇠를 파냈다는 사실은 향토의 전통을 엮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면 이곳의 광산은 언제부터 쇠를 산출했던가에 대하여 다음의 문헌을 통해 살피고져 한다.   먼저 <경국대전 : 經國大典> 공전(工典)을 보면, 조선 태종 7년(1407) 각 주현(州縣)에 비로소 철장(鐵場)을 설치하고 백서을 모집하여 사철(砂鐵), 석철(石鐵) 등을 제련하여 정철(正鐵)을 만들어 국용(國用)에 쓰게 하였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이 내용에서 각 고을마다 ‘철장’을 설치했다는 대목이 눈길을 끄는데, 그 당시 사천에도 과연 철장이 설치되었을까 하는 점이다. 그러나 다음의 문헌을 보면 어느 정도 실상이 드러난다.   <세종실록 : 世宗實錄> 세종 21년(1439) 9월조를 보면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가 보고하기를,      “사천(泗川), 청하(淸河), 경주(慶州)에서는 연철(鉛鐵)이 생산되고 창원(昌原), 의성(義城), 청송(靑松)에서 산출되는 것은 동철(銅鐵)입니다.” 하고 있다.      이로써 보면 사천에도 철이 생산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사천에서 철이 나는 곳은 예나 지금이나 소곡리(쇠실과 객방) 밖에 없다. 그러므로 앞서의 철장(鐵場)은 소곡리에 있었을 뿐 아니라 쇠바위굼터의 폐광터와 객방부락 산기슭에 있는 폐광지는 모두 조선 초기부터 채광(採鑛)하던 곳임을 말해 준다.   철장이란 철의 생산지에 설치한 제련장이다. 사철, 석철 등 제련하여 정철(正鐵)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미 살핀바 있거니와 그러면 정철을 만들어 이디에 썼던 것일까? 물론 국용(國用)에 썼다는 것은 분명한 일이지만 그 점이 궁금한 대목이다.   <경상도속찬지리지 : 慶尙道續撰地理志> (1469년)를 보면, 사천의 세공(歲貢 : 해마다 나라에 바치는 공물) 정철은 360근(斤)이라 하고, 이웃 고을인 곤양군은 407근이라 하였다. 수량면에서는 곤양보다 사천이 약간 적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러나 이들 정철로 사천에서 군기(軍器)를 만들었다는 것은 다음의 문헌에서 알 수 있다.   <단종실록(端宗實錄)> (1453년)에 의하면,      “사천의 본현(本縣)과 고성, 곤양, 거제 등 넷 고을의 군기를 만드는 도회소(都會所)를 사천에 두고 감련관(監鍊官 : 군수물자를 만드는 일을 감독하는 관원)으로 하여금 이를 감독케 하였다.”      라는 점이다. 군기를 만드는 도회소가 사천의 어느 지점에 있었는가는 명화하지 않지만 아마도 읍지(邑誌)에 보이는 관해곡소(觀海谷所)가 아닌가 추측된다. 이곳은 현에서 북으로 10리 거리라 하였으니 지금의 사천읍 구암3리가 해당된다.   그 당시 사천에서 어떤 종류의 병기(兵器)를 만들었는가 하는 것은 역시 다음의 자료에서 알 수 있다. 그것은 1986년 4월경 하동군 고전면(古田面) 고하리(古河里)의 밭에서 청동제(靑銅製) 사전총통(四箭銃筒)과 팔전총통(八箭銃筒) 등 총 107정의 무기가 ?아져 나온데서 볼 수 있다. 현재 국립진주박물관(國立晋州博物館)에 전시하고 있는 이들 무기에는 사천서 주조(鑄造)했다는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이 새겨져 있다. 즉 <戊辰三月石○老, 泗川> <監鑄楊國華則金○○, 泗川>이 그것이다.      위 명문의 내용은 무진(戊辰) 3월 석(石)씨 성을 가진 장인바지(工匠) 아무개(○老)가 사천서 만들었다 하고, 감련관 양국화(楊國華)의 감주(監鑄)라 되어 있다. 그런데 총통을 만든 무진년은 세종 30년(1448), 중종 3년(1508), 선조 1년(1568) 중 어느 해인가 하는 점이다. 여러가지 시대적 상황으로 보아 여기서는 세종 30년이라 추정된다. 그 까닭은 <세종실룩> 세종 30년조에 조정에서 <총통등록(銃筒謄錄)>을 만들어 각 도(道)에 나누어 주면서 각종 총통을 만들게 했다는 내용의 기록이 보이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살폈듯이 소곡리는 조선 초기부터 철(또는 금)이 산출됨으로 해서 정철(正鐵)을 만드는 제련장 즉 철장(鐵場)이 설치되었던 것이며, 나아가 무기를 만드는 도회소(都會所)까지 발전하여 당시 향토산업에 크게 기여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그리고 하동 땅에서 사천제(泗川製)의 무기 발견은 군사적으로 외적(外敵)을 막기 위해 국방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 크다. (제7편 문화재 및 유적 참조)      • 신월(新月)의 고분유적(古墳遺跡)   이 마을이 들어 앉은 동쪽으로는 이른바 큰 냇고랑(사천강의 상류)이 있으며, 이것은 서북으로 흐르며 사천바다로 들어간다. 서남쪽 지역은 모두 산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가운데 가장 높은 산이 흥무산이고 남쪽으로는 소곡리와 신촌리(고성군 상리면) 사이로 작은 내가 있으며 이곳으로부터의 물줄기가 신월마을 앞에서 큰 냇고랑으로 흘러든다.   이 마을에서의 유적 조사 작업은 홍수로 인하여 유구(遺構)의 일부가 드러난 냇가 가까운 지점에서 발견되었는데, 1969년 8월 단국대학교 박물관의 조사팀이 12일간에 걸쳐 무덤유적 12기(基)를 조사한데서 비롯되었다. 홍수를 입어 외부로 나타난 강쪽의 퇴적(堆積) 자른면에서 돌널식(石箱式)의 무더방과 그 위쪽 부분에 깔려진 판판한 돌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12기중 7기는 이미 파괴도어 하부구조(下部構造)만 남아 있었는데 나머지 5기는 완전한 상태여서 원형(原形)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구조는 남방식(南方式) 고인돌(支石墓)의 바탕인데 장방형의 석실(石室) 위에 넓은 돌널(板石) 1매 혹은 2~3매를 얹은 다음 그 위에 3층단의 판석층을 쌓고 그 위에 또하나의 넓은 돌널을 얹고 있었다.   대개 무덤방(石室)의 길이가 170cm, 너비가 90cm, 깊이는 40~70cm로 이 무덤방을 중심으로 지름4~6m의 원을 그리면서 병풍처럼 높이 50cm 정도로 돌널을 연결시켜 놓았던 것이다. 그리고 각 무덤방에서는 붉은간토기(丹塗磨硏土器)와 민토기(無文土器)의 조각들이 무수히 나왔으며, 가락바퀴 및 살촉(石鏃)도 발견되었고 간혹 홍도편(紅陶片)도 나왔다. 출토된 이들 유물의 성격으로 보아 신월의 무덤유적은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에 축조된 곳으로 보고 있다. 무덤방의 완전한 5기 가운데 아기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가장 규모가 작은 1기(70x25x30cm)를 운반하여 그 원형대로 복원(復元)하였는데, 현재 단국대학교 박물관 제2진열실 뒤뜰에 보존되고 있다. (제7편 문화재 및 유적 참조)

<가곡 아랫마을>

(2)가곡(柯谷)부락   정동면(正東面)의 동남쪽 맨 가장자리에 위치하여 신촌리(고성군 상리면)와 인접한 마을.   국도(사천~고성)에서 벗어나 소곡부락 신월교(新月橋)를 건너 남쪽으로 산도(山道) 따라 불과 500m 밖에 안되는 거리이다. 부락 앞뒤로 장군당산(將軍堂山)과 흥무산이 우뚝 솟아 힘차게 뻗어 나간 산줄기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가파른 산기슭 아래에는 깊고 아늑한 골짜기가 펼쳐져 있으며, 그 사이로 작은 냇고랑의 물줄기가 흐르는 흥무산의 동향(東向) 비탈아래 웃말(上柯谷)과 아랫말(下柯谷)의 집들이 터를 잡았다.   옛날에는 협곡을 가로 흐르는 소하천의 변화가 잦아서 웃말과 아랫말의 행정 구역이 서로 달리해 왔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상리면의 가슬리(歌瑟里) 일부가 넘어들어서 오늘날의 가곡부락이 형성되었다. 지금은 냇고랑의 하천 정비가 말끔히 잘 되어 산등성이 가운데 감싸인 듯한 마을은 참으로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지금부터 삼, 사십년 전에만해도 부락 주위에는 큰대박(竹林)과 아름드리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어 이름모를 철새(候鳥) 서식처(棲息處)였다. 해마다 봄이 되면 흰새들이 떼지어 날아와 둥지를 틀고 새끼 치면 온 숲이 하얗게 변하여 마을과 숲이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풍치를 더해주고 있었으나, 세월따라 수가 줄어들더니 이제는 영영 그 모습마져 볼 수 없게 되었다.      • 부락의 연원(淵源)   수천년 세월동안 변함없이 흐르는 시냇물소리와 산새 울음소리 뿐이던 이 산골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확실한 연대(年代)는 미상(未詳)이나 임진왜란 이전부터 진주강씨(晋州姜氏) 일가가 최초로 정착해 부락을 열었다고 한다.   그러나 대(代)를 이어 살아오지 않았고, 그후 함안조씨(咸安趙氏), 밀양박씨(密陽朴氏), 달성서씨(達城徐氏), 김해김씨(金海金氏)가 차례로 입향(入鄕)하여 마을을 형성해 왔는데 조씨 또한 대대로 이어살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고 한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성씨는 박씨를 비롯해 서씨, 이씨, 안씨, 문씨, 정씨, 최씨, 하씨, 오씨 등 여러 성바지가 살고 있으며, 이중에 박씨 집안이 37호 중 6호로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다.

<가곡 웃마을>

  • 부락명의 유래   가곡(柯谷)부락은 앞 글에서 말했듯이 아랫가곡(下柯谷)과 웃가곡(上柯谷)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아랫가곡이 중심 마을이다.   웃가곡은 본래 가슬리(歌瑟里)의 일부로서 옛날에 고성군 상리면의 관할이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때 가곡으로 편입된 자연부락이다. 지금은 부락 앞에 나 있는 냇고랑을 경계로 군계(郡界. 사천과 고성군)가 확정돼 있지만 옛날에는 냇고랑의 변화가 심해 행정구역이 들쭉 날쭉이었다 한다. 따라서 사천의 가곡과 고성의 가슬은 당시 양 군에서 볼 때 각각 맨 가장자리에 위치하였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가장자리의 골짜기나 또는 그러한 골(마을)이란 뜻을 대개 ‘가실(가오실)’이나 ‘갓골’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가장자리’란 뜻의 ‘갓(邊)’은 ‘가사’, ‘가자’, ‘가재’ 등으로도 전음(轉音)되어 전국에 무척 많은 관련 지명을 이루게 하였다.   예컨대 갓골은 ‘가실’로 불리기도 하여 이런 마을들은 대개 골짜기에 많이 분포돼 있다. 전국에서 어떤 고장에는 ‘가야실’, ‘가오실’, ‘가실’이란 이름의 마을이 있는데 모두 가곡(柯谷)이라는 행정지명을 달고 있다. 가곡이란 이명(里名)은 다른 곳에서도 많이 볼 수 있으며, 그 곳들에는 각각 ‘가울’, ‘가야골’, ‘가리실’, ‘가삿골’, ‘갓골’,이란 이름의 자연 부락이 있기도 하다.   다른 한자인 가곡(柯谷), 가곡(嘉谷), 가동(桂洞) 등의 이명도 가각 ‘가실’, ‘가오실’, ‘가야골’이란 자연부락 이름에서 옮겨진 지명들로서 모두 ‘가장자리’라는 뜻을 지니는 것이다. 따라서 가실리(加實, 稼至里), 가슬리(歌瑟里)도 역시 이와 같은 뜻을 지니고 있다.   구전(口傳)에 다르면 웃가곡(上柯谷)의 지명을 가슬리라 한 것은 옛날 숲속 나무 등걸에 노리시설을 마련하여 선비들이 거문고를 타면서 풍악을 즐겼다는데서 이름하였다 한다. 하지만 위에서 살폈듯이 가곡(柯谷), 가슬은 모두 가장자리의 골짜기란 뜻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 산제터(산제골, 山祭谷)   가곡부락도 면내 여타 부락과 마찬가지로 웃가곡(上柯谷) 뒤 산골짜기에 산제(山祭 : 당산제라 하기도 함)를 모시던 곳이 있어 지금도 산제터라 일러온다.   마을 공동체의 제사인 동제(洞祭)는 우리민족 고유(固有)의 전승신앙(傳承信仰)이다. 따라서 가곡부락의 동제인 산제도 주로 마을의 무사태평(無事泰平)과 행운을 기원하기 위하여 섣달 그믐날 밤 자정에 지내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었다.   경비는 가가호호 주민의 추첨으로 하거나 부락의 기금으로 충당하여 제주(제관)는 생기복덕(生氣福德)이 많은 사람 가운데서 뽑는 것은 다른 곳의 동제사와 같다. 제주로 뽑힌 사람은 그날부터 일체 궂은 일에나 궂은 일이 일어난 집에는 발걸음을 않는 것이다.   산제터란 옛날부터 위에서와 같이 마을의 안가태평(安家泰平)과 재복(財福)을 빌고 한 해의 풍요(豊饒)를 기원하는 동제(洞祭) 즉 당산제(堂山祭)를 지내는 당산(堂山)에 있는 곳이라 하여 일컬어온 지명이다. 곧 산제(山祭~山神祭))를 지내는 산제곡(山祭谷)이란 뜻이다.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가곡마을 제사는 마을이 열린 후부터 연면(連綿)이 이어져 일정(日政)때를 거쳐 그 후에도 얼마동안 행사(行祀)해 왔다고 한다. 수년 전까지도 산제터에 오르면 고목 밑에는 당시 사용했던 사기그릇(제기)이 한군데 보관돼 있었으나 지금은 하나도 볼 수 없게 되었다.

(3) 객방(客坊)부락   면소재지 대곡리에서 동북쪽 8km쯤 떨어진 마을. 정동면의 20개 행정리동(行政里洞) 중 맨 끝자리를 차지하는 마을로서 감곡리와 고봉리(古鳳里 : 고성군 상리면)에 인접하고 있다.   마을이 들어앉은 서남에는 정동면의 주봉(主峰)인 흥무산이 태고(太古)의 일월(日月)을 벗하며 우뚝 솟았고, 서북간에는 넉넉한 곡선으로 장대산(305m)이, 동북에는 역시 음양 조화를 이루었다는 봉대산의 봉우리가 우람한 자태를 뽐내며 옛날부터 3개 시군(사천, 진주, 고성)의 분수령(分水嶺)이 되고 있다.   사방에 둘러있는 산 사이에 형성된 들판에는 큰 냇고랑의 물줄기가 때로는 횡포(橫暴)를 부리면서 쉼없이 젖줄되어 서북으로 장유(長流)하고 마을 앞을 지나는 국도(33호선)에는 하루에도 수백, 수천대의 차들이 고요한 산촌의 정적(靜寂)을 깨며 달리고 있다.   차에서 내려 곧 졸졸 흘러내리는 시냇물을 따라 위로 이어지는 석보(石洑)들, 청아(淸雅)한 산새들의 지저귐을 귀에 담으며 추스러 올라가면 두 줄기의 산등성이가 양 옆으로 뻗어 내리고 시루봉(甑峰, 259m) 끝자락에 포근히 감싸이듯 자리잡은 아담하고 정겨운 마을이 나타난다. 객방(客坊) 마을이다.   멀리 남서쪽 흥무산의 낙조(落照)를 바라보며 웃땀과 아랫땀으로 형성된 부락은 주위가 아늑하고 평화로우며 공기가 맑고 깨끗하며 그윽한 산골마을다운 정취(情趣)를 느끼게 한다.      • 부락의 연원(淵源)   객방부락도 이 땅의 자연부락이면 거의 다 그렇듯이 언제, 어떤분이 무슨 인연으로 이곳에 살러 들어와 부락이 열리기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길이 없다.   다만 조선 초기부터 각 고을마다 쇠(금)를 파내기 위해 백성을 모집하여 철장(鐵場 : 沙鐵, 石鐵을 제련하여 正鐵을 만드는 곳)을 설치했다는 기록과 관련하여, 이곳에도 쇠를 캐낸 廢鑛址라던가 쇠를 다루었던 용해노적(溶解爐跡)이 산재하는 점으로 보아 철장의 설치와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나 하고 짐작될 뿐이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여기에 사람이 들어와 살기로는 무송윤씨(茂松尹氏)가 맨 처음으로 입향(入鄕) 정착함으로써 부락을 여는 효시(嚆矢)가 되었다 전하다. 대대로 이어 살면서 우거진 덤불을 헤치고 많은 토지를 일구며 부락을 개척하여 큰 부자(富者)가 났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흔히들 이곳의 웃땀을 ‘윤땀’이라 부르고 있다.   그 후 이씨(泗川李氏), 박씨(密陽朴氏), 정씨(延日鄭氏)가 입항하여 부락을 형성해 왔으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윤씨, 이씨는 대(代)를 이어 살지 않고 객지(客地)로 떠났으며 이어서 여러 성씨들이 살러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등의 변천을 거듭하여 현재 17개 성씨에 주민 54가구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여러 성바지중 정(鄭)씨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으며 그 다음이 채(蔡)씨이다.      • 부락명의 유래   부락의 동북쪽에 떡시루처럼 생겼다 하여 시루봉(259m)이라 일컫는 이름의 아담한 산이 있으며, 봉대산과 함께 마을들(웃땀과 아랫땀)과 들판을 감싸안고 있다.   시루모양새의 시루(甑)에는 불을 지펴야 떡이 쪄지는 법인데 이 아궁이 역할을 하는 곳이 산자락 어디엔가 있었을성 싶다. 잘 모르기는 해도 그곳이 바로 웃땀골 앞 들판의 구릉(丘陵)지대가 아닌가 한다. 이 구릉은 약 500평 남짓 야트막한 평지로 되어 있는데 이곳에는 옛날에 쇠를 다루었던 흔적의 철설(鐵屑 : 쇠의 부스러기, 쇠똥)이 많이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쇳부러기기의 존대는 쇠를 파내어 정철(正鐵)을 제련하는 야외 용해노적(溶解爐跡)임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지어 볼 때, 쇠(금)는 옛날 소곡리의 쇠실(金谷)에서만 파낸것이 아니라 이곳 객방산(客坊山)에서도 많이 캐어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의 근거로는 웃땀골 동쪽 뒤산의 폐광지(廢鑛址)가 이를 말해 준다. 그리고 야외노적과 이들 폐광터는 옛날부터 객방에서도 쇠가 산출되었음을 이로써 알 수 있다.   소곡(쇠실)의 쇠바위굼터와 간련하여 조선 초기 당시 전국의 각 고을마다 쇠(금)가 나는 곳에는 비로소 철장을 설치하고 백성을 모집하여 사철(沙鐵), 석철(石鐵) 등을 제련하여 정철(正鐵)로 만들어 국용에 쓰게 하였다는 앞에서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해서 위 용해노적(溶解爐跡)은 조선 초기의 제련소이자 철장(鐵場)인 셈이다.   그러므로 이곳 야철지(冶鐵址)는 외지(外地)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어 취락(聚落)을 이룬 야방(冶坊 : 대장장이가 일하는 일종의 공장)이었던 것이며, 외지에서 들어왔다 하여 손 客자, 골 이름의 坊자를 따서 客坊이라 한 것이다.   한가지 덧붙이자면 객방부락의 여러 골짜기 곧 도랑골, 보리골, 솔미골 등 여러 곳에는 옛날부터 명당(明堂)자리가 많기로 이름난 곳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한때 희성(稀姓)으로서 세도(勢道)가 당당했던 사천목씨(泗川睦氏)를 비롯해 해주오씨(海州吳氏), 삭녕최씨(朔寧崔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등 여러 성바지들의 선영(先塋)이 자리하여 세월의 흔적을 읽게 한다. 소위 풍수에서 말하는 산이 곧 땅이므로 사람들은 모름지기 좋은 물과 공기(風水)를 기대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명당자리를 개발해 이용하면 지덕(地德)을 누릴 수 있다는 잡술에서 나온 민속신앙이 아니였던가 싶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이 곳이 사천에서 맨 끝 가장자리에 위치한 산촌으로 밖에 보이지 않겠지만, 그 옛날 쇠가 나고 또 철장이 있었을 뿐 아니라 사천에서 고성을 거쳐 통영(통제부)에 이르는 역로(驛路)상에 위치하여 지척(咫尺)에는 가곡원(柯谷院)이란 원우(院宇)가 있었던 까닭에 매우 분비고 북적거렸을 것으로 미루어 짐작된다.      • 새마을사업과 공공시설   부락이 열리고부터 오늘날까지 이 땅을 지키며 고달픈 삶을 이어오는 동안 부락민의 자력(自力)과 당국의 징원으로 이루어 놓은 부락의 공동재산과 시설물들을 살펴 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부락의 북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간 들녘의 막다른 골짜기에 있는 객방 소류지(客坊小溜池)는 6.25전쟁 와중에서도 위선 농사는 지어야 하겠기에 1952년 5월에 기공식을 시작으로 4~5년에 걸친 연차공사로 완공하여 아래에 있는 7ha의 천수답(天水沓)을 수리안전답으로 전환하였다.   이러서 1959년에는 마을 앞을 흐르는 큰 냇고랑에 새보(新洑)를 설치하여 관개용수(灌漑用水)를 들판으로 끌어들였으며, 웃땀골의 못(池)은 1978년 3월에 착공하여 그해 10월에 완공함으로서 역시 아래에 있는 5ha의 논들의 젖줄 구실을 해 줄 뿐 아니라 우기(雨期)에는 홍수를 조절해 주는 역할까지 해 주고 있다.   동민의 집회와 동리(洞里)일을 집행하는 동회관(洞會館)은, 옛날에는 동사(洞舍)라는 이름의 집이 한 채 있었으나 낡아서 허물어 버리고 1970년에 새마을사업 등 동(洞) 자금으로 건평 20평(브로크조, 스라브 지붕)규모의 마을회관을 건립하였고 아울러 마을의 도로(농로)도 넓혔다. 곧이어 농어촌 전화(電化)사업이 추진됨에 따라 1971년에는 본 사업을 착공함으로서 동민들은 종래의 호롱불 생활에서 비로소 전등불 혜택을 보게 되었다.   따라서 부락민의 식수와 생활용수난 해결을 위하여 1972년에는 상수도(上水道)를 설치하고 처음에는 골짜기의 자연수를 끌어다 공급했었으나 1980년에 이르러 정부 보조금(300만원)과 동 자금으로 지하수 1개공을 굴착, 1일용량 약 3,400드럼의 용수를 확보하게 됨으로서 식수난이 완전히 해결하기에 이르렀다.   1977년에는 전 주민이 일치단결하여 새마을운동을 성실히 수행함으로써 그 노력과 실적을 높이 평가받아 새마을 우수마을로 선정되어 대통령의 특별하사금(特別下賜金) 300만원을 받아 건평 50평(브로크조, 스레이트 지붕)의 공동창고를 건립하고 동민들의 생활 일용품 등의 구매 편의를 제공하기 위한 구판장(購販場)을 열어 운영하고 있다.   또 1980년에는 정부 보조금과 동 자금으로 마을의 안길을 넓이 8m로 넓히는 한편, 취락구조의 개선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하여 오늘날의 현대식 주택이 즐비하게 들어서 마을의 옛 모습일랑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다. 뿐더러 마을 앞 들판과 실개천은 1990년 경지정리와 함께 직강(直江)으로 바로잡게 되어 홍수 피해를 면하게 되었고, 이어서 1991년에는 마을의 뒷 들이 경리정리되어 이로써 기계화영농의 기반이 완전히 구축되었을 뿐 아니라 마을 지도는 물론, 그야말로 잘사는 전원(田園)마을로 변모하였다.   끝으로 1994년에는 역시 정부 지원금과 동 자금 총 1,500만원을 들여 건평 20평(브로크조, 스라브 지붕) 남짓의 노인회관을 건립하여 동민의 편의시설을 이로써 모두 갖추게 되었다. 이 외에도 공공시설이 더러 있으나 그 중에는 1978년에 설치한 봉대산의 헬리콥타 승강장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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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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