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시 : 첨단 항공 산업의 메카 > 정동면지



정동면지

7. 장산리(獐山里)   높푸른 창공(蒼空)을 향하여 제각기 우람하게 솟은 두 개의 산(千金山과 尼丘山)이 하나는 북동쪽에 하나는 남서쪽에 자리잡아 서로의 자태를 뽐내는 듯 마주 해 있고, 두 산 사이로 골안의 들녘과 둥그스름한 고운 용소산(龍沼山) 아래로 사천강이 감싸 흐르니 마치 노루목처럼 기묘한 형상을 한 법정이동(法定里洞)이다.   정동면의 거의 중앙부에 위치하고 북쪽은 봉대산으 산줄기가 서북향으로 뻗어 내려 그 주능선을 경계로 진주시 금곡면(金谷面)과 인접해 있으며, 동쪽은 감곡리와 학촌리, 남쪽에는 역시 본면 주봉(主峰)인 흥무산의 산줄기 하나가 갑자기 서쪽으로 내달아 용트림 하듯 높게 솟은 이구산을 경계로 사남면 우천리, 서쪽에는 대곡리와 수청리가 자리잡고 있다.   장산리도 다른 이동(里洞)과 함께 본래 사천군의 동면(東面)에 속해 있다가, 1914년 4월 군면(郡面) 행정구역 폐?에 따라 장천동(獐川洞), 대산동(垈山洞), 배방동(排房洞), 복상동(伏象洞) 일부를 병합하여 장천동의 <獐>자와 대산동의 <山>자를 따서 <獐山里>라 하여 읍(정)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장산리를 구성하는 자연부락(행정리동)으로는 면 소재지인 대곡리에서 동쪽으로 청널땀 언덕넘어 노천교(魯川橋)를 지나면 왼손편 용소산 아래 바깥놀내(外魯川)가 나타나고, 다시 오른쪽 산길을 오르면 이구산 산자락을 깔고 앉은 안놀내(內魯川)가 있으니 두 마을이 노천이다. 또 청널땀 언덕에서 왼쪽으로 꺾어들어 청법산 벼랑 밑을 지나면 건점(乾占)이란 조그마한 마을이 나타나고 더 위로 올라가면 가파른 천금산 아래에 이른바 몽대(夢垈)라고 하는 마을이 자리해 있다. 이 두 촌락 역시 장산리에서 으뜸되는 대산(垈山)부락이다.   장산리의 장산을 ‘놀미’ 또는 ‘놀뫼(獐山)’라고도 하는데 본래는 ‘노루내’ 혹은 ‘놀래(獐川)’에서 비롯된 땅이름이다. 지형이 노루(獐)의 목덜미처럼 생겼거나 노루가 많다고 해서 ‘노루목’이란 땅 이름이 나왔다고들 한다. 그러나 ‘너른 목(廣谷)’, ‘느린 목(緩斜地)’, ‘막다른 산마루’ 등의 뜻으로 붙여진 경우도 많음은 물론이다.   정동면(正東面)의 지형은 대체로 장방형(長方形)을 하고 있으며, 남북으로 갈라진 두 내맥(來脈)이 동쪽에서 서향으로 길다랗게 두르고 있다. 이 가운데 장산리는 그 중심이 되는 지역으로서 이동(以東)은 산고곡심(山高谷深)하여 골안이 협소(狹小)하고 이서(以西)지역은 갑자기 선상형(扇狀形)의 광활(廣闊)한 들녘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두 분계점(分界點)의 목에 해당하는 지점이 장산리의 노천(魯川) 부락이며, 예전에는 장천(獐川)이라 하여 지금도 흔히 ‘놀래’라 일컬어 온다.   장산리는 향토사적(鄕土史的)으로 고려 현종(顯宗 제8대 임금)이 유년(幼年) 시절을 보낸 유서(由緖)깊은 곳이기도 하다. 현종은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이곳 배방절(排房寺)에서 보냈는데, 어느 하루에 절 난간(欄干)에 오른 꽃뱀 새끼를 보고 “때가 오면 하루에 용이 되어 하늘에 오를 것을” (一日成龍也不難)라고 읊은 그의 아제시(兒題詩) 한 구절이 상기(想起)되어 세월은 흘러도 소리는 남아 있슴을 느끼게 한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義兵將)으로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장군과 더불어 왜적을 무찔러 용맹(勇猛)을 떨친 무열공(武烈公) 주몽용(朱夢龍) 장군의 출생지(夢垈)이기도 하다.

<고 인 돌>

  이 유서깊은 고장에 언제부터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것일까? 앞서 말한대로 장산리는 사천강의 중류(中流)에 위치하여 상류쪽의 학촌, 소곡리와 함께 선사유적(先史遺跡)이 많은 지역이다. 그것은 노천 부락에 ‘지석골(支石谷)’이란 땅이름과 함께 동구(洞口) 밖 들녘과 대산 부락 언덕빼기에 흩어져 있는 고인돌(支石墓)이 이를 말해 준다.   고인돌이란, 우리나라 고고학(考古學)에서 말하는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의 무덤 유구로서 조성시기는 민무늬토기(無文土器)가 출현하고부터 철기(鐵器)가 출현하기 직전까지의 시기 즉, B.C. 1000년경부터 B.C. 300년경까지 라고 한다. 이렇게 볼 때, 장산리는 청동기시대부터 이미 사람들이 들어와 살았다는 선사시대의 발자국인 셈이다. 그런데 이 고인돌은 농경지를 일구거나 또 경지정리를 하는 과정에서 거의 대부분 파괴되고 말았으니 참으로 아쉬운 일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일정(日政) 때인 1917년경 당시 고고학자(考古學者)로 유명한 도리이 류조(鳥井龍藏)란 사람이 이곳 일대를 조사한바 있다고 하며, 1930년대에 논밭을 일구면서 많은 유물이 수습(收拾)되었다고 한다. 출토된 유물로는, 붉은간토기(舟塗磨硏土器, 紅陶)와 여러 형태의 민무늬토기(無文土器), 그리고 길이 90cm가량의 돌칼(石劍)과 살촉(石鏃)등이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청동기시대라고 해서 고도의 합금술(合金術)이 요구되는 청동제품이 생산되는 것은 아니라고 하며 극히 제한된 지역외는 대개 석기류와 토기류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 장산리의 유물도 예외가 아니어서 여태까지 출토된 유물 가운데 청동제품이 발견된 적은 아직 없다. 가가운 예로는 지금부터 25년전 김상조(金相朝) 군수 당시, 대산부락에서 밭을 논으로 만들기 위해 작답(作畓)할 무렵 역시 청동기시대의 유물로 추정되는 돌칼, 살촉, 토기류가 많이 출토되었는데 보고를 받은 군에서 모두 수습해 간적이 있다.   이처럼 장산리의 유적과 유물은 일찍이 선사인(先史人)들이 이 고장에 들어와 삶을 누렸다는 발자취이며, 한 생(生)을 마감한 ‘죽은 이’들의 무덤이자 보금자리인 것이다. 따라서 오랜 세월동안 우리의 선인(先人)들 역시 대대손손(代代孫孫)이 물 맑고 햇빛 따스하며 살기 좋은 곳이에, 삶의 뿌리 내려 우거진 덤불과 돌밭을 헤쳐 논밭을 일구고 기슭에 샘솟는 먹을 물과 땔감을 얻고 여러 종류의 다양한 식물을 채취하며 억세게도 살아왔으리라 여겨진다.

(1) 노천(魯川) 부락   정동면 소재지 대곡과 인접과 큰땀(外魯川)과 안땀(內魯川)으로 형성된 두 개의 취락마을. 동쪽으로 노천교를 건너 들길따라 좌우로 6~700m 거리에 있다.   큰땀 뒤에는 용머리(龍頭)처럼 생긴 산등성이 아래 깊은 소(沼)가 있다 하여 용소산(龍沼山)이라 일컬으며 6.25때 격전지였고, 안땀 뒤로는 높고 힘차게 뻗어 나간 이구산(尼丘山)의 산줄기가 시공(時空)을 초월한 채 의연(毅然)하게 둘러 있고, 가파른 산자락 아래로 깊고 아늑한 골짜기가 펼쳐져 있어 들판으로 활짝 열린 앞들 냇가로 집들이 오순도순 터를 잡았다.   우리나라 촌락은 들(野)과 내(川), 그리고 산지(山地)가 서로 만나는 곳에 자리 잡는다는 이른바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했다던가. 동과 남으로 산지를 등지고 각기 남서(南西)와 북향(北向)의 기슭에 입지(立地)한 두 촌락은 옛날부터 미맥(米麥)을 위주로 한 전형적 농촌마을이었으며 앞 들에 굽이쳐 흐르는 냇물과 골짜기의 시냇물은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따라서 오랜 세월동안 주민들의 끈질긴 노력과 개척정신은 일찍이 산지 개발에 힘 쓴 결과 지금은 밤(栗)과 단감의 과원(果園)이 잘 조성되어 면내 여느 마을 못지않게 소득높은 마을이면서 살기좋은 전원(田園)마을로 변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마을사에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면(東面)과 상주내면(上州內面)이 하나로 합쳐졌을 때 면소재지는 고읍이었고, 경찰파출소(警察派出所)인 주재소(駐在所)와 일어강습소(日語講習所)가 노천부락 큰땀에 있었다. 따라서 1920년경 개통된 사.고선(泗川~固城線)의 국도가 지금은 청법산(淸法山) 벼랑밑을 우회(迂廻)하지만 그 당시에는 노천 부락(큰땀)을 경유하여 대산 부락 앞을 통과하였다.   그러다가 1920년대 말경 어느 해인가 대수(大水)로 인해 노천 부락 진입로의 목교(木橋)가 유실되고 교통이 두절되자 곧 주재소는 대곡으로 이전해 갔고, 강습소는 1931년 정동공립보통학교가 설립되어 역시 문을 닫았다. 그리고 고읍에 소재한 면소는 1934년 최도경(崔道卿)면장 당시 대곡숲으로 옮겼던 것이다.

• 부락의 연원(淵源)   시석골(支石谷)이라 일컫는 땅이름이 말해 주듯이 옛날에는 남방식(南方式) 고인돌(支石墓)이 많이 있었던 곳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아득히 먼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사람들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다는 것 만은 분명하다. 하지만 본 노천부락도 여느 마을과 마찬가지로 이땅에 언제, 누가 어떻게 하여 살러 들어왔는지는 정확하고 소상히 알아내기가 힘들다. 다만 구전(口傳)에 의거하여 부락연원을 짐작할 수 밖에 없는데, 옛 고로(古老)들의 말에 의하면, 노씨(魯氏, 密陽), 주씨(朱氏, 新安), 문씨(文氏, 南平)등의 성씨(姓氏)가 들어와 살았다고 전해질 뿐 후손들이 없기 때문에 알 길이 막막하다.   현재 거주하고 있는 각 성씨의 문중기록(족보)에 의하면, 임진왜란이 끝난 후 적어도 약 400년전 경주이씨(慶州李氏) 일가(一家)가 처음으로 입향(入鄕)하고 이어 순서는 확실치 않으나 진주하씨(晉州河氏), 강릉김씨(江陵金氏), 삭녕최씨(朔寧崔氏), 김해김씨(金海金氏), 합천이씨(陜川李氏)의 순으로 입주하여 부락을 형성해 나갔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위의 여러 집안의 자손들이 불어나고 그 외 많은 성씨들이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등 변천을 거듭해 왔는데, 현재 거주하는 가구수는 총 46세대에 160여 명이 오순도순 좋은 일, 궂은 일 할 것 없이 서로 믿고 서로 돕는 미풍(美風)을 지니고 한 일가처럼 살아가고 있으며, 김씨(金氏), 이씨(李氏) 최씨(崔氏)의 세 성씨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 부락명의 유래   문헌에 따르면 1912년 당시 본면의 전신(前身)이던 동면(東面)에는 16개의 동(洞)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장천동(獐川洞)이다. 오늘날의 노천(魯川)부락.   장천이란 지형의 모양새가 마치 노루의 목처럼 생겼다는 뜻에서 붙여진 땅이름이며 게다가 내가 흐르니 ‘노루내’ 또는 ‘놀내’ 라고 일컬었다는 것이다. 그후 1914년 행정구역 폐합때 장천의 노루(獐)자와 대산의 뫼 산(山)자를 취해 ‘獐川里’라 한 것은 이미 전술한 바와 같다.   <사천읍지>(1832년 간행) 산천조(山川條)를 보면, 이구산(尼丘山)은 현(縣, 邑基)의 남쪽 8리(里)에 있고, 산기슭에는 성인동(聖人洞)과 성재동(聖齋洞)이 있는데 동외(洞外)에는 궐리(闕里), 예수정(禮樹亭), 강단구지(講壇舊址)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성인동과 성재동은 이미 밝혔듯이 지금의 수청리의 전신이며, 예수정과 강단구지는 예수리이고 나머지 궐리는 현 노천의 구명임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이구산과 서낭당산을 등지고 모두 북향의 기슭에 입지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들 지명은 이구산과 함께 옛 중국의 성역(聖域)에서 따온 것임을 간과할 수 없다.   1637년경 이대일(李大一, 구암(龜岩) 李楨 선생의 曾孫)이 지었다는 사천관아(官衙)의 헌공청상량문(憲功廳上樑文)에 의하면,      “중국의 노(魯)나라 곡부(曲阜)와 산동성(山東省)의 추현(鄒縣)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가 나신 신령한 성역이다. 산수(山水)의 유래가 이 성역과 닮은 조선남단에 자리한 사천현은 동방(東邦)의 명지(名地)로서 이구산의 신령한 산세며 빼어난 산수는 나래처럼 북으로 펼쳐져 그 형세가 절승(絶勝)하여 영남의 목(咽喉)이 되고......”란 구절이 그것이다.   이처럼 이 고장의 옛 선인들은 우리나라에 공맹학(孔孟學, 儒學)이 풍미(風靡)하고 또 두 성인(聖人)을 추앙하던 나머지 심지어는 태어나신 향리(鄕里)의 지명가지 따온 것이다. 이구산(尼丘山)은 공부자(孔夫子)의 이름인 구(丘)와 자(字) 중니(仲尼)에서 따온 것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궐리(闕里) 또한 성인의 탄생지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궐리가 언제부터 장천이라 불리우게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여러 가지 지명고(地名考)를 살펴보건대 그 시기는 한말(韓末)때 부터라 추정될 뿐이다. 따라서 오늘날의 노천(魯川)은 적어도 1910년대 후라 할 것이며 지금도 흔히 놀내라 일컬는다. 놀내에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안놀내(內魯川, 안땀) 바깥놀내(外魯川, 큰땀)로 나누어져 있다.    • 마을 회관   여러 성바지가 입주하여 오늘날까지 이 땅을 지키며 고달픈 삶을 이어 오는동안 부락민의 자력(自力)과 당국의 지원으로 이루어 놓은 부락의 고동재산과 시설물들이 있다. 이 가운데 동민의 집회와 동리일을 집행하는 동회관(洞會館)은 옛날에는 집회소(集會所)라는 이름의 한옥(韓屋)이 안땀과 큰땀 중간지점에 있었으나 낡아서 허물어 버리고 1946년 가을 다시 동사(洞舍)를 건립하였다.   이어 1973년 3월에는 새마을운동을 펼쳐 동사 내부의 구조를 개수하고 방소기기와 집기류 일체를 구비해 놓았다. 그러다가 1992년에는 본동 출신 김장하(金章河, 진주 남성당한약방 경영)의 희사금(喜捨金)으로 종래의 건물을 철거하고 건평 50평(2층 콘크리트 스라브 지붕) 규모의 현대식 마을회관을 건립하여 하층에는 이장의 집무실과 남녀 노인들이 거쳐하는 경노실이 각각 마련되었고, 이층은 주민들의 교육 및 회의실로 다목적 이용되고 있다. 한편 동구(洞口)밖 노천교는 주민부담과 군비보조금 60만환으로 1956년 4월에 착공하여 7년후인 1962년에 준공한 교량이다.    • 6.25와 장산리 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은 10개 사단의 중무장 병력으로 거의 무방비 상태였던 38선을 기습남침하여 수도 서울은 3일만에 적의 수중에 들어갔고, 이어 파죽지세(破竹之勢)로 호남(湖南)을 석권한 북괴(北傀) 6사단(사단장 方虎山)은 7월 25일 그 주력으로써 순천(順天), 광양(光陽)을 약취(掠取)하고 동월 25일에는 하동을, 그리고 7월 31일에는 사천, 진주를 점령한 후 마산의 외곽인 진동방면까지 진출하였다.   이같이 무적을 자랑하던 적 6사단은 부산을 최후의 목표로 삼고 마산을 향해 진격하였으나 아군에 의해 진로(進路)가 차단됨으로서 의창군 진동리(鎭東里)와 함안군의 여한산(餘航山)에 이르는 진북(眞北), 진전면(鎭田面)의 첩첩한 고지에서 피아(彼我)의 교전으로 전선이 고착되고 말았다. 이런 가운데 미8군의 증원부대는 속속 상륙하여 증가되었다.   이에 워커(W.H.Walker)장군은 사천과 진주를 탈환하고 도시에 북괴군의 압력을 분산시키기 위한 의도로 정면(正面)에서 역공격을 펼 것을 결심하고, 제25사단장 킨(W.B.Kean)소장의 이름을 따서 후에 <킨 특수임무부대>라고 명명한 이 부대는 제25사단 예하 2개연대 외에 미해병대, 미 제5연대 전투단, 민기식(閔機植)부대, 김성은(金聖恩) 해병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 작전은 8월 7일에 개시되어 동월 9일에는 제25사단의 일부 부대들이 진주가도상의 진주고개에 도달하고 중앙의 제5연대 전투단은 그 선봉대가 마산~진주 가도에 도달하였으나 북괴군의 매복에 걸려 2개 포병대대를 상실하는 등 난관에 봉착하고 말았다.   한편, 남쪽의 해안도로를 따라 진격한 해병대는 다행한 편이어서 8월 12일 고성을 수복한 아군은 사천에서 동쪽 4km 지점인 본면 장산리의 노루목까지 진출하여 이곳 노천(魯川)에서 미 제35연대 및 국군 김성은 해병대와 적 6사단 제15연대와의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것이다. 이 전투에서 아군은 적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사천을 탈환하지 못하고 피아간에 손실만 입은 채 결국 당초의 출발점으로 되돌아 오고 말았다. 이에 북괴 6사단은 조용해져 8월말까지 진동리 진선의 중요한 정면은 교착상태가 지속되었다.   이 장산리 전투의 상황을 표로서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장산리(獐山里) 전투 주요 상황 • 전투 일시 : 1950. 8. 12.   ○ 아군 : 노천부락 용소산(龍沼山) 고지 및 만마마을 일원과 뒷산 능선 일대   ○ 적군 : 대곡부락 청법산(淸法山) 및 대산부락 뒤산 ※ 사천강 사이로 피아간의 전투거리 약 2.7km • 주요 지휘관   ○ 아군 : 미제 35연대장 대령 휘져(Henry G.Fisher), 한국군 해병대장 대령 김성은(金聖恩), 경찰대장 총경 최천(崔天)   ○ 적군 : 북괴군 제6사단장 소장 방호산(方虎山), 제15연대장 대좌 김현기(金顯基) • 피해사항   ○ 아군 : 전사자 미군 24명, 민간인 7명   ○ 적군 : 전사자 40여구, 차량파괴 수십대 • 특기사항   이 전투에서 주민들은 적치하(敵治下)에 있으면서 적정(敵情)을 아군에게 제공하여 크게 도움을 주었다고 전해지며, 수년전에는 당시 이 전투에 참전 한바 있던 미군 병사가 이미 노인이 되어 이곳을 찾아와 감회어린 눈으로 둘러보고 되돌아 갔다고 한다.

<대산(몽대)마을>

(2) 대산(垈山) 부락   한실(大谷)의 청널땀에서 부엉더미(벼랑) 밑을 흐르는 노천(魯川, 獐川)을 거슬러 올라가면 왼손 편에 사방이 산과 들로 둘러 둘러싸인 듯한 양지바른 대산부락이 눈앞에 펼쳐진다.   몽대(夢垈, 중심마을)를 비롯하여 건점(乾占), 배방골(排房谷), 저자(市)거리 등으로 형성된 이 부락은 아름다운 산등성이와 산자락들은 옛 여인들의 옷 자락처럼 뻗어 내렸고, 그 아래 넓게 펼쳐져 있는 들판 사이로 검은 아스팔트 길(泗川~固城線)이 달리고 또 잔물결의 사천강(泗川江)이 서장류(西長流)하니 한국 농촌풍경의 전형적(典型的)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정취(情趣)를 느끼게 한다.

<건점마을>

  동서쪽으로 반월을 그리고 이어져 나간 산과 들, 병풍처럼 둘러있는 남쪽과 서쪽의 산등성이 가운데 감싸인 듯한 부락은 참으로 아늑하고 포근한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부락 뒤쪽으로 눈을 돌리면 옛날에는 배방골에 절이 있어 고려 현종(顯宗)이 기구한 운명으로 어린시절 잠저(潛邸)하던 유서깊은 곳이며, 그 아래로 맑고 고요한 호수(湖水)는 소정들의 젖줄이 되고 있다.   청널모퉁이의 절벽을 ?아 길을 만든 모롱이, 산과 마을과 호수가 어우러져 아름다운 부락의 풍치를 더해 주고 있으며, 임진란 때는 수차의 전공(戰功)으로 용맹을 떨친 강덕룡(姜德龍), 정기룡(鄭起龍)장군과 함께 이른바 영남의 3룡(龍)이라 일컬었던 주몽룡(朱夢龍)장군의 출생지이기도 하다.   몽대(夢垈)란 이름도 이래서 생긴 동명(洞名)이다.

• 부락의 연원(淵源)   본 대산부락도 여러 부락과 마찬가지로 언제, 누가, 어떻게 살러 들어왔는지 부락의 자세한 연원을 고찰(考察)하여 엮어 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부락의 토박이 문중(門中)의 가보(家譜)나 입향조(入鄕祖)의 묘석(墓石), 살아 계시는 연로(年老)한 분들의 전해들은 이야기, 군데군데 발견되는 조상들의 발자취나 땅이름 등에서 근거를 잡아 살펴 볼 수 밖에 없다.   이상의 여러 가지를 근거로 하여 종합하여 추정해 보면, 지금으로부터 약 450여년전 아니면 그 보다 휠씬 전에 신안주씨(新安朱氏) 일가(一家)가 맨 먼저 들어와 삶의 터전을 잡고 살았음이 틀림없으나 대(代)를 이어 살지 못하고 언젠가 그 후손들이 이웃마을(甘谷)이나 각지로 다 떠나버리고 지금은 한 집도 살고 있지를 않다.   그런데 신안주씨가 먼저 들어와 살았다는 근거는 임진왜란 때에 금산군수(金山郡守)로 용맹을 떨친 무열공(武烈公) 주몽룡(朱夢龍)장군이 태어난(1563) 출생지로서 이로 인해 몽대(夢垈)라는 지명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후 사천이씨(泗川李氏) 우소재공파(迂疎齋公派), 진주하씨(晋州河氏), 양정공파(襄靖公派), 삭녕최씨(朔寧崔氏), 몽대파(夢垈派), 밀양박씨(密陽朴氏), 진주류씨(晋州柳氏) 순으로 입향 정착하여 토지(土地)를 개척(開拓)하고 부락을 형성해 나갔다고 하는데 다만 구전에 따랐을 뿐이다.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여러 성씨(姓氏)들이 살러 들어오고 나가고 하는 등의 변천을 거듭하여 오늘날과 같은 부락이 형성되었는데, 현재(1995년) 97세대 269명이 거주하고 있다.   흔히 촌락이라면 한두 성씨가 주종이 되어 부락이 구성되어 있음이 보통인데 대산은 몽대, 건점, 뱅이, 저자거리 등의 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 탓인지 각성(各姓)이 많기로 소문난 동네이다.   위 5성말고도 정씨(鄭氏)를 비롯하여 김씨(金氏)가 2파이고 허씨(許氏), 조씨(趙氏), 문(文)씨, 오씨(吳氏), 조(曺)씨, 이(李)씨, 강(姜)씨, 장(張)씨, 백(白)씨 등 성씨 구성이 다양하여 이 중에 밀양박씨가 주종(主宗)을 이루고 있다.    • 부락명의 유래   대산(垈山)이란 부락명은 본래 몽대(夢垈, 胎)에서 비롯되는데, 지금도 흔히 그렇게 불리운다. 몽대란 땅이름은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무열공(武烈公) 주장군(朱將軍)의 출생지로서 그가 태어날 때 그 부친 몽중(夢中)에 용(龍)을 보았다는 뜻에서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했는데, 이로 인해 뒤에 용꿈을 꾼 집터라 하여 몽대가 된 것이다.   그후 어느 때인가 몽대의 후속 이름으로 꿈몽(夢) 대신 천금산의 메산(山)을 취하여 ‘산자락의 집터’라는 뜻의 대산으로 이름이 바뀌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땅이름은 정착성이 짙어 한번 정해지면 여간해서 잘 바뀌지 않는 속성이 있는 법인데, 어찌하여 몽대란 지명이 대산으로 바뀌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여기에는 특별한 까닭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산의 전신인 몽대라는 지명이 생겨난 내력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무열공 주몽룡은, 조선 명종(明宗) 18년(1563) 9월 15일에 태어났다. 그 부친 참봉공(參奉公) 꿈에 천위(天威)가 진노(震怒)하고 비바람이 크게 이는데 청룡(靑龍)이 동방으로부터 비등(飛騰)하여 방안으로 들어오고 오색구름이 집을 두르거늘, 놀라서 깨니 구름은 거둬지고 정신이 아득한 가운데 옥동자(玉童子)가 태어남으로 어찌나 기뻐하여 이름을 몽룡(夢龍)이라 지었다고 한다.   이날에 남장천(南獐川 : 垈山 앞 내) 냇물이 3일 동안이나 말랐다가 다시 장유수(長流水)가 계속되니 사람들이 모두 대단히 괴이(怪異)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어린 그는 의용(儀容)이 장엄(莊嚴)하고 신골(神骨)이 청수(淸秀)하여 나이 겨우 10여 세에 능통(能通) 문학하고, 자라서 15세에 무기일신(武技日新)하여 용력(勇力)이 남달라 앉아서 십여장(十餘丈)을 뛰어 사람들이 다 장사라 칭하고, 21세에 무과(武科)에 등제(登第)했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오로지 부모 공경에만 정성을 다하였다.   28세가 되는 봄에 집 뒤산(현 千金山, 당시는 臥龍山) 용바위(龍巖)에 10여 척(尺)이나 되는 이무기(螭龍, 뿔이 없는 용)가 소반처럼 바위에 도사리고 비바람을 분기(噴起)하여 사람을 해(害)코저 함으로 모두 겁(怯)이 나서 근처에 가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궁시(弓矢)를 가지고 가보니 과연 소문대로 비늘이 영룡(玲龍)하고 서기(瑞氣)가 눈을 찌르는 듯한지라 공(公)이 분연(奮然)히 활을 쏘아 맞히니 용이 아니라 대검(大劍)이었다는 것이다.      이상은 <동성승람 : 東城勝覽> 총담(叢談)에 실려 있는 내용인데, 실지로 그의 행적(行蹟)을 살펴보면 대충 다음과 같다.   주몽룡(朱夢龍)은 조선 선조(宣朝) 때의 무신(武臣)으로 자(字)는 운중(雲仲), 호(號)는 용암(龍巖, 천금산의 용바위 이름을 땀), 무과에 급제한 후 선전관(宣傳官)이 되고,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산군수(金山郡守)로 의병장 강덕룡(姜德龍), 정기룡(鄭起龍) 등과 함께 거창 우지현(牛旨峴) 싸움에서 용전, 왜군을 격파하여 영남(嶺南)의 3용(龍)이라 불렸다. 이어 의령(宜寧)의 곽재우(郭再祐) 휘하에 들어가 부장(副將)으로 창녕(昌寧)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했고, 이어 거제(巨濟)에 주둔한 적을 협공할 때 참전, 용맹을 떨쳤다. 형조판서(刑曹判書)에 추증되고 태인(泰仁)의 충렬사(忠烈祠)와 의령 충익사(忠翼司)에 제향되었다. 시호(諡號)는 무열공(武烈公)이다. (제10편 전설 및 일화 참조)    • 천금산(千金山)   위로는 구름을 벗삼고 아래로는 소정, 쇠평들과 장천을 벗하면서 오랜 세월동안 산 아래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사람들의 숱한 애환(哀歡)을 지켜보고 간직해 온 산이다.   구전(口傳)에 따르면 산등성이에 커다란 바위를 용암(龍巖)이라 불렀는데, 앞글에서와 같이 어느 하루에 이룡(螭龍)이 나타나 사람을 해코저 하매 이 고장 출신 주몽룡이 활을 쏘아 맞히니 용이 아니고 대검(大劍)이더라는 전설이 전한다. 그래서인지 무열공(武烈公) 주몽룡의 호가 용암(龍巖)이다.   사천목씨(泗川睦氏) 선조의 묘와 무열공의 선친 참봉공의 묘자리가 양지바른 곳에 있었는데 지금은 이장해 가고 없어졌다.    • 배방사지(排房寺址)   대산부락 북서쪽 배방골에 있는 절터. 신라 때부터 내려온 고찰(古刹)로서 처음에는 노곡사(蘆谷寺)라 하였다. 고려 현종(顯宗) 순(詢)이 어릴 때 우거(寓居)하던 절로써 숱한 일화(逸話)를 남겼다. 훗날 임금을 모신 절이라 하여 배왕사(陪王寺)라 했는데 근세에 와서 불타 없어졌다. 이 사실을 오래도록 간직하기 위해 수년전 빗돌 하나를 세웠는데 비문을 보면 다음과 같다.

<碑文>   이 사지(寺址)는 구명 노곡(蘆谷)으로 고려 현종이 미시(微時)에 우거한 곳이다. 현종은 태조(太祖) 왕건(王建)의 제8자 욱(郁)의 아들로 휘(諱)는 순(詢)이요, 자는 안세(安世)이다. 욱이 청상(靑孀) 경종비(景宗妃)를 범륜(犯倫)한 죄로 사수현(泗水縣)에 유배되고 비(妃)는 순을 낳자 운명(殞命)하였다. 보모(保姆)에게 자란 비운(悲運)의 왕손을 측은히 여긴 성종(成宗)은 유배지 욱에게 돌려 주었다. 부자는 성은(聖恩)으로 외로운 회포를 풀었으나 적지(謫地, 귀양살이 하는 땅)에서 다시 사별하고 욱은 능화동(陵花洞)에 묻혔다. 천애고아(天涯孤兒)가 된 순은 잠저십년(潛邸十年)에 아제시(兒題詩)와 숱한 일화를 남기고 뒤에 왕위(王位)에 등극하니 이 분이 고려 8대 현종(顯宗)이다. 현종은 아버지 욱을 안종(安宗)이라 추서(追敍)하고 재궁(梓宮)을 건능(乾陵)으로 옮겼으며 사수현을 황고(皇考, 安宗)의 적거지(謫居地)라하여 사주(泗州)로 높이니 재위(在位) 6년(1015) 윤 6월의 일이다.   사적(事蹟)의 흔적만 남은 이곳에 사실(史實)을 새겨 표석을 세운다.   1988년 5월 일   사천문화원(泗川文化院) 세움   (제7편 문화재 및 유적 참조) • 별묘(別廟)   구암(龜岩) 이정(李禎)선생을 향사(享祀)하기 위해 건립한 신당(神堂). 본래 사천읍 구암리의 구계서원(龜溪書院)에 모셔오다가 1868년(고종 5년) 대원군(大院君) 집정 때 전국의 미사액서원(未賜額書院) 철폐령(撤廢令)에 딸 동 서원이 훼철(毁撤)되자 그 후손들이 대산부락 중간(529번지)에 선생의 봉사당(奉祀堂)을 세워 정부인(貞夫人) 의령심씨(宜寧沈氏)와 함께 해마다 제향하고 있다. • 중상골(僧喪谷)   배방사지 밑자락 대산소류지 옆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는 배방절의 중들이 죽으면 이곳에 화장(火葬)하였다고 한다. 배방절터와 중상골을 바라보면 불교성전에 나오는 글귀가 생각난다.   <모든 것이 다 덧없다. (諸行無常) 이 덧없는 삶을 영원한 삶으로 바꾸는 방법이 수도(修道)의 길이며 영원한 삶을 가진 사람이 곧 성불(成佛)한 사람이다. 인간은 누구나 성불할 수 있고 영원한 삶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이다.> • 대산소류지(垈山小溜池)   대산부락 북쪽 천금산 기슭에 있는 저수지. 논에 물을 대기 위하여 오목 들어간 산 밑에 둑을 쌓고 흐르는 시냇물을 막아주는 봇물이다. 1958년경에 만들어진 이 소류지는 둘레가 약 300m 정도 되는 소담한 저수지로서 아래에 있는 많은 논들의 젓줄 구실을 해 주고 있다.   저수지가 축조된 후 밭을 논으로 만들 때 대산 부락 489의 1번지 밭에서 돌칼, 살촉, 투기류 등의 선사유물이 많이 수습되었다. • 도리산   대산부락 동쪽 저자거리 옆에 있는 산등성이로 고(故) 백남성(白南成, 水原)의 열부인(烈夫人) 창녕조씨(昌寧曺氏)의 열행비(烈行碑)가 서 있다.   이 비는 1942년 12월에 건립되었으며 조씨의 열행을 기리기 위해 향리인(鄕里人) 100여 명이 모정계(慕貞契)를 모아 해마다 음력 3월말에 추모하고 있다.   ㅇ 비선덩이 (산) : 대산부락 북동쪽에 있는 산. 밀양박씨(密陽朴氏) 선산의 비가 서 있음.   ㅇ 소 정 들 (들) : 대산부락(동대) 바로 앞에 있는 20ha의 들판으로 1987년 10월 경지정리가 완공되어 기계화 영농을 하고 있다.   ㅇ 덕구개 (골) : 대산에서 감곡리 복상(伏象)으로 넘어가는 고개.   ㅇ 뱅이골 (골) : 대산소류지 뒤에 있는 골짜기. 지금은 단감을 많이 재배하여 소득이 많다 함.   ㅇ 독쇄골 (골) : 청금산 북쪽 배방동 아래에 있는 골, 옛날에는 뱀(독사)이 많았다 한다.   ㅇ 똥매등 (산) : 배방동 옆에 둥글게 생긴 산등에 큰 바위가 있으며 전주이씨(全州李氏) 묘지로 되어 있다.   ㅇ 저자거리 (마을) : 동쪽 이웃마을 복상(伏象)을 경계(境界)로 옛날은 여기서 저자(市場)가 섯다고 하며 지금은 동화약방, 삼은교회, 장산휴게소 등이 있다.   ㅇ 쇠평들 (들) : 대산부락 남쪽에 있는 들판으로 옛날에는 사철(砂鐵)이 많이 났다고 하여 철평(鐵坪)들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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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수정일
2016-06-23 16:19: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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