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8. 감곡리(甘谷里)

  정동면(正東面)의 10개 법정이동(法定里洞)중의 하나. 사천읍에서 동쪽으로 7km, 면 소재지인 대곡에서 3.5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북으로는 진주시 금곡면(金谷面)과 경계를 이루는 봉대산(鳳臺山)의 주능선(主稜線)이 파도처럼 서향으로 뻗어 있고, 남으로는 동서로 뻗어나간 사~고선(泗固線)과 사천강의 상류를 바라보면 학촌리와 소곡리에 인접해 있다. 동으로는 역시 봉대산의 산줄기가 남으로 흘러 내려 고성군의 영오면(永吾面)과 상리면(上里面)의 일부와 경계하고, 서쪽으로는 면의 중앙부가 되는 장산리의 대산부락과 마주 해 있다.   사천시의 동쭉에 자리한 정동면을 둘러싼 지형은 흡사 거대한 무소(犀)나 또는 멧돼지(山猪)의 몸체 모양으로 생겼는데 감곡리는 이 짐승들의 엉덩이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감곡리도 정동면의 대곡, 장산, 학촌, 소곡리 등 동부지역 4개리와 함께 본래 사천군 동면(東面)의 지역으로서 감실(甘實) 또는 감곡동(甘谷洞)이라 했는데, 1914년 4월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복상동(伏象洞) 수리골을 병합하여 감곡리(甘谷里)라 해서 읍(정)동면에 편입, 오늘에 이르렀다.   감곡리를 구성하는 행정이동(마을)으로는 복상고 감곡의 두 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여느 이동(里洞)보다 골이 많다. 복상은 크고 작은 두 진영골을 비롯하여 복상골, 수리골(守理谷)이 있고, 복상에서 감곡으로 가는 산길 따라 북동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골 안땀이 나타나며 이른바 노싯골, 도오샘골, 대아골(坮厓谷), 배나뭇골, 정치나뭇골, 신덕골, 소뎅이골, 큰뒷골 등의 산골이 있다. 이같이 땅이름이 말하듯 면내에서 가장 골짜기가 깊고 산골이 많으며 뭇산으로 중첩되어 있는 지역이다.   감곡리(甘谷里)란 명칭은 다섯가지 맛(五味) 중의 하나인 ‘감(甘)’은 보통 ‘달다’는 감시(柹, 赤實果)의 단감과 관련지어 이름 유래를 말하고들 있지만, 대개는 ‘큰마을’, ‘중심 마을’의 뜻에서 나온 것이라 풀이하고 있다. (부락명의 유래 참조)

(1) 복상(伏象)부락의 연원(淵源)   지금으로부터 약 280년전 그러니까 서기 1715년경 삭녕최씨(朔寧崔氏) 6파 중의 하나인 감곡파(甘谷派) 일가가 풍정에서 제일 먼저 입향(入鄕)하여 토지를 개간하고 삶의 터전을 잡아 정착(定着)하였다고 한다. 그후 은진송씨(恩津宋氏), 사천이씨(泗川李氏)가 입향하고 이어서 金氏, 許氏, 高氏, 朴氏, 沈氏, 呂氏, 全氏 등이 차례로 입주하여 촌락을 형성해왔다.   현재 총 가구수 42세대에 130여 명이 살고 있으며, 대단위 화훼단지와 산지를 개발하여 밤, 단감 등의 과원이 잘 조성되어 농가 소득을 크게 올리고 있는 마을이다. • 부락명의 유래   대산 부락앞 국도에서 왼손편 산길 따라 속칭 도리산 모롱이를 지나면 양지바른곳에 마을이 나타난다. 마을을 둘러 있는 뒷산이 흡사 거대한 코끼리가 엎드려 있는 형국이라 하여 복상(伏象)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 수리골(守理谷)과 서당(書堂)시절   이치와 도리를 지킨다는 뜻의 수리골은 복상부락 북쪽에 있는 아담한 골짜기로 몇 안되는 은진송씨(恩津宋氏) 일가가 오순도순 모여 살고 있다. 마을 안에는 수은(守隱) 송헌창(宋憲彰) 선생을 추모(追慕)하기 위해 후손들이 세운 영모재(永慕齋)가 있으며, 이로 인해 수리재골(守理齋谷)이라고도 일컫는다.   수리재는 옛날에 송수은 선생이 한학문(漢學問)을 가르쳤던 유지(遺址)로 그 터에다 재실(齋室)을 지어 인근 한학자들이 모여 제사를 지낸다.   이 조그마한 산골에 정착한 선인(先人)들은 밭을 일구고 산지를 개간하는 한편 후학(後學)들에게 한문을 장려하는데도 여타부락 못지 않게 관심을 기울였다. 터를 잡고 초가삼간(草家三間)일 망정 글방을 마련 서당을 열고 후생(後生)들에게 글공부를 가르치는데 열을 올렸던 것이다. 그래서 조그만 산골일망정 글을 읽은 분이 많았다는 것이다.   서당에서는 한문(漢文) 수학(修學)의 첫 입문서(入門書)인 천자문(千字文)을 시작으로 동몽선습(童蒙先習), 명심보감(明心寶鑑), 통감(通鑑) 등을 가르쳤으며, 사람으로서의 도의(道義)인 경로효친(敬老孝親)과 충효(忠孝)사상을 함양하는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대개의 서당은 신학문(新學問)이 들어오고 또 일제(日帝)때 일면일교(一面一校)인 정동공립보통학교가 설립(1931년)되면서 문을 닫게 되었는데, 수리재의 서당 교육은 그 후에도 한참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당시 송수은(宋守隱)선생 밑에 글공부를 배우던 제자들 중에는 이진관(李鎭灌, 만마), 류승천(柳承天, 대산)씨가 아직도 살아 계신다. 부락 어귀에는 수은처사 은진송공기적비<守隱處士恩津宋公紀蹟碑>가 1993년 후학들에 의해 세워졌다.

(2) 감곡(甘谷)부락   복상에서 산도(山道) 따라 동쪽으로 깊숙이 들어가면 두 갈래의 실개천이 나타나고 다시 북향으로 조금 가면 들판을 이룬 깊은 골짜기가 나타난다. 여기가 바로 감곡리의 중심부락이다.   정동면의 북쪽 주봉(主峰)인 봉대산에서 비롯된 여러 산등성이가 완만한 비탈을 이루면서 내려 온 갈래가 난 산줄기가 중첩돼 있어 곧 안땀을 비롯해 노싯골, 대아골 등 여러 골짜기를 형성해 놓았다. 평화롭고 아름다운 산골에 잔잔한 호수처럼 맑은 소류지(小溜池)가 세 곳이나 되며 올망졸망 층계를 이루며 산비탈에 앉은 형형색색의 집들이 매우 정겨웁게 느껴진다.      • 부락의 연원(淵源)   감곡 부락도 면내 여타 부락과 마찬가지로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하였는지 기록이 없어 알 길이 막막(漠漠)하기만 하다. 그러나 고로(告老)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약 350년전(서기 1645년경) 연안차씨(延安車氏)와 장흥마씨(長興馬氏) 일가가 어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곳 산간오지(山間奧地)에 들어와 살았다는데 대(代)를 이어 살지 않고 어디론가 떠나버렸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성시 중 차씨(車氏) 선조(先祖)의 묘소(墓所)가 있어 지금도 후손들이 해마다 성묘(省墓)를 하고 간다는 것이다.   車氏, 馬氏 이후 진주강씨(晋州姜氏), 청풍공파(淸風公派) 일가가 의령(宜寧)에서 입향(入鄕)하여 현재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으며, 이어서 밀양박씨(密陽朴氏), 진주정씨(晋州鄭氏), 신안주씨(新安朱氏), 영양천씨(穎陽千氏), 밀양손씨(密陽孫氏), 여양진씨(驪陽陳氏), 삭녕최씨(朔寧崔氏) 순으로 입주(入住)하여 촌락을 이루어 내려 왔는데, 오늘날 40여 가구가 살고 있다.      • 부락명의 유래   조선 7대 세조가 병을 고치려 강원도 양양(襄陽) 낙산사(洛山寺)에 거동했을 때 근처 동천(銅川, 眞水)의 물을 마시고 ‘달다’고 칭찬해서 이 샘이 있는 마을을 ‘감동골(甘洞谷)’이라 불려왔다고 한다. 그 곳이 지금의 양양읍 감곡리(甘谷里)이다.   ‘감골’, ‘감실’의 감(甘)은 앞에서도 말했듯이 보통 ‘달다’나 적실과(赤實果)의 ‘감(柹)’과 관계지어 이름 유래를 말하고들 있지만, 대개는 ‘큰마을’, ‘중심마을’의 뜻에서 나온 것이다. 감곡(甘谷)은 이곳과 강원도 양양 외에도 충북 음성, 충남 논산, 경북 여주와 영일 등에 깔려 있고, 감리(甘里)는 창녕군 고암면에 있다.   ‘골’은 더러 평지(平地) 마을에 붙기도 하나 ‘실’은 대개 골짜기 마을에 붙는다. 따라서 ‘감실’이라고 하면 그 자체가 큰 골짜기를 뜻하지만 그런 곳에 위치한 마을 역시 같은 이름을 얻는다.   이런 과정에서 볼 때 감골, 감실은 감곡(甘谷), 시동(柹洞) 등의 한자로도 옮겨 갔슴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곳 지명의 유래를 말할 때 가난한 사람들이 이곳 깊은 산골에 들어와 비옥(肥沃)한 토지와 산지를 개간하여 감나무를 많이 심어 생계(生計)를 도모하였기 때문에 감실(甘實)이라 했다는 것은 엉뚱한 지명 유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 감곡소류지(甘谷小溜池)   감곡은 산수가 좋고 산림이 울창하다. 산자락 밑을 구불구불 감돌아 흐르고 있는 시냇물을 가두워 만든 세 곳의 저수지는 골안 기름진 옥답(沃畓)의 젖줄이 되어 주고 있다.   골짜기를 따라 논들이 일구어져 있으며 몽리면적(蒙利面積)만 해도 약 51.0ha(감곡 26.3, 복상 24.7ha) 정도 된다. 몽리(蒙利)란 물의 혜택을 입는다는 뜻이다.   소류지란 작은 저수지인 보(洑)를 말하는 것으로 관개용(灌漑用)의 물을 하천이나 계곡(溪谷)물을 끌어들여 담아놓은 못(池)을 가리킨다. 곧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오묵 들어간 산 밑에 둑(堤防)을 쌓고 흐르는 냇물을 막아두는 봇물이다.   1960년대에서 197년대에 걸쳐 만들어진 이 세 곳의 소류지는 명경지수(明鏡止水)와 같은 맑은 물이 항상 넘실거리며 아래에 있는 많은 논들의 젖줄 구실을 하며 이중에 대아골(坮厓谷) 소류지가 가장 크다.      • 안산(案山)   감곡 앞쪽에 솟아 있는 산마루를 안산이라 불러오고 있다. 옛날부터 이 산을 <안산>이라 한 것은 산의 형국(形局)이 풍수지리(風水地理)상 이른바 안산(案山)에 해당하는 지상(地相)이기 때문이다.   안산이란 집터나 묏자리의 맞은 편에 있는 산을 말하는 것으로 청룡(靑龍), 백호(白虎), 주산(主山)과 함께 풍수학상 4요소의 하나이며 여러 산이 중첩하여 있을 때에는 내안산(內案山), 외안산(外案山)으로 구별한다. 부락이나 묘지에 안산이 있었듯이 주군도읍(州郡都邑)에도 주산과 안산이 있었다. 사천의 경우 옛 읍기(邑基)가 풍정리 남쪽에 있을 때 주산은 현 부봉산(浮蜂山)이었고, 안산은 지금은 없어진 옥산(玉山)이었다. (삼성항공 사원아파트 자리)      ㅇ 호랑이 춤추는 바우<바위> : 감곡 서쪽 정치나무골 위에 있는 우람한 바위로 학촌에서 보면 범이 춤을 추는 형상같다 하여 호랑이 춤추는 바우(虎舞岩)라 일컫는다. 산골이 깊고 수림(樹林)이 울창하여 옛날에는 맹호출림(猛虎出林)하여 서산을 향하여 포효(咆哮)하는 일이 많았다고 전한다.   ㅇ 국시당산<산> : 감곡 동쪽에 수림이 울창한 산으로 태고(太古)적 해일(海溢)이 일어났을 때 산등성이까지 물이 찼다는 전설이 전하고 있다.   ㅇ 뱃나뭇골<골> : 감곡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부터 이곳에 돌배나무가 많이 있었다는 데서 유래된 지명이다.   ㅇ 불당골<산> : 감곡 남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이름모를 절이 있었다 하여 불당골 또는 불곡산(佛谷山)이라 하였다.   ㅇ 참새밋골<마을> : 감곡 어귀에 있는 조그만 마을, 맑은 샘이 있다는데서 붙여진 지명   ㅇ 익사재(益四齋)<서당> : 복상부락에 있던 서재서당. 최춘암(崔春岩) 유고에 기재돼 있으나 지금은 흔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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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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