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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동면지

9. 학촌리(鶴村里)

  정동면(正東面)의 10개 법정이동(法定里洞) 중 아홉 번째로 사천읍에서 동남방향 8km지점, 면소재지에서 4km 지점에 위치에 있다.   중첩된 산줄기가 동서로 길다랗게 뻗어나간 두갈래의 협곡(峽谷)이 좁다란 들판을 열어 놓았고, 그 한가운데를 사천~고성간의 국도와 사천강의 물길이 흐른다. 북으로는 봉대산의 한 줄기가 남향으로 뻗어내려 갑자기 감티봉이 우뚝 솟았는데, 가지가 난 산줄기가 다시 완만한 곡선(曲線)을 이루며 서향으로 흘러가면서 만든 4개의 골을 넘어 감곡리와 인접해 있다.   남으로는 흥무산을 주봉으로 많은 산들이 힘찬 산파도를 이루며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어깨동무하며 여러 갈래로 이어져 나갔는데 동서로 가로 누운 산준령(峻嶺)을 경계로 사남면 우천리(牛川里)와 인접했다. 동으로는 물길 따라 좁다랗게 펼쳐진 들판과 동남으로 비스듬히 가로 누운 학정산(鶴頂山)을 경계로 소곡리, 서쪽은 역시 물길 따라 좁다랗게 펼쳐진 들녘과 두일산(斗一山) 및 외룡소산(外龍沼山)을 경계로 장산리와 마주해 있다.   유서깊은 학촌리도 다른 리동(里洞)과 함께 본래 사천군의 동면(東面)에 속해 있다가 1914년 4월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고자동(古自洞), 만마동(萬馬洞), 배나무골(梨洞)을 병합하여 학촌리(鶴村里)라 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학촌리란 이명(里名)은 학촌리의 중심마을인 고자실이 학정산(鶴頂山)의 산자락을 깔고 앉았기 때문에 ‘鶴’자와 마을이란 뜻의 ‘村’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학촌리를 구성하는 행정이동(마을)으로는 현재 만마와 학촌 두 부락이 있다. 만마부락은 사천~고성간의 신작로(新作路)가 ?리면서 마을 한 가운데를 지나게 되자 남북으로 양분되었고, 옛날에 가곡원(柯谷院)이란 역원(驛院. 역로에 있던 원집)이 있어 길손들이 많이 지났던 곳으로 가메(가마) 바위의 슬픈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학촌부락은 뒤에 다시 말하겠지만 고려 때 비운(悲運)의 왕자 왕욱(王郁)에 관한 고사(故事)가 담겨 있는 곳으로 ‘골짜기 마을’이란 뜻의 배골(뱃골, 梨洞)을 관할하고 있다. 그리고 산간벽지이면서 교통이 편리하고 수리시설이 잘 되어 있어 모든 마을들이 미맥(米麥)을 위주로 연초재배, 한우 비육(肥育)사업에 주력하는 한편 밤, 단감의 과원이 조성되어 복합적 영농으로 비교적 농가 소득이 높은 풍요로운 농촌이면서 전원적(田園的)인 농촌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1) 만마(萬馬) 부락의 연원(淵源)   장산리(獐山里)의 대산 저자거리(장산리 휴게소)로부터 동쪽으로 약 800m에 위치한 전형적(典型的)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전원(田園)마을.   뒤로 완만한 산세(山勢)가 부드럽게 서향으로 뻗어나간 야산을 등지고 물빛고운 사수(泗水)가에 자리잡은 이 만마부락에 그 옛날 언제부터 선인(先人)들이 찾아 들어와 삶의 터전을 잡기 시작하였는지는 여느 촌락과 마찬가지로 전해 내려오는 기록 문서나 물적자료가 없어 부락의 내력을 소상히 엮어내기란 실로 막막하다.   다만 가마바위(轎岩)의 전설이라던가 원골(院谷)이란 지명이 있는 것으로 보아 아주 먼 옛날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땅을 일구며 살았을 것이라는 추측만 될 뿐이다. 그것은 원골이란 원(院)이 있었던 곳에 이런 이름이 많이 붙는데, 이런 땅 이름이 있는 곳은 옛날에 길손들이 많이 오가며 붐볐던 곳이기 때문이다.   <사천읍지>를 보면 현(縣)에서 동으로 20리쯤에 가곡원(柯谷院)이 있다고 하였다. 원(院)이란 뒤에 다시 기술하겠지만 고려, 조선시대에 있던 역원(驛院)의 하나로 지방의 출장가는 관리들의 숙박시설(宿泊施設)을 말한다. 조선시대의 원은 세종 27년(1445)에 부근에 주민중에서 원주(院主)를 선발 관리케 했다는 점으로 보아 원이 설치되기 훨씬 이전부터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을 것이다 고찰(考察)된다. 그러나 어떤 성바지가 들어와 생활의 터전을 잡았는지는 알 길이 막막하다.   그런데 연로(年老)하신 분들의 말을 빌리면 현재 살고 있는 성시들의 입향조(入鄕祖)가 처음 이곳에 들어와 살았다고 볼 수 밖에 없다고 하는데, 이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전 삭녕최씨(朔寧崔氏)의 일가가 처음으로 입향(入鄕), 정착 함으로서 부락을 여는 효시(嚆矢)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영일정씨(迎日鄭氏)가 입주하여 4대에 걸쳐 거주하다가 학촌(鶴村)마을로 이거(移居)하였으며, 함안이씨(咸安李氏), 진주정씨(晋州鄭氏), 사천이씨(泗川李氏), 전주이씨(全州李氏), 밀양박씨(密陽朴氏), 김해김씨(金海金氏) 순으로 입주하여 오늘날과 같은 부락이 형성 되었는데 현재(1995년) 42세대 144명이 거주하고 있다.   흔히 촌락이라면 한 두 성씨가 주종(主宗)이 되어 부락이 구성되어 있슴이 보통인데 만마부락은 사.고선(泗.固線)의 노변촌(路邊村)인지라 1900년대 이후부터 여러 성씨(姓氏)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등의 변천을 거듭하였다고 한다.   예컨대 1920년까지만 하여도 지금의 가마바위 부근에 주막(酒幕), 잡상(雜商)들의 오두막집이 10여 호(戶)나 되어 이곳을 새땀(新基)이라 일컬었다 한다. 그런데 1960년대에 와서 완전히 없어지고 지금은 그 흔적마저 찾아 볼 수 없다. 이곳은 ‘벅수(목장승)도 걸리고 벙어리 3년이면 말을 다 한다’는 우스개말이 전하는데 그만큼 옛날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붐볐다는 것을 뜻한다.   현재 성씨 구성은 최(崔)씨가 12호로 주종을 이루며 이(李)씨가 4파이고, 구(具)씨 및 박(朴)씨, 김(金)씨가 각 2파, 송(宋)씨, 오(吳)씨, 윤(尹)씨, 유(劉)씨, 정(鄭)씨, 진(陳)씨, 황(黃)씨 등 18개의 성바지가 그런대로 선린과 세의(世誼)를 다지며 원만하게 잘 지내고 있다.      • 부락명의 유래   만마(萬馬) 부락을 두르고 있는 뒷산은 그저 은근하고 무던한 느낌을 주는 높고 낮은 능선(稜線)으로 펼쳐져 있다.   능선이란 산등을 따라 죽 이어진 봉우리의 잘록한 선을 말하는데, 옛날 웬 지사(地師, 風水師)가 동리 앞을 지나면서 사방을 둘러보고 하는 말이, 이 능선과 저 5도랑 칠성(七星) 바위는 마치 천군만마(千軍萬馬)와 같은 형상으로 보인다 하였기로 뒤에 부락명을 만마(萬馬)라 불렀다 한다.   5도랑이란 폭이 좋은 다섯 개의 개울을 말하는데 실지로 그와 같은 도랑이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풍수에서는 산형(山形)을 말할 때 하늘을 5성(星)으로 나눈다. 즉 그 형태가 곧고 솟아 있는 것을 목산(木山)이라 하며, 뽀족하고 낮고 좁은 것을 화산(火山), 모가 나고 책상 모양인 것을 토산(土山), 꼭대기가 둥글고 다르기 넓으며 복종(伏鍾)과 같은 것을 금산(金山), 굽이쳐 움직이는 파랑(波浪)과 같은 형상을 수산(水山)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위의 5도랑은 풍수에서 말하는 5성이 잘못 와전(訛傳)되어 5도랑이라 했지않나 싶다.   다른 한편으로는 옛날 이 마을을 연 선인(先人)들이 뒤 산 허리를 말등(馬嶝)에 비기면서 복상(伏象)쪽으로 뻗어나간 능선의 맨 끝부분이 흡사 말이 풀을 뜯고 있는 형상 같고 마을 뒤로 뻗어 내린 4개의 능선(稜線) 끝부분이 마치 말굽(馬蹄)과 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어 산형(山形) 모두가 흡사 말이 풀을 뜯고있는 형상같다 하여 만마(萬馬)라 불렀다 한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산하동(山下洞)의 주민들은 산봉우리 巒자와 음운(音韻)이 같은 萬자를 취하여 만마동(萬馬洞)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해진다.      • 원골(院谷)   가마바위(轎岩) 동쪽에 있는 아늑한 골짜기.   <신증 동국여지승람 : 新增 東國輿地勝覽>(1530년)을 보면, 사천에는 보통원(普通院), 마월원(磨月院), 가곡원(柯谷院)의 세원이 있다고 하였다. 이 중의 가곡원이 지금의 만마부락에 있었기 때문에 뒤에 원골이란 땅이름이 생겨난 것이다.   원(院)이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고려, 조선시대에 지방에 출장가는 관리들의 숙박시설, 일테면 국영여관(國營旅館)을 의미한다. 공무로 여행할 때 출장관원의 숙식(宿食)을 제공해 주기 위해 주요 도로상이나 인가(人家)가 드문 곳에 매 30리(里)마다에 한 원사(院舍)를 두었으며, 그 유지비로서 고려 공민왕 때에 이미 원위전(院位田 : 원의 유지비 및 인건비에 충당하기 위하여 주는 田地)을 지급했으나 활발한 정비는 조선 초기부터였다. 세종 27년(1445)에는 부근의 주민 중에서 원주(院主)를 선발 원사와 전지를 관리케 하였다.   <경국대전 : 經國大典>에 의하면 그 유지비로 원주에게는 대로(大路)면 1결(結) 35부(負), 중로(中路)면 90부, 소로(小路)면 45부를 주었다고 한다. 원은 조선 초기에 한때 크게 번성하였으나 그 이용자가 제한되어 후기에는 점차 쇠퇴한 채 명맥만 유지 되었다.   사천의 관문(官門)에서 동으로 20리쯤에 있던 이 가곡원은 비록 소로에 해당되는 원우(院宇)였으나, 고성을 거쳐 통영(統營)의 통제부(統制府)로 가는 주요 도로상에 있었기 때문에 옛날에는 관원들과 길손 뿐 아니라 짐을이고 진 행상(行商)들로 많이 붐볐고, 해가 질 무렵이면 밥을 짓기 위해 버린 부연 쌀뜨물이 강을 타고 내려 청널땀(대곡리) 벼랑 밑까지 미쳤다고 하니 얼마나 숙식객들이 많았던가를 이로써 알 수 있다.   현재 원골에는 민가가 하나도 없으며,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하여도 5가구가 살았으나 산업화 물결에 따라 모두 어디론가 이사해 가고 없어졌다. (제7편 문화재 및 유적 참조)      • 큰새골, 작은새골, 좁은골, 의인골   평화로운 노변의 만마부락을 포근히 감사주는 듯한 마을 뒤의 아늑한 골짜기가 크고 작은 여러 갈래의 골(谷)로 이루어져 있어 그 생긴 규모에 따라 붙여 놓은 골 이름들이다.   북동쪽 봉대산의 산줄기가 뻗어내려 갑자기 감퇴봉(蚶堆峯)이 봉긋 솟게 하고 그 여파가 다시 서쪽으로 흘러가면서 크고 작은 골을 이루어 놓았다. 대체적으로 길다랗게 가로 누운 줄기에서 생겨난 골인데 큰새골이니 작은새 골이니 하고 이름을 붙인 이유는 골안에 몇 안되는 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4개의 골 가운데 골안이 제일 크다 하여 큰새골이 되고 다음이 작은새골, 그 다음이 골이 좁다 하여 좁은골이 되고 거기서 막바지에 가서는 의인골로 나타나기 때문에 여러 이름이 붙은 것이다. 여기서 크고 작은 새골이니 하는 ‘새’는 새땀이란 뜻이라 하며, 의인골 안에 부채골(골 안의 넓적한 등이 부채<扇>처럼 생겼다고 붙여진 것으로 여겨짐)이라는 작은 골이 있는데 골 어귀에 서재터가 있다.      • 서당교육   만마마을에도 서당이 있어 여느 마을 못지않게 후생(後生)들의 수학(修學)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는데, 현재 70대 노인들의 한문수학을 마지막으로 신식교육 기관인 학교교육에 밀려 문을 닫게 되었다.   만마부락의 서당은 100여 년전 이 마을에 입주한 김경배(金敬培)란 분이 자제교육을 위하여 처음 서당을 열었는데 얼마 못가서 문을 닫았다고 하며, 그 뒤를 이어 역시 이 마을에 사는 학산(鶴山) 최효붕(崔孝鵬)께서 자기 사랑방을 서재(鶴山齋)로 꾸며 서당을 열었는데, 원근에서 수학한 학생수가 무려 100여명에 달했다고 한다.   현재 70대 이상 노인시절로부터 적어도 100년이상을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세월동안 서당교육이 실시되었던 것이며, 당시 유년시절 학산선생 밑에서 수학한 최인규(崔寅圭), 최인옥(崔寅玉), 이진관(李鎭灌) 등 세 분은 지금도 이 마을에 생존해 계신다.      • 가메바우(가마바위 : 轎岩)   마을에서 동쪽으로 약 300m쯤 벼랑 밑에 있었던 바위. 지금은 사.고선(泗.固線)의 널따란 국도가 뚫려 있지만 옛날에는 이 가마바위 옆으로 소로(小路)가 나 있어 사천에서 고성, 통영으로 행하는 역로(驛路)상의 험로(險路)였다고 한다. 아래에는 사천강이 흐르기 때문이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이 바위 밑에는 이른바 명주(明紬)실 한 꾸리를 모두 다 풀어도 닿지 않는 깊은 소(沼)가 있었다 한다. 그런데 옛날 어느 하루에 신행(新行, 婚行)걸음의 한 가마꾼 일행이 이 길을 지나다가 앞선이의 잘못으로 그만 가마와 함께 낭떠저리 바위밑 소에 떨어져 모두 익사(溺死)했다는 것이다. 이런 연유로 해서 뒤에 가마바위(轎岩)이란 이름이 생겼다고 한다.   그 후 이 애절한 소문이 온 고을로 퍼지게 되자 이 길로 가마타고 신행걸음할 적에는 출발에 앞서 그 부모들이 무사 통과를 바라는 마음에서 성주나 조상님께 반드시 빌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바발등(擺撥嶝, 파발등)   옛날 파발꾼이 가마바위를 지날 때 이 등성이에 올라 땀을 식히거나 냇물에 들어가 멱감고 쉬어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파발이란, 조선시대 역참(驛站)의 하나로 통신과 수송을 겸한 것을 말한다. 서조 30년(1597년) 부터는 통신만을 위주로 하는 파발(擺撥)의 제도를 실시하여 변서(邊書 : 변방으로 가는 공문서)의 급속한 전달을 꾀하였다고 한다. 당시 사천에는 동계(東溪) 및 관율(官栗.현 사천읍 두량리)의 두 역참이 있었는데 바발등 밑의 소로는 고성, 통제영(統制營)으로 가는 요로였다.   파발에는 기발(騎撥), 보발(步撥)의 두가지가 있으며, 기발은 25리마다, 보발은 30리마다 1참(站)을 설치 매참에 발장(撥將) 1명, 군정(軍丁) 약간명과 기발에 말 5필을 두었다. 바발등은 파발등의 된소리가 변음되어 바발등이라 한 것이다.      • 수리시설(水利施設)   만마부락 앞을 흐르는 사천강에는 5개의 보(洑)가 구축되어 있다. 보는 관개용(灌漑用)으로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흐르는 냇물을 막아두는 둑을 말한다. 마을 동쪽에서부터 차례로 웃보(上洑), 아랫보(下洑), 새보(新洑), 새미내보(井川洑) 그리고 맨 끝에 있는 것이 중보(中洑)이다. 이중의 상하보는 수로가 마을 앞을 지나기 때문에 사시절 맑은 봇물이 끊일새 없이 흘러 내려 생활용수로도 널리 이용되어 편리하기 이를데 없다.   • 콧대바위   마을 앞 남쪽에 길다랗게 가로 누운 나지막한 산줄기를 디이리산(斗一山의 方言)이라 부른다. 대체적으로 보기(방위)에 따라서는 한일자(一字)로 이구산(尼丘山)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는데, 서쪽으로 내달아 노천(魯川)에서 용소산(龍沼山)이 솟았다. 이 두일산 중간쯤에 불룩하게 솟아 오른 바위가 흡사 콧등의 우뚝한 줄기처럼 보인다 하여 주민들은 콧대바위라 불러온다.      • 킨 특수부대 작전과 만마(萬馬)   6.25전쟁 때 호남(湖南)을 석권한 북괴군 6사단은 1950년 7월 25일 순천, 광양을 점령하고 26일에는 하동을, 그리고 7월 31일에는 사천, 진주를 점령한 후 마산의 외곽인 진동방면까지 진출하였다.   이같이 파죽지세로 무적을 자랑하던 적 6사단은 부산을 최후의 목표로 삼고 마산을 향해 진격하였으나, 아군에 의해 진로가 차단됨으로써 의창군 진동리와 함안군 여항산(餘航山)에 이르는 진북, 진전면의 첩첩한 고지에는 밤낮없이 피아간의 교전으로 전선이 고착되어 있었다. 이런 가운데 미8군의 증원부대는 속속상륙하여 증강되었다.   이에 워커 장군은 사천과 진주를 탈환하고 동시에 북괴군의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의도로 마산 정면에서 역공격(양동작전)을 펼것을 결심하고, 미제25사단장킨(W. B. Kean)소장의 이름을 따서 후에 <킨 특수임무부대>라고 명명된 이 부대는 예하 2개연대 외에 미해병대, 미제5연대 전투단, 민기식(閔機植)부대, 김성은(金聖恩) 해병부대 등으로 구성하여 8월 7일 미명을 기해 일제히 반격작전을 개시하였다.   이때 미제25사단에 배속된 한국군 부대 즉 민기식부대와 김성은 해병부대는 서북산 일대의 잔적을 소탕하는 한편 함안과 진동도로를 확보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다. 마산과 진동간의 도로상에는 연일 적군이 출몰하는 바람에 이 임무를 수행하는데는 상당한 어려움이 있었다. 8월 8일 반격작전의 선봉에서 미제35연대의 정찰대가 마침내 남강까지 진출하여 적정을 알려왔고, 이어 8월 9일에는 제5연대 전투단이 3일간의 혈전 끝에 309고지와 254고지 주변의 적을 완전 격퇴함으로써 진동리 주변의 적은 일단 소탕되었다.   8월 12일에는 제25사단의 일부 부대들이 진주 가도상의 진주 고개에 도달하고 중앙의 제5연대 전투단은 그 선봉대가 마산-진주 가도에 도달하였으나 북괴군의 매복에 걸려 2개 포병대대를 상실하는 등 난관에 봉착했다.   한편 남쪽의 해안도로(진동에서 고성을 거쳐 사천에 이르는 도로)로 진격한 미해병대와 한국 경찰대는 다행한 편이어서 8월 12일 고성을 수복하고 거의 사천까지 진격하려다가 본면의 노루목인 장산리에서 피아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해병전술 항공대는 진격로상인 국도(33호선)에서 북괴군의 대자동차행렬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장산리 노천(魯川)전투에서 만마(萬馬)에 전방지휘소(故 崔道卿씨 댁)를 설치한 아군은 미해병대의 탱크부대와 한국 경찰대의 선봉대가 복상마을 앞가지 진격해 들어갔으나 대곡리 청법산(淸法山)에 진지를 구축한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그 벼랑밑 길을 뚫지 못하고, 탱크부대는 만마까지 후퇴하여 마을안 빈터와 밭에 포진지(砲陣地)를 구축하는 한편, 마을 뒤 감곡리와의 경계를 이룬 능선(감퇴봉에 서향으로 뻗어간 능선)과 용소산(龍沼山) 정상을 잇는 전선(戰線)을 구축하여 다음날(8월 13일) 새벽까지 피아간의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좁다란 노루목을 뚫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피아간에 손실만 입은 채 아군은 해가 뜰 무렵 출발점으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당시 아군이 버리고 간 포탄의 폭발로 화재가 발생하여 민가 3동이 소실되고, 이로 인해 주민 한 사람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기도 하였다.

(2) 학촌(鶴村) 마을   만마마을에서 남쪽의 다리 하나를 건너면 처음엔 손으로 가릴만큼 작던 마을앞의 숲이 점점 커져서 시야를 메운다. 산새가 지저귀는 우거진 숲이 있고 산이 뿜어내는 향기와 길가의 풋풋한 풀냄새를 맡으며 들길을 조금 가다보면 산자락 사이에 포근히 감싸이듯 자리잡은 아담하고 정겨운 마을이 나타난다.   병풍처럼 둘러있는 흥무산(興霧山)의 주능선이 완만한 비탈을 지으며 서북향(西北向)으로 흘러가다가 문득 다리 쉼이라도 해야겠다는듯 상중턱 조금 아래쯤에서 갈려나온 산등성이들이 사방을 둘러있는 산골의 아늑한 마을이다. 여기가 학촌리의 중심 마을이며, 그 옛날 비운(悲運)의 왕자 욱(郁 : 고려 太祖의 여덟째 아들)이 사천땅에서 귀양살이 할 적에 배방절(排房寺)에 우거(寓居)하던 아들 순(詢, 뒤에 고려 8대 현종(顯宗)을 보러가기 위해 자주 이곳 산등성이를 오르내렸다는 고자실(顧子谷)이다.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의하면 마을 앞에는 흥무산에서 뻗어나온 힘찬 산줄기 하나가 급경사를 지으며 잠시 주저 앉았다가 큰땀골에서 다시 방향을 동쪽으로 돌려 날개짓하듯 길다랗게 뻗쳤는데, 마치 한 마리의 거대한 학(鶴)이 막 날려는 형국(形局 : 풍수에서 보는 집터, 묏자리 등의 생김새)이라 하여 학산(鶴山)이라 일컫는다. 가까이 보아서도 좋고 멀리서 보면 더욱 아름다운 풍치(風致)를 자아내며 아담하기 그지 없는 정다운 마을이다.      • 부락의 연원(淵源)   부락의 연원(淵源)에 대해 그 연대(年代)는 헤아릴 수 없으나 한 유수(流囚)의 슬픈 사연으로 고자실(顧子谷) 또는 고자봉(顧子峯)이란 지명이 생겨났듯이 고려때부터 사람이 들어와 살았지 않았나 하고 짐작하는 설(說)이 있으나 확실한 것을 알 길이 없어 막막하기만 하다.   동구(洞口) 어귀에 세워 놓은 빗돌(碑石) 하나가 있는데, 이 비석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450년전 하동군 옥종면 월횡리(河東郡 玉宗面 月橫里)에서 진주하씨(晋州河氏) 양정공(襄靖公, 敬復)의 증손인 종사랑공(從仕郞公) 순(順)이 어떤 연유로 해서 산좋고 물맑은 이곳에 들어와 삶의 터전을 닦음으로써 최초의 입향조(入鄕祖)가 되었다고 하며, 따라서 그 후손들의 세장지(世庄地)로 4백 수십년을 지켜왔다는 것이다.   그 후 연일정씨(延日鄭氏)와 삭녕최씨(朔寧崔氏)가 들어오고 이어서 진주정씨(晋州鄭氏), 안동권씨(安東權氏), 전주최씨(全州崔氏), 경주전씨(慶州全氏), 합천이씨(陜川李氏), 함안이씨(咸安李氏), 여양진씨(驪陽陳氏), 창원황씨(昌原黃氏) 등이 차례로 입주하여 생활의 터전을 개척하면서 부락을 형성해 왔다고 한다.   현재 거주하는 주민들은 60여 가구에 220여 명이 오순도순 살고 있으며, 주요성바지로는 정씨(鄭氏)가 가장 많고, 다음이 최씨(崔氏)이며, 그 다음으로는 하씨(河氏), 권씨(權氏), 김씨(金氏), 이씨(李氏) 순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빗돌에는,      “(전략) 전래(傳來)에 미풍양속(美風良俗)을 숭상하고 선린(善隣)과 세의(世誼)를 다지며 복지학촌(福祉鶴村)의 무궁한 번영을 기원하는 대의(大義)에서 동인(洞人)의 합모(合謀)로 이 표석을 건립함”이라 새겨놓고 있다.      • 부락명의 유래   이 마을의 행정부락명(行政部落名)인 학촌(鶴村)은 본래는 고자실(顧子谷)이라 하였다가 음운(音韻)이 같은 한자로 고자실(古自谷)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연유를 살펴 보면 다음과 같은 說이 전해지고 있다.   정동면의 최고봉인 흥무산의 줄기가 북서쪽을 향하여 힘차게 꿈틀거리며 뻗어 나가다가 약 2km쯤 되는 주능선(主稜線)에 봉긋 솟은 봉우리 하나를 옛날에는 고자봉(顧子峯)이라 하였다. 곧 아들 있는 곳을 뒤돌아 본다는 뜻이다. 여러 갈래의 산줄기와 골짜기를 거느린 제법 덩치가 큰 산이지만 정상을 중심으로 펑퍼짐한 산마루일 뿐 험준한 구석은 찾아 볼 수 없고 그저 은은하고 무던한 느낌을 주는 산이다.   마을에서 가파른 비탈길을 나뭇가지들을 헤치고 오르면 울창한 송림이 앞을 가로 막고 한참 후에는 정상에 이르며, 그 너머로 사남면 우천리(牛川里) 능화(陵花) 마을에 다다른다. 키 작은 관목들로 뒤 덮인 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가까이는 곧바로 학촌과 만마부락이 눈아래 굽어보이고 멀리 산기슭에 자리한 대산(垈山)의 천금산(千金山) 너머 배방골(排房谷)이 눈에 들어온다.   배방골이란 앞서 여러차례 말한바 있거니와 옛날 이 아늑한 골짜기에 배방사(排房寺)란 고찰(古刹)이 자리잡고 있다해서 붙여진 지명이다. 지금은 절터(寺址)만 남아 있는데, <사천읍지> 배방사조를 보면,   “(배방사의) 옛 이름은 노곡(蘆谷)으로 와룡산(臥龍山 : 옛적에는 이 절 뒷산을 와룡산이라 했다)에 있으며, 고려 현종이 아주 어릴적(微時)에 일찍이 이 절에서 살았다(寓居)......”라고 씌여 있다.      이와 관련하여 <고려사 : 高麗史> 세가(世家) 성종조(成宗條)에는,      “(성종) 임진(壬辰) 11년(992) 가을 7월 초하루 임진일에 종실(宗室) 욱(郁)을 사수현(泗水縣)에 귀양 보냈다”라 하고, 또 “성종 15년(996) 병신(丙申) 가을 7월 을사일에 왕욱(王郁)이 사수현에서 죽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상은 고려 왕실에 관한 단편적인 사실(史實)에 불과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 사천과 깊은 사연이 얽혀 있슴을 다음에서 알 수 있다. 그런데 왕욱(王郁)이란 사람은 당시 어떤 인물이며 어찌하여 사수땅에 유배(流配)되었던 것일까?   먼저 이해를 돕기 위해 고려 왕실의 초기 왕계(王系)를 살펴보면,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은 8명의 왕자를 두었다. 장자 무(武)가 2대 혜종(惠宗)이요, 둘째 요(堯)가 3대 정종(定宗), 3자 소(昭)가 4대 광종(光宗), 광종의 장자 주(伷)가 5대 경종(景宗)이다. 경종의 비(妃)는 제1비가 헌애왕후(獻哀王后) 황보씨(皇甫氏)요, 제2비가 헌정왕후(獻貞王后) 황보씨(皇甫氏)이다. 두 왕비는 자매(姉妹)로 태조 왕건의 일곱째 아들 욱(旭. 戴宗으로 追尊)의 딸이다. 그러므로 경종(景宗)과는 친사촌간이 되는 사이다. 고려왕시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혈족혼(血族婚)이 대대로 행하여져서 근친혼(近親婚)은 상례가 되었고, 이로 인해 좋지 못한 일도 많았다.   두 왕비의 실질적인 성(姓)은 왕씨(王氏)이지만 황보씨(皇甫氏)라 일컬었던 것은 내향(內鄕)의 성씨를 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경종은 헌애왕후 소생인 아들 송(誦, 뒤에 7代 穆宗)을 두고 죽으니 두 자매 왕후는 청상(靑孀)의 몸이 되어 1비는 궁안에서, 2비 헌정왕후는 궁밖의 사제(私弟)에 나와 거처하였다. 왕자가 어려서 왕위는 경종의 종제(從弟) 즉 왕비의 오빠 치(治. 戴宗의 둘째 아들)로 하여금 계승케 하니 이가 6대 성종(成宗)이다.   1비 헌애왕후는 아들 송(誦)이라도 있었지만 2비 헌정왕후는 고독하기만 했고 너무도 할 일이 없어 무료(無聊)한 세월만 보냈다. 그러니 숙부 욱(郁)의 집에 자주 가게 되고 욱은 왕비인 조카딸이 짝 잃은 외기러기가 되어 찾아오니 그 정상이 가련하여 감싸준다. 욱은 태조의 막내아들로 영명(英明)한 왕자였고 재주가 비상하였는가 하면 활달한 장부였다.   지체로 보아서는 욱은 왕실의 종친(宗親)이요, 그녀(헌정왕후)는 현왕의 누이요, 전 경종비였으니 두분의 행동범절이 비상해야하거늘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고, 다만 욱과 더불어 있는 것만이 삶을 의미했다.   하루는 그녀가 꿈을 꾸는데, 곡령(鵠嶺)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니 나라 안에 넘쳐흘러 모두 은빛 바다를 이루었다. 이상한 꿈도 꾸었다 생각하고 점을 쳐 보았더니 “아들을 낳아 한 나라의 왕이 될 것이다” 하므로 비(妃)는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랴” 하였다.   근친혼의 폐해가 이들 사이의 거리를 좁혔을는지 모를 일이나 전 경종비라는 체통을 위해서도 수절(守節)해야 할 처지요, 욱은 종친으로서의 법도를 벗어날 수 없었겠지만 이미 이들에게는 불륜(不倫)이 싹트기 시작하여 한 남자와 한 여인이 있을 뿐이었다. 후에 욱이 드디어 비(妃)와 관계하여 아기를 배었으나, 사람들이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어느날 비가 욱의 집에 유숙하게 되었는데 집안 사람들이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한창 맹렬할 때 성종이 빨리 가서 물어 그 까닭을 알아본즉, 욱이 난륜(亂倫)의 죄를 범했으므로 그를 귀양보내었다. 이때가 앞서 말한 성종 11년(002) 가을 7월의 일이다.   한편, 비 황보씨는 자기 사제로 돌아와 겨우 문에 이르자 산기(産氣)가 있어 문 앞의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아이를 낳고는 죽었다. 왕이 보모(保姆)를 가려서 그 아이를 길렀다. 아이가 2세가 되었을 때 왕이 불러 보니 보모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아이가 왕을 쳐다보고 “아버지” 하고 부르며 무릎 위에 올라와서 옷깃을 움켜잡고 또다시 “아버지” 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왕(성종)은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리면서 “아이가 아버지를 생각하는구나”하고 이에 보모(保姆)를 딸려 관원들로 호위하여 사수현으로 보내어 숙부(叔父)인 욱에게 돌려주었다. 이 아이가 곧 순(詢)으로 자라서 뒤에 8대 현종(顯宗)이 된다.   보모에 안겨서 머나먼 사수땅에 내려 온 순(詢)은 앞서 말한 대로 이곳 배방절(排房寺)에서 살게 되니 이로부터 부자상봉(夫子相逢)의 날은 쉽게 왔다. 한편 유수(流囚)의 몸인 욱(郁)에게는 보모의 품에 안겨온 아들 순이 얼마나 보고팠으며 또 귀엽고 반가왔겠는가. 그러나 왕명으로 죄인과의 동거(同居)는 불허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와 아들이 만나는 것을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적소(謫所 : 현 사남면 화전리로 추정)에서 대산(垈山)의 배방사까지는 지금의 능화(陵花)마을 뒷산을 타고 내려 학촌(鶴村)을 거치면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다. 체념과 순명(順命)의 왕자 욱은 비록 죄인의 몸이지만 배방절의 아들 순을 만나보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고 귀양살이 했다. 그런대로 세월은 흘러 순(詢)의 나이 다섯 살 되던 해인 병신년(성종 15, 996년) 7월 욱(郁)은 귀양온지 만 4년만에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가 죽은 후에 생겨난 지명이 능화봉(陵華峯)이요, 고자봉(顧子峯) 또는 고자실이다. 이 중에 능화봉은 현 사남면 우천리(牛川里) 능화(陵花)마을 동남쪽에 자리한 묏부리로 욱(郁)이 묻힌 산봉우리이다. 풍수지리(風水地理)에 밝았던 그는 생전에 자신이 죽으면 묻힐 묘자리를 봐 두었던 것으로, 묘자리가 하도 좋아서 그가 죽을 때 아들 순(詢)에게 “서낭당(城隍堂) 남쪽 귀룡동(歸龍洞)에 반드시 복시이장(伏屍而葬)하라”는 유언을 남겼던 것이다.   ‘伏屍而葬’이란 죽은 시신을 엎드리게 하여 묻으라는 뜻이며, 이 말은 묘자리의 영험이 보통 20년 후에 나타나는 반면 시신을 엎어서 매장하면 칙감(則減) 10년에 그 효험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훗날 그의 아들 순(詢)이 고려의 8대 왕위에 올라 임금으로서의 영화(榮華)를 누린 것만은 분명하다. 그래서 욱이 묻힌 산을 능화봉, 산아래 마을을 능화촌(뒤에 陵花로 바뀜)이라 했다.   고자봉(顧子峯)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능화마을에서 학촌으로 넘어가는 능선 경계지점에 있는 봉우리이다. 이 산마루에 올라 북쪽을 바라보면 멀리 아들 순(詢)이 살고 있는 배방절이 훤히 바라다 보인다. 욱(郁)은 배방절에 가서 아들을 만나보고 돌아올 적에는 반드시 이 산꼭대기에 올라 아들 있는 곳을 물끄러미 뒤돌아 보았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 고자봉이다. 따라서 이 봉우리 밑에 있는 마을을 고자실(顧子谷)이라 한 것이다.   고자실의 ‘고자’는 음운상 여러 가지 뜻을 지니고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고자(鼓子)이다. 이는 생식기(生殖器)가 불완전한 남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언제부턴가 음훈(音訓)이 다른 옛 ‘고(古)’자와 스스로 ‘자(自)’자를 따서 엉뚱하게 <古自谷>이라 일컬어 온 것이다.   이처럼 본래의 顧子谷이 古自谷으로 변천되어 오늘날의 학촌(鶴村)이라 불리우게 된 것은, 1914년 행정구역 병합때부터이다. 학촌이란 지명 유래는 학정동천(鶴頂洞天) 고자양곡(古自暘谷)이라 새겨 놓은 동비(洞碑. 1987년 건립)에서와 같이 부락 앞에 솟은 산이 학(鶴)의 형국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산을 학산(鶴山)이라 하는데 학산 아래 있는 마을이란 뜻이다.   학산과 관련하여 이 고장 출신의 선비 하응표(河應杓. 1718~1786)란 분의 시(詩)에, “양곡죽림구몽미(暘谷竹林舊夢迷) 학산고용수서류(鶴山高聳水西流) 유어시약맹구집(遊魚時躍盟鷗集) 가능종사사빈루(可能終使泗濱樓)”라 했는데 풀어서 보면, ‘해돋는 산골 죽림에 옛꿈이 아득하고, 학산은 높이 솟아 물은 서쪽으로 흐르도다. 노는 고기 때때로 뛰놀고 갈매기는 모여드니 가히 능히 사빈다락에서 한평생을 마치겠도다’라고 읊었다.      • 새마을 훈.표창(勳.表彰) 마을   1970년대부터 요원(爎原)의 불길처럼 일어났던 새마을운동은 빈곤의 악순환(惡循環)이 거듭되는 가난의 굴레를 박차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한 운동으로서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잘 사는 부강(富强)한 나라를 만들기 위한 거족적인 조국 근대화운동이며 한국민족의 일대 약진운동이라 하겠다.   한국의 농촌이라면 어디라 할 것 없이 다 그렇했듯이 이 마을도 여느 마을 못지않게 근면, 자조, 협동의 새마을정신으로 1970년대부터 이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부락 및 가정환경면과 문화시설면, 그리고 소득증대면에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온 것만은 사실이다.   새마을 훈.표창(勳.表彰) 마을인 학촌부락이 70년대 이후 이룩한 성과를 부문별로 요약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정신개발 부문으로는 근면, 자조, 협동하는 새마을정신의 생활화와 근검, 절약 저축하는 생활을 하도록 계도(啓導)하였으며, 마을주민 총회의 운영과 협동조직에 힘썼고,   ② 환경개선 부문으로는 취락구조 개선 시범마을을 지정받고, 동민들의 자조협동 정신과 당국의 재정적 지원으로 지붕 및 주택을 과감히 개선하고 마을 길 넓히기와 포장(1,000m) 및 하수구와 소하천(500m)을 정비하였으며, 특히 대통령의 특별하사금(150만원)과 동민의 공동노력(150만원)으로 1977년에는 마을회관이 70평 대지위에 건평 20평의 슬라브 건물로 들어섰고, 어린이 놀이터를 설치하였을뿐 아니라 급수시설과 산도(山道)를 새로이 단장하는 등 환경개선 부분에 역점을 두었으며,   ③ 소득증대 부문에 있어서는 전통 미맥(米麥)생산 외에 주위의 산지를 개발하여 밤, 단감의 과원을 조성하였으며, 일찍이 1969년에는 특별지원금(융자금) 500만원(한우 마리당 67,000원)으로 회원 70명이 참여하는 목야지(牧野地) 70ha의 단지(團地)를 조성하여 한우 비육(肥育)사업에 힘썼으며, 이 후 학우회(鶴友會)가 새로히 조직되어 지금은 도청 소재지인 창원시(昌原市)에 한우쇠고기 직판장을 낼 만큼 발전하였다.   따라서 1982년에는 경상남도가 지정한 학촌 새마을 기계화영농단이 발족되어 전통영농의 미맥생산에 기여하고 있으며, 생산비의 절감으로 300평당 쌀 440kg 이상으로 신장했을 뿐 아니라 보리생산 부문에서는 학촌단지가 1995년도 전국 최우수 보리단지로 뽑혀 회장 진지현(陳지鉉)은 농림수산부장관 표창과 함께 시상금 500만원을 수상하는 등 영예를 안았다.      이러한 모든 성과는 그 동안 온 동민이 한마음이 되어 이장(里長)과 지도자들의 헌신적인 노력과 열정적인 지도로 이룩한 결과였다. 모두가 근면, 자조, 협동하는 가운데 생활주변에서 가난을 추방했고, 풍요한 마을을 만들 수 있었으며 상부상조하고 협동함으로서 침체와 낙후되었던 마을이 의욕과 활기에 넘친 마을로 변모되어 갔다.   이에 힘과 자신을 얻은 마을 사람들은 새마을운동은 잘살기운동이며 잘산다는 것은 모두가 넉넉한 풍요와 함께 정신적으로도 건전하고 품위있는 안정된 문화 생활을 추구하는 것임을 굳게 믿고, 오늘도 쉬지 않고 열심히 땀흘리고 있다.      • 동수(洞藪)   학촌부락의 어귀, 하늘을 가린 우람한 잡목들로 이루어진 숲이 있다. 쭉쭉 뻗어 올라간 이팝나무(주민들은 稀貴木이라 함)와 억세고 육중한 등걸을 한 포구나무들이 서로 힘자랑이라도 하듯 힘찬 팔뚝들을 서로 엇걸고 수많은 잔가지들마다 푸른 잎들을 총총 달아 두터운 그늘을 만들고 있다.   황량(荒凉)한 들판을 바라보며 마을을 감싸안은 푸른 동수(洞藪)들은 지나간 그 옛날의 숱한 사연을 간직한 채 늠름히 둘러서서 세월을 짓씹고 있다. 500년 또는 600년이 실히 넘는 이팝나무 등 그루가 억센 둥치의 느티나무와 어울려 울창한 숲을 이루고 오랜 세월을 버티어 오면서 겨울에는 설한풍(雪寒風)을 막아주고 여름에는 시원한 휴식처가 되어 줄 뿐 아니라, 아늑한 학촌부락의 경관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고 있다.   희긔목이라 일컫는 이팝나무는 물푸레나무과(木犀科)의 교목(喬木)으로서 잎은 둥글고 넓은 타원형 혹은 둥근 타원형으로 봄철에 빛이 희고 향기로운 꽃이 핀다. 한창 필 때에는 눈이 쌓인 듯한데, 동민들은 이를 맥령화(麥嶺花.보릿고개 때 피는 꽃이라 하여)라 한다. 또한 멀리서 바라보면 나뭇가지에 마치 헌 두더기(포데기)를 두른듯 하다 하여 헌두더기나무라고도 불리운다. 뿐더러 잎이 무성하고 꽃이 잘 피었을 때는 딸애집에 가지말라는 우스갯말이 나왔다. 이 말은 나무와 관련하여 이 해에는 풍년이 든다는 뜻이 담겨있다.   그런데 이팝나무 두 그루중 하나는 언제 보아도 정겹게 느껴지는 이 숲은 학촌부락의 상징이기도 하여 객지에 나가 사는 사람들이 고향을 그려볼 때 항상 눈앞에 삼삼거리는 정감(情感)이 담긴 나무숲이다.

  • 배나무골(梨洞.梨谷)   학촌부락에 딸린 마을로 학정산(鶴頂山) 맨 끝자락 동쪽에 있다. 산골짜기에 이런 이름의 마을이 전국적으로 수없이 많다. 배골, 뱃골, 배고개(梨峴, 梨峙)니 하는 땅이름은 단순히 배나무와 관련지어 이름풀이를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배골, 뱃골, 배나무골 등은 ‘골짜기 마을’이란 뜻이고 배고개, 배재니 하는 것은 ‘산을 넘는 고개’의 뜻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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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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